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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토끼 Jun 05. 2021

사선으로

기울어진 것들



빗방울이 세차게 추락하며 마른땅을 흥건하게 적시던 날. 바람까지 가세하여 빗줄기는 올곧게 내리지 않고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창밖의 사람들은 저마다 비와 바람을 막아보겠다고 우산을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한바탕 전쟁을 치르는 것처럼 보였다. 얌전하지 못한 날씨와의 전쟁. 



공격자는 비와 바람, 피공격자는 우산이라는 방패를 거머쥔 약하디 약한 인간. 곳곳에 자연의 무자비한 공격에 무너지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뒤집어진 우산에 허망한 표정을 짓는 여자와 부러진 우산살에 패배를 인정하고 함씬 젖으며 유유히 거니는 아저씨, 어디서 주운 듯한 종이 상자를 뒤집어쓰고 뛰어다니는 학생들, 심지어는 정체 모를 커다란 나뭇잎을 든 아이들도 있었다.      



이러한 바깥 상황의 난리와는 달리 내가 앉아있는 카페 안은 제법 평화로웠다. 비록 비를 몰고 들어온 사람들의 젖은 발자국으로 찰박이는 소리가 울리긴 했지만. 그것만 빼면 비가 오고 있다는 사실도 잊을 만큼 잔잔했다.



그러한 고요를 즐기며 창밖을 구경하던 중이었다. 두 연인이 카페 쪽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람은 둘, 방패는 하나. 작은 우산 안으로 두 몸을 구겨 넣느라 웅크린 두 사람의 형체가 다정했다. 작은 사람을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우산과 큰 사람의 옷자락을 자꾸만 끌어당기는 작은 사람의 손, 작은 사람의 어깨를 감싼 큰 사람의 기다란 팔.      



비바람이 마구 공격을 퍼부어 댔지만, 연인의 만면에는 웃음꽃이 피어 있었다. 언뜻 생각했다. 그 전쟁에서 진 건 자연일지도 모르겠다고. 두 연인의 머리칼과 어깨에 축축한 빗자국이 생기긴 했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의 기억이다. 다섯 살 터울의 사촌 언니와 한 살 터울의 또 다른 언니와 함께 셋이서 몰래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버스로 왕복 두 시간의 거리였던 탓에 난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돌아오는 버스 창 너머는 껌껌하고 차멀미로 속은 몹시도 울렁거렸다. 어느새 난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그때 옆자리에 앉아있던 사촌 언니가 기대어 자라며 어깨를 밑으로 기울였다. 이에 나도 언니의 기울어진 어깨를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지금 떠올려 보면 언니도 너무 어린 나이였는데. 그날 대부분의 기억은 잠겨버렸지만, 언니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온기만큼은 또렷이 남아있다.     



때로는 세상 전체가 온통 겨울을 걷는 듯 쌀쌀맞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마음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장면들을 목도하게 된다. 한쪽으로 잔뜩 치우쳐진 우산의 기울기. 옆 사람을 위해 어깨를 밑으로 기울이는 배려. 그 사람을 믿고 기대느라 기울어진 머리의 방향. 바람에 밀쳐져 옆으로 휘어질지언정 쓰러지지는 않는 들꽃들. 길바닥에 흩어진 타인의 물건을 주워주기 위해 꼿꼿했던 허리를 기울이는 사람들. 누군가를 향해 기울어진 마음 같은 것들.      






어디로든 기울어진 것들은 대체로 사랑스럽다. 어쩌면 사선으로 기울어진 순간들이 있기에 아직은 이 사회가 삐걱거리면서도 계속 맞물리며 돌아가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오늘,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어느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나요?”






무지렁이 시인의 말

/ 선토끼


반듯하게 내리꽂은 혹은 드러누운 시시한 직선보다,

흐물거리며 조잘거리는 시끄러운 물결보다,

내부에 장렬한 빗금을 그으며 어딘가로 기울어진 사선이 좋습니다

어느 방향으로든 기울어진 것들은 나를 울리곤 하니까요     


2021.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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