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 : 레콩타민 ~ Bonhomme본옴므 13.7km, 6h
숙소가 비좁아 성인 네 명이 지내기에는 불편했다. 인터넷으로 확인했을 때는 소파 베드와 2층 침대가 있고 서로 분리되어 있어서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너무 좁았다. 2층 침대가 방문 입구 화장실 앞에 간이 형태로 설치된, 스키 시즌에 주로 아이들이 있는 가족이 숙박하는 리조트라 성인 네 명에게는 적당하지 않았다. 숙소를 정할 때는 트레킹 코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지, 인원수에 맞게 침대가 구비되어 있는지, 숙박비는 얼마인지 등등 고려할 점이 여러가지다. 가격에 구애받지 않으면 그나마 선택의 폭이 넓지만, 이런저런 점을 고려하다 보면 또 불편한 점이 생기기 마련이다. 저녁 먹고 2층 침대로 직행해서 곯아떨어져 세상모르고 잤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숙소가 레콩타민 중심에서 2일 차 코스 쪽으로 2km 더 들어와 있는 곳이라 오늘 걷는 거리가 조금 짧아졌다. 숙소를 나와 TMB 표지판을 따라 걸었다. 승마장, 스키 점프대, 골프 연습장이 있는 걸로 봐서는 이 일대가 스포츠 단지인 듯하다. 여름의 나무와 풀은 초록빛으로 생명의 순환과 위대함을 알리고, 빙하가 녹아내리는 개울물은 청아한 소리와 빛깔로 낮은 곳으로 내달린다. 자연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늘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하며 생명을 이어간다. 새잎을 내밀어야 할 때를 정확히 알고, 해마다 같은 색은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가을이 오면 잎을 떨구고, 묵묵히 추운 겨울을 이겨낸다. 우리는 뭉떵거려 그 모든 것을 그저 자연이라고 말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길가의 이름 없는 풀과 보잘것없는 잡목과 저 높은 산을 감싸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제각각 생명의 이치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인간은 제 스스로 그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저들이 그러한 것을 보며 슬쩍 한 다리를 걸치고 얹혀 살아가고 있음이다. 그들의 힘찬 생명력 덕분인지 어제 그렇게 무거웠던 다리도 언제 그랬냐는 듯 되살아 났다.
개울 끝, 오르막이 시작되기 전에 오래된 노트르담 성당(Notre dame de la Gorge)이 있다. 들어가 이번 여행이 무사히 끝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잠시 기도를 드렸다. 평소에 교회나 성당을 다니는 믿음은 아직 없지만, 길을 걸으며 만나는 곳에는 꼭 들러서 기도를 드린다. 신이 굽어 살펴주십사 하는 마음과 자만하지 않고 조심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끝까지 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도 하다. 성당은 11세기부터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길을 지나는 이들의 기도와 다짐을 들어왔을 터이다. 성당은 신축한 지 오래되지 않아 정갈한 모습이고, 본당 옆 숙소인 듯 한 건물이 더 오래되어 보이는데, 입구에 '1840'이라고 표시되어 있어 200년이 이상된 건물임을 알 수 있다. 이른 시각이라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성당 옆에 'La Vieille Auberge(the old woman Inn)'라는 재미있는 이름의 카페가 있다. 늙은 여인의 숙소(카페)라는 뜻이겠는데, 혼자서 가게 오픈을 준비하는 머리가 하얀 여주인을 보니 카페 이름을 왜 그렇게 지었는지 짐작이 되었다. 내부는 깔끔하게 인테리어 된 곳이라 아늑했고, 갓 데운 바게트와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충분했다.
성당 앞 작은 다리를 건너며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된다. 오늘 이곳부터 목적지인 본 옴므 산장(Refuge du la Croix Bonhomme)까지 줄곧 오르막이다. 성당이 있는 곳이 고도 1200m이고 본옴므 산장은 2443m라 1200m가 넘는 고도를 올라가야 하는 쉽지 않은 코스다. 사실 오기 전에는 몽블랑 트레일이 이렇게 힘든 코스인 줄은 몰랐다. 몽블랑을 등정하는 것이 아니라 몽블랑 산군을 바라보며 산허리를 돌아가는 어렵지 않은 트레일이라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이틀간 걸어 본 소감은 ‘어렵고 힘들다.’이다. 제임스 형 사모 말씀처럼 산티아고 순례길은 뚜르 드 몽블랑에 비하면 'easy'다. 어렵고 힘들기만 하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않을 테지만, 경치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절경이다. 정말이지 힘든 시간을 보상하고 남을 만큼 아름답다. 어디 경치뿐이 겠는가? 심장은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고, 입에서는 연신 뜨거운 숨이 쏟아지며, 머리에서 목덜미를 따라 등줄기로 흘러내리는 땀과 장단지와 허벅지의 근육이 팽팽해지는 그 분절된 순간에 몸 속 어딘가에서 분출되어 신경을 타고 도는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은 몸의 고통을 절정의 행복으로 뇌를 세뇌시키고 만다. 힘겹게 올라 선 고개 어디쯤, 뒤돌아서며 웃는 수많은 트래커들의 표정이 바로 그 증거다.
일찍 출발한 탓에 점심 식사를 하기로 계획했던 발므 산장(Refuge de la Balme, 1706m)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간 조금 넘은 시각, 12시 이후부터 서비스되는 점심 메뉴가 아닌 블루베리 파이 한 조각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트레킹 하는 사람이 많다. 트레킹을 하며 외국인과 사진을 찍는 과제를 해야 한다는 프랑스 소녀, 반려견을 데리고 어린 아들과 트레킹 하는 부부, 7살짜리 딸을 앞세우고, 한 살 반짜리 아이를 안고 걷는 엄마, 이렇게 길고 높은 산을 오르리라고 생각하기 힘든 다섯 명의 할머니들, 그들의 모습은 그저 아름답다는 말 외에는 표현하기 힘들다. 앞 선 이들은 거대한 돌산을 바라보며 계속 올라가고, 산장에서 내려다본 지나 온 길에는 알록달록한 트레커들의 물결이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이렇게 힘든 트레킹을 왜 하냐고 묻은 이들이 많다. 저 많은 이들에게 다 물을 수 없는 노릇이듯, 직접 와 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바람이 많다. 비 예보가 있었지만 아침에 비가 내리지 않아 다행이다 싶었는데, 바람에 비가 잔뜩 묻어 있다. 발므 산장을 지나고 한 시간쯤 지났을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한두 방울로 시작한 비는 본옴므 산장에 도착할 때까지 4시간 동안 내렸다. 비가 내리자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길은 질퍽거리고, 빗물이 길을 개울로 만든다. 배낭 덮개를 씌우고, 재킷과 판초우의를 입고, 신발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발목에 스패치도 착용했다. 걷기가 불편해지고 힘도 많이 든다. 게다가 경사는 더 심해져 한발 두발 내딛기가 힘들다.
힘겹게 올라 선 본옴므 고개(2329m)에는 비바람 때문에 서 있기 조차 쉽지 않다. 맑은 날이면 이곳에서 한참을 쉬어가면 좋으련만. 고개 앞뒤로 길게 뻗은 계곡과 멀리 둘러 선 거대한 바위 산은 해무에 가려 형체만 어렴풋이 보일 뿐이다. 본옴므 산장까지는 한 시간 거리, 산 허리를 따라가는 길인데 여전히 오르막이 많다. 첫날 코스는 그나마 오르막 뒤에는 내리막이 번갈아 있는 코스였지만, 오늘 본옴므 고개와 산장으로 가는 길은 노트르담 성당에서부터 줄곧 오르막이다. 비바람을 헤치고 도착한 본옴므 산장(Refuge de la Croix du Bonhomme, 2443m)은 발 디딤 틈이 없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비에 젖은 배낭과 판초우의, 스틱은 보관창고에 두고, 간단히 짐을 챙기는 그 짧은 시간에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렸다. 불이 약한 화로 근처에서 옷을 말리고, 따뜻한 시저스 수프로 몸을 데웠다.
음식을 주문하는 사람들, 체크인을 위해 줄을 선 사람이 많아 한참을 기다려 배정받은 방으로 갔다. 이층 침대 두 개가 있는 4인실. 황당하게도 방에는 히터가 없고, 충전을 할 수 있는 콘센트가 없고, 샤워실에는 따뜻한 물이 안 나온다. 해발 2443m인 이곳에는 차량이 오갈 수 없는 곳이라 빙하가 녹은 물 외에는 모든 게 귀할 수밖에 없다. 화로에 넣는 장작도 헬리콥터로 운반해서 사용하는 곳이라 이해 못 할 것도 아니지만, 화로에 장작이라도 넉넉하게 넣어 주면 좋으련만... 얼음 같은 찬 물에 샤워는 엄두를 낼 수 없어 대충 세수만 하고 1층 식당에 있는 콘센트 옆에서 눈치껏 스마트폰과 시계, 보조배터리를 충전을 했다.
그나저나 내일 일정이 문제다. 어제오늘 일정의 두 배나 되는 26.3km를 걸어야 하는 날이다. 궁즉통(窮卽通)이라, 궁하면 통한다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살아날 방법은 늘 있는 법이다. 이런 곳에 오면 사교성이 빛을 발하는 아내가 뉴욕에서 온 제임스(한국이름 재호) 형네를 만나서 정보를 얻어 왔다. 원래 계획했던 포르 고개(Col des fours, 2665m)를 넘어가지 않고, 레사피유(les chapieux)로 내려가서 버스를 타고 글라씨에 마을까지 이동을 하는 경로가 있다고 한다.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지만, 두 시간 정도는 줄일 수 있는 경로라 해 볼만했다.
저녁 시간에는 큰 장작을 몇 개 넣은 덕분에 다행히 화로에 불이 세졌다. 젖은 등산화를 말리고, 희미한 촛불 아래에서 글을 썼다. 두꺼운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한기 때문에 잠이 쉽게 오지 않을 듯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다. 본 옴므 산장 주위에는 밤새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이동 경로>
■레콩타민-(4.0)노트르담 성당-(2.0)낭보랑 산장-(4.0)발므산장(Balme, 1706m)-(4.0) 본옴므 고개(2329m)-(1.5)본옴므 산장(Refuge de la Croix de Bonhomme, 2443m)
- 노트르담 성당 이후부터는 줄 곧 오르막
- 본옴므 고개에서 본옴므 산장까지는 한 시간 거리의 완만한 오르막
♨ 숙박 : Refuge Bonhomme(284유로, 1인 71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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