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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호 Apr 16. 2024

봄이 물었다, 꽃을 피웠냐고





오랜만에 을지로 지하상가를 걷고 있다. 비가 와서 그런가. 좁은 통로가 경복궁 야간 개장 매표소맹키로 붐빈다. 나는 힘들지만, 물건을 파는 이들의 표정은 밝다. 상인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군중의 틈에서 빠져나왔다.



흐릿하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 속에서 분홍색 광고판이 눈에 들어왔다. 카드회사 이름이 적혀있는 걸 보니 무슨 공모전 입상작인가 보다.



"봄이 묻는다. 너는 어떤 꽃을 피울 거야?"





와! 좋다! 내용은 물론이고 디자인도 마음에 쏙 든다. 자세히 보니 대상 수상작이다.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에 괜히 우쭐하며 어깨를 들썩거린다. 찰칵 사진을 찍고 계속 걸으며 방금 본 문장을 곱씹는다. 만일 내가 이 공모전에 출품했더라면 어떤 문장을 적어냈을까. 늘 하던 대로, 개그 욕심을 양껏 집어넣지 않았을까? 이렇게.



봄은 짧다. 한 글자니까. 봄.


가을도 짧다. 한 글자니까. 갈.


여름은 길다. 여어어어어어름.


겨울도 길다. 겨어어어어어울.


아몰랑.



미안하다. 되지도 않는 소리 집어치우고 다시 계절의 문장으로 돌아와 본다. 재미 반 공부 반으로 대상 수상작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여름'을 가지고 문장 하나를 만들어 봤다.



"여름이 내게 물어왔다. 뜨겁게 살고 있느냐고."



그리고...



내가 쓴 문장에 곧바로 뒤통수를 맞았다.






뜨뜨미지근하다는 말. 지금 내 모습에 딱 맞는 표현이다. 나는 요즘, '요상한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다. 딱히 불만은 없다. 회사 생활도, 취미 생활도, 가정생활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았는지 요즘처럼 편안한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근데 기운이 없고 활력이 없고 재미가 없다. 와 이라노 이거.



열심히 살고는 있으나 마음이 차갑게 식어가는 이 더러운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 벌써 마흔 중반. 봄은 벌써 지났고 여름마저도 끝나간다. 봄이 지나가는 동안 나는 아무 꽃도 피우지 못했다. 그렇다면 여름에 뜨겁게 살긴 했었나. 입꾹닫이 이어진다. 두 계절을 이렇게 보냈는데 가을에 무슨 열매를 맺을 수 있단 말인가. 이대로 차가운 겨울을 맞이하게 될 것만 같아 두렵다. 잠깐, 이 문단 첫 문장에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했냐? 니가? 진짜?



뻥 치시네.



인생에 봄이 있었을까 알아차리기도 전에 여름이 와버렸다. 꽃을 피우기엔 너무 짧았던 젊은 날. 적어도 그렇게 느껴졌던 (이제 와) 소중한 날들. 그때로 다시 돌아가라면 나는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까. 정말로 그럴 수 있을까. 까놓고 말해 자신이 없다. 똑같이 행동하고 똑같이 생각할 것만 같다. 안 되겠다. 자기합리화(花) 꽃을 피워야겠다. 이미 떠나버린 것을 돌려차기 할 순 없을 노릇이잖은가.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두어야지.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고 믿고 싶다. 우스갯소리로 적어 놓았던 내 인생의 '여어어어어어름'이 현실이 되었으면 한다. 삶의 계절에서 뜨거운 여름이 가장 길게 이어지기를. 가을이 오지 않을지라도, 그리하여 달콤한 열매를 맺을 수 없다 하더라도, 주어진 모든 순간에 열정을 담아 '핫'하게 보냈다면 그건 또 그것대로 괜찮지 아니한가.



겨울이 지나고 봄꽃이 피어 잠시 잊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름형 인간이다. 땀이 터지고 살이 타고 피부가 벗겨져야 하는 사람.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 그저 뜨겁게 살아가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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