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여담(飮食餘談) 3 - 주꾸미의 응원
학창 시절 수학을 가르치는 남자 선생님의 별명은 주꾸미였다. 주꾸미라고 쓰지만 된소리 정겨운 지방의 학교였던 만큼 '쭈꾸미'라고 불렸을 것이다. 민머리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제법 위엄 있는 문어나 낙지가 되지 못한 것은 체구가 작아서였다. 짓궂은 아이들은 수학 공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매일 주꾸미만 씹어 댔고 사람 좋은 그는 그저 웃었다. 문어나, 적어도 낙지 정도 됐다면 그렇게 함부로 할 수 있었을까.
주꾸미를 이렇게 여기는 것은 비단 어제오늘 일만은 아니다. 여전히 여덟 개의 다리를 가진 비슷한 모양새의 낙지나 문어와 비교해 좀 밀리는 것 아니냐고 다들 생각한다. 대문어는 비싼 값에 먹으면서도 주꾸미라고 하면 그까짓 것 뭐 먹을 게 있을까 업신여기기도 한다. 옛날에도 그랬다. 주꾸미를 한자로 적을 때도 쭈그릴 준 자를 써서 '준어'라고 했다. 평소 움츠리고 있는 생김새 때문이겠지만, 왠지 형뻘인 문어와 낙지에 잔뜩 주눅 들어 쭈그리고 있는 주꾸미가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쭈그리고 있을망정, 지금 이 봄날 주꾸미는 다르다. 5~6월 산란기를 앞두고 암컷 머리의 알주머니에 알이 꽉 들어찬다. 알이 꽉 찬 주꾸미는 낙지와 문어 보라는 듯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있는 것도 같다. 주꾸미 알은 긴 겨울 보내고 비로소 봄이 오는 것을 알리는 별미로 친다. 알뿐만이 아니다. 살의 맛은 낙지보다 달고 문어 못지않은 쫄깃한 식감을 뽐낸다. 봄이 오면 이제 주꾸미 먹을 때가 됐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이유다.
싱싱한 주꾸미는 낙지와 마찬가지로 회로 먹을 수 있다. 보통 봄에는 알의 맛을 즐기기 위해 데침 회로 먹는다. 주꾸미 샤부샤부다. 기본 육수와 싱싱한 주꾸미만 있다면 요리 준비가 끝난다. 데쳐 먹는 시간과 방법은 사람마다 다르지만 산지에서는 연한 살의 맛을 즐기기 위해서 살짝만 데치는 것을 권한다.
끓는 육수에 들어가 잔뜩 오므린 주꾸미의 머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먼저 익는 다리를 집는다. 초고추장을 곁들이기도 하고 간장을 기본으로 한 양념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갓 데친 주꾸미를 입에 넣으면 봄의 상큼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들어온다. 머리에 든 알은 쌀 모양이다. 맛도 쌀을 살짝 익힌 것과 비슷하다. 씹다 보면 고소한 맛이 난다. 설컹거리며 씹히는 식감은 봄날 딱 적당한 햇볕과 닮았다. 많이 먹어도 된다. 고단백 저칼로리라 입에 가득 넣고 시원스럽게 씹어도 부담이 없다.
봄날의 주꾸미는 구워도 좋고 볶아도 좋다. 신선한 주꾸미에 갖은 채소와 매콤한 양념을 더하면, 더할 나위 없는 소주 안주가 된다. 강한 양념만 입에 남는 수입 냉동 주꾸미와는 다르다. 주꾸미 다리 하나에 한 잔 털어 넣다 보면 싱그러운 봄기운에 취한 것인지 술에 취한 것인지 알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주꾸미에 취해 생각한다. 그 시절 체구 작은 민머리 수학 선생이 아니어도, 온갖 것에 치어 그저 쭈그리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봄의 주꾸미는 든든한 응원을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쭈그리고 있어도 괜찮아. 너에게도 결국, 언젠간는 봄이 올 거야. 그때 머릿속 가득 들어찬 것을 보여주면 돼. 그것이 알이든, 아니면 그 무엇이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