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1년 전부터 준비한 몽블랑 트레킹(TMB, Tour de Montblanc)을 떠난다. 뚜르 드 몽블랑은 트레킹을 즐기는 사람들의 로망 중 하나이며, 인생의 버킷리스트로 꼽는 이들이 많다. 뚜르 드 몽블랑은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 산군을 한 바뀌 돌며 170km를 걷는 길로 프랑스, 이탈리아, 스위스 3개국에 걸쳐 있으며, 약 200년 역사를 지닌 유럽을 대표하는 종주 트레킹 코스다. 산길을 따라 걸으며 하얀 눈으로 덮인 산, 빙하가 만들어내는 거대한 폭포, 계곡을 따라 끝없이 펼쳐진 초록 들판과 야생화를 만날 수 있다. 운이 좋으면 몽블랑 산군의 진짜 주인인 야생동물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튜브에 몽블랑 트레킹에 대한 많은 영상이 올라와 있다. 여행 준비를 위해 영상을 많이 본 탓에 이미 몇 번이나 가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지만, 막상 배낭을 메고 등산화 끈을 조이는 지금, 가슴이 울렁거린다. 먼 길을 떠난다는 기대, 낯선 길 위에 선다는 설렘, 미지의 길을 걷는다는 두려움이 뒤섞여 있다. 이 울렁거림은 차멀미처럼 속이 불편하고 불쾌한 것이 아니라 여행을 떠나기 전, 몸속의 세포가 깨어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평소의 무료한 일상에서는 좀체 일어나지 않는 신체 반응이다. 높은 산에 올라 도심에서 느끼지 못하는 산도 높은 공기를 들이마실 때의 그 상쾌함과 놀이동산에서 롤로코스터를 타고 난 후에 느끼는 약간의 어지럼증이 섞여 있는 상태, 꼭 닫혔던 도파민의 분비샘이 툭툭 튀어나오는 흥분 상태다. 여행 전의 설렘은 밋밋한 일상을 흔들어 삶에 신선한 자극을 주어 내 몸이 여전히 살아있음을 증거한다.
이미 세 차례 다녀온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는 다르게 평지보다는 산길을 걷는 코스라 체력적으로 무리가 되지 않을까 걱정이 없지 않다. 마을과 도시를 지나며 길을 걷다 힘들면 어느 알베르게에서 쉬어가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는 순례길과는 다른 길이다. 산길 중간에 산장이 없으면 쉬고 싶어도 쉬어 갈 수 없다. 산장이 있다고 하더라도 미리 예약한 숙소까지 제 시간에 가야한다. 그래야 주린 배를 채울 수 있고, 지친 몸을 뉘일 수 있다. 트레킹 중간에 문제가 생겨 하루 일정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 그다음 일정에 모두 차질이 생긴다. 전체 일정의 숙소를 모두 예약해 두고 가는 상황이라 계획된 대로 여행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행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부분이 바로 숙소 예약이다. 뚜르 드 몽블랑의 시작과 끝은 산장 예약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7월에 시작하는 트레킹을 위해서 한 해 전, 9월부터 메일을 보내고 예약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트레킹 3일 차 일정에 필요한 모떼 산장, 엘리자베타 산장, 콩발 산장 중 한 곳에도 예약을 하지 못했다. 가장 시설이 좋고, 경치가 아름답다는 엘리자베타 산장(Rifugio Elisabetta) 예약을 기다리다 다른 산장 예약도 모두 놓쳤다. 11월부터 다음 해 2월까지는 산장 운영을 하지 않고, 3월~4월에 오픈을 하는 곳이라 미리 메일을 보내 놓고 답장이 올 때까지 무작정 기다려야 한다. 텐트 장비를 가지고 다니며 캠핑장에서 비박을 하는 경우에는 산장 예약이 필요 없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달리 방법이 없다. 트레킹 3일 차 일정이 본 옴므(Bonhomme )에서 출발해서 메종 비에이(Maison Vieille) 산장까지 26.3km나 된다. 소요 예상 시간이 10시간이 넘는데, 평지라면 큰 문제는 아니지만 해발 2,000m가 넘는 고개를 두 번이나 넘어야 하는 길이라 쉽지 않을 듯 하다.
이번 여행에는 L선배 부부와 동행한다. 왼쪽 다리와 팔에 마비증세가 있어 몸이 온전치 못함에도 강한 의지로 이겨내고 산행과 골프를 즐기는 선배다. 이번 트레킹을 위해서 지난 1년 동안 남파랑길을 비롯한 전국을 다니며 체력을 단련하고 준비했다고 한다. 혹시나 일행에게 폐가 될까 봐 더 열심히 준비했다고 하는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자만심에 운동을 게을리한 나의 체력이 어떨지 더 걱정이다.
아내랑 둘이 여행하는 게 익숙하고 편하지만, 일행이 있는 것도 나름 재미가 있다. 넷이 앉아 수다를 떨다 보면 공항에서의 긴 대기 시간이 언제 가는 줄 모른다. 대학 시절 연애 이야기에는 풋풋한 낭만이 묻어 있고, 학교 근무하며 아이들 키우며 힘들었던 현역 시절도 이제는 다 그립고 정겨운 추억이다. 함께 건너온 시간의 깊이만큼이나 이야깃거리도, 추억도, 낭만도 켜켜이 쌓였다. 지나온 시간의 주름은 어느새 이마에 깊이 새겨지고, 눈가에 잔주름으로 남았지만, 잘 이겨내고 견뎌온 시간이라 할만하다. 그런 시간을 지나 온 우리는 지금 몽블랑으로 가고 있고, 아름다운 여행으로 삶의 주름을 한 겹 더 쌓을 것이다. 아침마다 밥과 국을 먹어야 한다는 선배가 이번 여행을 대비해서 빵과 커피로 아침 식단을 바꾸었다는 말에 많이 웃었다.
요즘은 트레킹을 전문적으로 하는 여행사도 몇 군데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좀 더 쉽게 여행할 수도 있다. 가이드가 길을 안내하고, 산장 예약과 식사도 별도로 준비를 해 주고, 무거운 짐은 차로 옮겨주니 안전하고 편하다. 하지만 여행, 특히 트레킹은 두 발로 걸으며 우연과 낯섦을 날 것으로 마주하는 것이 묘미다. 비행기가 늦게 뜨기도 하고, 차를 잘못 타서 엉뚱한 곳에 가서 되돌아오기도 하고, 생각했던 것보다 숙소가 엉망일 때도 있는 등 예상치 못한 일들이 여행에서는 종종 벌어진다. 조금 불편하고 힘들지만, 여행은 그런 현재를 즐기는 시간이다. 내 앞에 놓인 지금에 집중하면서 문제를 하나둘 해결해 나가는 시간이 바로 여행이다. 그런 시간을 즐길 줄 하는 자가 여행을 진정으로 즐기는 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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