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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ng Juha Jul 02. 2021

경험의 고유성에 대해

어느 작가의 산문집을 읽다가

우리가 어떤 경험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같은 시공간 속에서 동일한 경험을 한다고 해도 우리 각자가 인식하는 '경험'이 내용적으로 같기란 도무지 불가능하다. 하물며 서로 다른 경험을 한 이들이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언어라는 도구로 공유할 때, 특정 경험이 과연 공유된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세상을 신이 창조했다고 믿는 사람인데, 어째서 우리는 각각 세상을 다르게 인식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는가에 대해 늘 의문을 품고 있다. 



뜬금없이 이런 생각에 젖어드는 까닭은 늘 밝은 얼굴을 한 어느 작가의 산문집에서 읽는 어두운 경험들 때문이다. 그러한 경험들이 그로 하여금 소설을 쓰게 했을까 하는 생각에 마음이 서성인다. 글을 쓰는 이들, 그중에서도 소설을 쓰는 이들의 삶에는 분명 일정 부분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저자는 그러한 인식을 작가들에 대한 편견으로 보는 듯 하지만, 저자가 가진 고유한 경험들을 풀어놓을 때면 자꾸만 그렇게 느끼게 된다. 


경험은 누구에게나 개별적이고 고유하여, 타인과 완벽하게 공유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타인과 공유하는 일에 있어 월등히 뛰어나다. 그러한 뛰어난 재능으로 타인을 감동시키거나 은연중 설득하는 데 성공하고는 한다. 어떤 고유한 경험이 발화되거나 글로 옮겨질 때, 거기에는 그 경험을 '공유'하고자 하는 목적성이 전제된다. 목적 없이 발화되는 경험이나 생각은 없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의 생각으로 돌아가, 내가 믿고 있는 이 세상의 창조주는 어째서 피조물들이 언어가 없이는 도무지 서로의 경험을 공유할 수 없도록 만들었을까. 아니, 그러한 사실에 앞서 어째서 우리를 모두가 다른 인식 체계를 가진 이들로 만들었을까. 그 결과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 무수한 대화를 하며 서로를 용납하는 과정으로서 '사랑'을 하도록 만든 까닭이 무얼까. 만약 우리가 완벽하게 타인을 이해하고 타인이 겪은 경험을 완벽하게 알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타인의 경험을 완벽하게 알아차리거나 감각하고자 노력하는 사이, 우리의 고유성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걸까.


궁금하다. 서로의 고유한 경험들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오해로 가득한 세상 속에 우리를 살게 한 창조주의 뜻이 무척이나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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