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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레우슈에서 레콩타민까지

day 1: 레우슈 ~ 레콩타민 16.3km, 8h

by 배정철

숙소는 주인과 직원은 보이지 않고, 문자로 방 호실과 키 번호를 알려주는 무인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배낭을 풀어놓고 숙소 앞 가일랜드 호수(Lac les Gailllands) 가를 산책했다. 호수 너머로 보이는 눈 덮인 몽블랑이 잔잔한 호수에 내려앉아 늦은 오후를 쉬어간다. 호수 건너 큰 암벽 아래에는 암벽 등반 연습이 한창이다. 채 열 살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암벽 등반을 능숙하게 해 내는 모습에 절로 감탄하게 된다. 로프를 타고 거친 암벽을 오르는 아이들, 해발 2000m가 넘는 고개까지 산악자전거를 타고 와서 즐기는 가족의 모습은 신기하고 경이롭다. 자연과 함께 삶을 즐기는 법을 부모로부터 배우는 아이들이 이곳에는 아주 많다.


아침 식사는 푸짐했다. 부엌도 키 번호를 입력해야 열 수 있는 곳인데 언제, 누가 준비를 해 두었는지 오렌지 주스, 우유, 고소한 식빵과 바게트, 햄과 치즈가 다양하다. 이곳에 숙박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른 아침에 근처에 식품 배달을 하는 기사들도 몇몇 찾아와서 식사를 하는 모양이다. 주인이 모를 리 없을 텐데도 음식 인심이 후한 것 같아 괜히 내 마음이 넉넉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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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정은 레우슈(Les Houches)에서 레콩타민(Les Contamines)까지 16.3km. 레우슈까지는 숙소 앞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고, 그곳에서 벨뷔(Bellevue) 고개까지는 케이블카로 가서 본격적인 트레킹 시작이다. 투르 드 몽블랑의 여정은 매 순간이 감동의 연속이지만, 특히 샤모니에서 레콩타민에 이르는 구간은 감동과 좌절, 희열과 고통, 감격과 후회를 번갈아 선사하며 몽블랑 트레킹에 들어선 자신을 적나라하게 발견하게 되는 코스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른 벨뷔 고개에서 트레킹을 시작도 하기 전에 드디어 몽블랑에 왔다는 사실에 너무 감격해하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하늘은 맑고, 공기는 상쾌하고, 저 멀리 보이는 몽블랑의 빙하는 눈이 부시는데 어찌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앞에 펼쳐진 웅장한 산세와 앞으로 펼쳐질 모험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심장은 최대로 펌프질을 할 준비가 이미 되었고 다리는 가볍기만 하다. 하지만 그 느낌과 자신감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초반의 완만한 길은 마치 우리의 둘레길 같아 뛸 듯이 걸었다. 너무 빨리 걷는 게 아닌가 싶어 서로 천천히 걷자며 흥분을 일부러 가라앉힐 정도였다. 하지만 이내 오늘의 첫 번째 고비인 트리고트 고개(col de Tricot, 2,120m)를 향한 오르막이 시작되면서 모든 상황은 반전된다. 해발 2,120m에 이르는 고갯길은 만만치 않은 경사를 자랑하며,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트레킹이 아니라 높은 산을 오르는 등산이다. 그 힘듦을 참고 견디며 산을 오르게 하는 것이 있다. 뒤를 돌아볼 때마다 펼쳐지는 샤모니 계곡의 절경은 고통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답다. 땀과 노력이 더해질수록 고갯마루에 다다랐을 때의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계곡의 낮은 경사로를 따라 좀 더 쉽고 편하게 고개로 올라갈 수 있지만, 능선으로 올라야 좌우로 펼쳐지는 경치를 감상할 수 있다. 고생하고 힘든 만큼 보답이 있는 법. 하지만 이 코스가 정말 만만치가 않다. 트레킹 첫날이라 아직 몸이 적응이 되기도 전인 데다가 경사가 가팔라 길을 올라가는 일이 여간 힘들지 않다.


힘겹게 오른 트리고트 고개 좌우로는 더 높은 산이 있고, 뒤로는 벨뷔에서 올라온 길과 앞쪽으로는 미아지 산장으로 내려가는 길이 훤히 보인다. 고개에서 만나 프랑스 집시 여인은 고개에서 한참을 쉬었는지 영어를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오른쪽 산으로 올라갔다. 먼저 도착한 이들과 저 아래에서 힘겹게 걸음을 내딛는 이들, 그리고 미아지 산장 쪽에서 그 가파른 길을 올라온 사람들이 트리고트 고개에서 딱딱한 바게트를 씹으며 원기를 보충하고 숨을 고른다. 트리고트 고개를 넘어선 후에는 미아지 산장(Refuge Miage, 1,559m)을 향해 내리막길이 이어진다. 1.5km의 경사가 가파른 내리막은 오르막보다 더 힘든 법이다. 등산 스틱을 사용하며 조심스럽게 내려가도 무릎과 허벅지에 전해지는 자극이 적지 않다. 얼마 남지 않은 무릎 연골이 닳아 없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미아지 산장에서 점심 식사를 할 계획이었으나, 트리고트 고개에서 먹은 간식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콜라를 마시며 잠시 쉬었다. 잔디밭 썬베드에 누워 건너편 설산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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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릉도원이라고 마냥 쉴 수 없다. 스틱이 썩기 전에 다시 길을 나서야 한다. 짧은 휴식, 짧은 평지를 지나 다시 트룩 산장(Refuge Truc)을 향해 오르막이다. 미아지 산장에서 트룩 산장까지의 오르막은 트리고트 고개만큼 가파르지는 않지만, 긴 오르막과 가파른 내리막을 지나 온 다음이라 다리에서 삐걱삐걱 소리가 난다. 무릎 위쪽 허벅지 근육에 경련이 일어나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몇 걸을 걷다가 주무르고 다시 걷기를 반복. 다행히 완전히 걷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 천천히 걸었다. 이럴 때는 내리막 보다 오르막이 더 낫지 싶은데, 트룩 산장(Truc) 지나 레콩타민(Les Contamines, 1,167m)까지는 6.5km의 내리막 구간이다. 오후의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트레킹의 첫날은 레콩타민에 도착하고도 끝나지 않았다. 숙소까지 다시 2km, 끝이라고 생각할 때 끝이 아니면 더 힘든 법이다. 우선 마트에 들러서 과일과 음료수 등 간식을 준비하고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2일 차 구간의 일부라 내일 걷는 거리가 그만큼 짧아지기는 하지만 첫날의 힘든 일정 후라 다들 지쳤다. 그래도 숙소에 가야 쉴 수 있으니... 지도를 보면서 찾아갔지만 입구가 보이지 않았다. 지도상으로는 도착했다고 하는데 입구가 없다. 청소하는 직원이 이 동네 전체가 그 숙소 이름의 단지라며 주소(동 호수)를 정확히 찍어서 찾아가라고 일러준다. 그렇게 찾아 간 숙소에서 영어를 못하는 프랑스 할아버지를 만나서 한참을 실랑이, 계단에 주저앉아 있는 나를 보고 걱정이 되었는지 물을 한 병 가져다준다. 아내가 번역기로 들은 말은, "이 사람 괜찮아요? 괜찮아요?" 였단다. 숙소 직원에게 전화해서 어찌어찌 안내를 받고, 보내 준 문자를 확인하고, 방 호실까지 찾아가서 방문 열쇠 박스를 열지 못해 또 한참을 헤매다 겨우 입실. 어른 네 명이 지내기에는 몸이 부대끼는 정도로 좁은 곳이었지만 지친 몸을 누일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다. 얼른 씻고 좀 쉬자.


<이동 경로>

샤모니 ~ 레우슈 Les Houches ~ 레콩타민 Les Contamines 16.3km, 8h

■샤모니(1,037m)-(5.0) 벨뷔 Bellevue-(3.5) 트리고트 고개 col de Tricot (2,120m)-(1.5) 미아지 산장 Refuge Miage(1,559m)-(1.5)트룩 산장 Truc-(6.5)레콩타민(1,167m)

- 벨뷔까지 케이블카로 이동하여 트레킹을 시작

- 트리코트고개, 해발 2,120m 고갯길을 오르는 것이 첫 고비

- 미아지 산장에서 점심, 레콩타민까지는 내리막이 계속

♨ 숙박 :Studio au pied des remontées 213,307원(더블베드 1, 2층 침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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