제주 4·3 사건
제주 4·3 사건 ▼
1947년 3월 1일을 기정으로 하여 1948년 4월 3일 발생한 소요사태 및 1954년 9월 21일까지 발생한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주민들이 희생당한 사건으로 미군정기에 발생하여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 이르기까지 7년여에 걸쳐 지속된,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
<제주 4·3 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 4·3 평화재단
사월이다. 섬에도 봄이 도착했다.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이 푸른 섬의 사월에는 어김없이 동백이 진다. 꽃에 배인 핏물은 몇십 년이 흘러도 이곳에 남아있다. 흙 속에, 바다 아래에, 벼랑 끝에, 마음 깊숙 어딘가에. 구슬픈 넋들의 절규와 남은 자들의 곡소리가 섬 곳곳에 울려 퍼진다.
죄 없이 꺾이고 스러져야 했던 동백꽃들. 처참하게 떠난 그들을 그러모아 보듬어 주고 싶다. 그렇기에 많은 이들의 가슴팍에 동백꽃 추모 배지가 달려 있는 거겠지. 나는 감히 떠올려 보지도 못한다. 어떤 두려움이었을지, 어떤 고통이었을지.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자매, 아들과 딸, 아내와 남편을 하릴없이 잃어야 했던 심정이 어땠을지.
할머니의 울먹임을 기억한다. 언젠가 수필가인 할머니의 시 낭송을 들은 적이 있다. 할머니가 직접 써 내려간 그 시는 그리운 아버지를 향한 부르짖음이었다. 덤덤히 흘러가던 할머니의 음성은 갈수록 떨려왔고, 끝내 눈물을 보이셨다.
할머니가 고작 일곱 살이었을 때의 일이다. 11월의 일요일 아침, 먼발치 총소리와 함께 어깨에 죽창을 든 장정들이 골목길을 따라 시커멓게 몰려왔다. 한순간에 집 유리창이 깨지고, 겁에 질린 어린 할머니와 식구들은 맨발로 뛰쳐나와 남의 집 대나무밭에 몸을 숨겨야 했다. 두려움에 휩싸인 몇 시간이 흐르고 상공에서 선회하던 비행기가 사라진 후에야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것들을 집어삼키는 뜨거운 불길에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새벽에 갈아입은 분홍색 명주 치마의 해짐이 그날의 아수라장을 말해주었다.
이 소식을 접하게 된 집안의 가장인 할머니의 아버지(진외조부)는 급히 서울의 직장을 접고 내려와야 했다. 그 뒤로 다섯 식구가 부엌도 없는 쪽방을 얻어 웅크려 살면서도 새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하지만 불행은 또다시 몰려왔다. 한국 전쟁 발발 후 7월의 어느 날, 평소와 다름없이 일하러 간다던 아버지의 모습이 할머니에겐 아버지와의 마지막 기억이 되어 버렸다. 하염없이 기다려도 아버지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뒤늦게서야 할머니와 식구들은 섬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아버지를 시신도 찾지 못하도록 차가운 바다에 산 채로 수장시켜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고을 수장이었던 아버지가 민초들을 보호하기 위해 군인들의 무리한 명령을 거절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어떻게 같은 동족에게 그런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단 말인가.
몇 년 전, 서울에서 온 친구가 4·3 사건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되고 내게 이렇게 물어왔던 적이 있다. "아니 난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그때 도대체 왜 그렇게 다 잔인하게 죽였던 거야?"
‘백살일비, 양민 백을 죽이면 그중에 게릴라 한 명이 끼여 있을 것이고 이삼만을 죽이면 게릴라는 완전히 소탕될 것이다.’ 현기영의 단편 ‘쇠와 살’에 나온 구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심하게 억지스럽고 기가 차는 주장이지만 실제로 이 ‘백살일비’의 칼끝에 무고한 목숨들이 잘려 나갔다. 그 시절의 제주는, 지옥 그 자체였다.
'무명천 할머니'로 불리는 진아영 할머니는 서른다섯에 고향집 앞에서 경찰이 발사한 총탄에 맞아 턱을 잃고 평생 턱에 무명천을 두르고 다니셔야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세월이 지나갔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극심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여전히 경찰 제복만 보면 덜덜 몸을 떨며 길을 일부러 돌아서 가고, 가위에 시달리며 피해의식에 사로 잡히는 이들도 있다.
2019년에는 제71주년 제주 4·3 희생자 추념식에서 참상을 겪어야 했던 김연옥 할머니의 외손녀 정향신 씨가 했던 연설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모 형제가 모두 바다에 떠내려 가 물고기에 다 뜯어 먹혔다는 생각 때문에 멸치 하나 조차 드시지 못한다는 할머니의 이야기는 눈물을 자아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지나가버린 역사 중 일부라고 하기엔 아픔의 흔적이 우리의 곁에 짙고 깊게 괴어 있다. 차라리 지우고 싶어도 도통 지워지지 않는 잔상과 상흔이 누군가에겐 평생토록 지독하게 남아 있다. 우연히 대학 수업 중 4·3 희생자에 나와있는 할머니의 아버지 이름 석자에 시간이 잠시 정지된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어쩌면 살아남은 자들의 시간은 아물지 못하고 그곳에 멈춰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제주의 하늘은 잿빛이다. 빗물마저 쉴 새 없이 주룩주룩 내린다. 그 시절 쉽게 뭉그러져야 했던 동백꽃들이 흘리는 서러운 눈물인가.
바람의 집
/ 이종형
당신은 물었다
봄이 주춤 뒷걸음치는 이 바람 어디서 오는 거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4월의 섬 바람은
수의 없이 죽은 사내들과
관에 묻히지 못한 아내들과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잃은 아이의 울음 같은 것
밟고 선 땅 아래가 죽은 자의 무덤인 줄
봄맞이하러 온 당신은 몰랐겠으나
돌담 아래
제 몸의 피 다 쏟은 채
모가지 뚝뚝 부러진
동백꽃 주검을 당신은 보지 못했겠으나
섬은 오래전부터
통풍을 앓아온 환자처럼
살갗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화들짝 놀라 비명을 질러댔던 것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그러므로
당신이 서 있는 자리가
바람의 집이었던 것
-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이종형)>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