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필요했던 쉼표
삶의 진로와 방향에 대해, 서른일곱의 나는 여전히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고민을 잊은 채 현재에 마냥 집중하던 시간이 지나가고 또다시 시작된 고민의 시간. 친구들이 거의 대부분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아 기르는 사이, 나만 홀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전문직이라든지 성공한 사업가가 아닌 그저 평범한 임금노동자에 불과한 싱글 여성. 한 때 잠시 작가를 꿈꾸어 짧지 않은 시간을 글쓰기에 헌신하고, 문예창작과에 다시 들어가기도 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어째서 그러한 삶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당시에는, 그러니깐 무려 5년 이상, 나는 문학이 내 삶을 조금이라도 구원할 줄로 알았던 모양이다.
짧은 2박 3일 간 주문진의 외진 어촌 마을인 오리진항에 머무르면서, 나는 쉬기 위해 마련한 삼일 동안에도 이미 무수히 많은 선택들을 하고 있음에 놀랐다. 쉰다는 행위에는 기본적으로 어느 정도는 '선택을 누군가에게 위임'해야 하는 일이 포함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위임하지 못했고, 아무에게도 의탁하지 못해 결과적으로 어디에서든 완벽하게 쉴 수 없음을 깨달았다. 삶은 기본적으로 연속적이고, 삶의 어느 한 부분을 뚝 떼어다가 삭제하거나 어딘가에 갖다 버릴 수도, 수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므로, 나는 부득이 푹 쉬고자 한 장소에 와서도 끊임없이 다음을 위한 선택을 하기에 바빴다. 주문진에 와서도 루틴을 지켜야 한다는 명목 하에 손에서 놓지 못하던 일들이 있었다.
그럼에도 오랜만에 모든 일상을 멈추고 낯선 곳에 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니, 베란다로 다가가면 얼마든지 일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창 밖에 가득했던 자동차와 전철 소음으로부터 벗어났다는 사실 만으로도 사실 나는 크게 위로받았다. 고요한 어촌의 풍경, 밤에는 바닷가라는 이유 만으로도 살짝 무섭기도 했던 어여쁜 숙소, 집에서 걸어서 한강에 가닿듯 조금만 걸어가면 펼쳐지던 드넓은 모래사장, 끝없는 파도소리, 그리고 나를 보고 늘 놀라던 어린 길고양이들, 어플에 표시되는 도착시간에 상관없이 불쑥 나타나 나를 태워주던 300번대 버스들,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하염없이 펼쳐지던 푸르른 풍경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서울보다 훨씬 선선한 바람과 언제나 미세먼지 매우 좋음으로 표시될 만큼 맑았던 공기, 서울보다 훨씬 빠르게 밝아오던 아침에 저마다의 불빛을 밝히고 바다로 나가던 선박 따위들. 그런 것들이 전부 다 내게 위로가 되었다.
다만 서울에서 누리던 편리는 이곳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본래 거의 숙소에 틀어박혀 있으면서 배달음식을 주문해 먹으려고 했는데, 주문진에서는 배달하는 오토바이들이 전혀 없었다. 하긴, 다들 자차로 이동하면 그만인데 누가 배달음식을 시켜먹을까. 회나 해산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나는 주문진에 오자마자 첫끼를 유명한 맛집이라는 대동면옥에 가서 비빔막국수와 수육을 먹으며 시작했는데, 그 뒤로는 주로 편의점 음식을 먹거나 인근 카페에서 디저트류로 배를 채웠다. 그런 아주 작은 불편함을 제외하면 불편할 게 전혀 없는, 아주 사소한 풍경들 마저도 정겹게 느껴지던 이 어촌마을에서 나는 삼일이 아닌 한 달을 머물러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주문진에 나는 총 세 권의 책을 가져갔지만 이 중 <당신의 관계에 정리가 필요할 때>와 <왕의 재정 2>만을 읽을 수 있었다. 첫 번째 책은 최근 협찬을 받은 책인데, 나이가 들수록 관계가 깊어지기는커녕, 오래된 관계를 손절하는 상황까지 겪어야 했던 나의 어려움들이 비단 나만의 어려움이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 책이었다. 위로와 공감, 그리고 진지하게 인간관계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주문진에 오기 전 나는 마음에 관계에 대한 목마름과 공허함이 있었고 여러 친구들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중 J와 주문진에 온 첫날 여러 카톡을 주고받았는데, 최근 그 친구도 나처럼 여러모로 관계에 대한 어려움에 지쳐있는 상태였다. 대화의 끝에 서로 한 움큼 정도의 위로를 주고받았고 나는 이 책을 J에게 추천했다.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최근에 겪은 사소하고도 아픈 일이 떠올랐다.
앞으로 어떤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할까. 사실 이 책을 읽으면서는 사람들을 자꾸만 떠나가게 만들었던 나의 약함에 대해 많이 돌아보았다. 배려가, 많이, 부족한 걸까. 내 행동이 반복적으로 야기하는 오해는 무엇일까, 같은 생각들. 외로움과 애정에 대한 결핍감이 곧잘 관계를 망침을 깨닫는다. 상대방은 나에게 내색도 하지 않은 채 나를 견디다 못해 떠난다. 나는 뒤늦게 그가 나를 견뎌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거나 상처를 입는다. 이런 못난 레퍼토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어렵다.
<왕의 재정 2>를 읽으면서는 나를 하나님 앞에 돌아서게 했던 비전과 꿈을, 내가 약간은 잘못된 방향으로 실행해나가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대출을 받아 무언가를 해보고자 했던 어리석음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신앙적인 문제들을. 읽는 동안 조금 아팠고, 혼란스러웠다. 다시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싶은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면 좋을지.
하지만 나는 지금이랑은 조금 다르게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내가 머물었던 곳은 주문진읍 오리나루2길에 있다. 이 동네가 주문5리이구나. 글월을 붓는, 혹은 글월에 뜻을 두는 나루라는 뜻의 주문진. 눈에 온통 정겨운 풍경들을 담아간다. 소박하고 작은 것들이 어우러진 동네. 이 곳에 왔다 갈 뿐인데 나는 어쩐지 한 뼘 정도 자라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올곧이 선택하고 책임지며, 되돌릴 수 없는, 내 힘만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내 인생을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나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