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다섯에 닿았던 말
열다섯 무렵이었다. 여름이 물러가고 더위가 한풀 꺾여 여름 교복을 벗어던졌다. 대신 옷장 안에 고이 잠들어 있던 빳빳한 춘추 교복을 꺼내 입고 학교로 향했다. 계절은 가을이라는 이름을 내달았지만 여전히 학교는 열기가 미처 가시지 않은 듯했다. 교실은 늘 그렇듯이 어수선했다. 난 종종 음성이 가득 찬 공간에 있으면 수영장에 있는 것처럼 귀가 '웅웅-'거리는 아득한 어지럼증을 느끼곤 하는데, 그날도 그랬다. 어지러웠다.
하나 둘 친구들도 등교하고 어느덧 삼삼오오 모여들어 이야기가 오갔다. 비록 중학생이었지만 당시엔 퍽 심각한 고민거리가 수두룩했다. 애들 모두 어른과 다를 바 없이 아프고 힘든 일들이 존재했다. 난 그저 그런 이야기들을 잠자코 들어주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경청 능력만 발달했던 터라 말하는 법에는 젬병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따라 한 친구가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나에게 꽂아 들어오는 시선을 눈치챘지만 난 애써 모른 체했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가 선생님이 오실 시간이 되자 뿔뿔이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다. 단, 그 친구만을 제외하고. 그제야 내가 영문 모를 표정으로 쳐다보자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넌 남의 얘기를 정말 잘 들어줘. 그래서 고맙고 좋은데‥ 걱정도 돼. 정작 네 얘기는 안 들어본 것 같아서."
난 그 말을 듣는 순간 어떤 둔탁한 것이 내 머리를 쿵, 하고 치고 가는 얼얼한 통증을 느꼈다. 정곡을 제대로 찔렸다. 모른 척하고 싶었던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들킨 기분이었다. 그때 분명 얼굴이 온통 붉어졌을 거다. 친구는 비꼬는 것도 아닌 그저 걱정한 투로 말한 거였지만 난 어쩔 줄 몰라했다. 친구가 자리로 돌아가고 나서도, 한참 수업이 시작되고 나서도 난 그 말을 종일 곱씹었다. 어쩌면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지금까지도.
얼마 전 엄마에게 괜스레 투정을 부렸다. 내가 그토록 아파했던 걸 왜 몰랐느냐고. 왜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느냐고. 내가 내뱉었지만 철없는 말이었다. 이미 지나간 일을 들쑤셔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음을 알면서도 그냥 원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자 엄마는 토해내듯 말했다.
"네가 말 안 하는데 엄마가 어떻게 알아."
엄마의 말에 서운함이 앞서 틱틱거렸지만 알고 있다. 말을 안 했는데, 엄마가 어떻게 알아. 난 언제나 안으로 삭히는 법에 익숙했다. 참고 견디는 법. 화가 나도, 슬퍼도, 무너질 것만 같아도 일단은 참았고, 견뎠고, 버텼다. 감정과 말도 배출해내지 못하고 안에 쌓이다 보면 서로 뭉치고 엉켜 커다래진다. 커지고 커져 거대해진 덩어리는 목구멍에서 가로막혀 입 밖으로 빠져나오기도 한참 걸린다. 그렇게 마음 끝자락에 자리한 검은 아이도 양분을 먹은 듯 무럭무럭 자라난다.
내가 나의 꽁꽁 숨겨놓았던 얼룩을 처음 말한 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였다. 열다섯에 들었던 그 말이 열아홉에 기어코 도착해 실현된 순간이었다. 그때 내 이야기를 들었던 친구 S는 집에 가서 속상해 울었다고 했다. 당시 다니던 미술학원을 그만두는 날, 마지막 상담에서 학원 선생님이 눈물을 보이셨다. 난 그때, 나도 모르게 적잖이 놀랐던 것 같다. 여전히 주저하게 되기는 하지만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아서. 비웃는 사람이 없어서. 그리고 진심으로 들어주고 아파해주는 사람이 있어서.
나의 상처를 토로하지 않는다는 건, 나를 아껴주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 자신 조차 속이는 일인 건지도 모르겠다. 나만 힘든 거 아니라고. 남들도 다 이만큼 아픈 거라고. 이 정도면 별 것 아니라고. 이러면서 자꾸만 감정을 삼키는 버릇을 들이는 거다.
이석원 작가는 책 <언제 들어도 좋은 말>에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은 세계와 세계가 만나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사람은 모두 각자의 세계를 가지고 태어난다. 똑같은 사건이 벌어질지라도 누군가는 별 것 아니라며 웃고 넘기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망연자실해 중심을 잡지 못하고 처참히 무너지기도 하는 것이다. 남들도 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니까.
그렇다고 해서 무작정 힘들 때마다 주변 사람을 붙들고 늘어지라는 말도 아니다. 자칭 비공식 상담소로서 누군가의 아픔을 매번 듣는 일은 그리 쉽지만은 않다. 다만 내가 정말 무너질 것만 같을 때 안으로만 삭히지는 말자. 곪고 곪기 전에 나의 옆에 있는 그 사람 혹은 다른 이의 어깨를 빌려보자. 물론 그만큼 나도 어깨를 내어줄 줄 알아야 한다.
친구 S는 언젠가 내게 그랬다. 웬만한 심각한 일이 있어도 너와 전화하고 나면 별 일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마음을 말한다는 건 그런 거다. 기우뚱거리며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비틀거려도 서로의 마음에 기대어 바로 설 수 있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