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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행운의 엘리자베타 산장

day 3: 본옴므 산장 ~ 엘리자베타 산장, 19.52km. 6h 40

by 배정철

날이 밝았다. 언제 그랬냐는 듯 본옴므 산장 주변은 맑게 개어 멀리 있는 설산의 봉우리까지 훤히 보일 정도다. 오늘은 이번 트레킹 일정 중에 가장 길게 걸어야 하는 날이다. 길게 걷고 싶어서가 아니라 중간에 있는 산장 예약을 하지 못해서다. 본옴므 산장에서 엘리자베타 산장까지 14km를 걷는 일정으로 계획하고, 1년 전부터 엘리자베타 산장에 메일을 보내고 확인했음에도 예약이 되지 않았다. 엘리자베타 산장만 목 빼고 기다린 탓에 콤발 산장 예약도 늦었다. 할 수 없이 13km 정도 더 먼 곳에 있는 메종 비에이 산장까지 26km가 넘는 거리를 가야 한다.


멀리까지 걸어야 하는 일정이라 서둘렀다. 아침 식사는 6:30에 시작. 산장에서 차려 놓은 식빵과 따뜻한 우유에 초코가루를 타서 간단히 먹고 07:00시에 레사피유를 향해 출발. 계획했던 코스는 해발 2665m의 푸르 고개를 넘어가는 것이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저녁 6시까지 비에이 산장에 도착하기 힘들어 코스를 바꾸었다. 레사피유까 지는 5.4km의 내리막, 1시간 40분 만에 내려와 09:00 출발하는 글라씨에(La ville des Glaciers)로 가는 버스에 탑승했다. 글라시에 마을까지는 10분 거리다. 레사피유로 내려올 때 제임스형 부부도 앞서 내려가는 것이 보였다. 레사피유 버스 승차장에서 잠시 인사를 나누고 우리보다 먼저 버스를 타고 글라씨에 마을로 떠났다.


글라씨에 마을에서 모테 산장(Refuge des Mottets, 1850m)까지는 1.5km의 완만한 오르막, 점심을 이곳에서 먹을 계획이었으나 점심 먹기에는 좀 이른 시간이고 갈 길이 멀어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인 세이뉴 고개(2512m)로 바로 달렸다. 거대한 바위산 곳곳에 한여름에도 눈이 쌓여있고, 빙하가 녹아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는 물소리가 요란하다. 산비탈 목초지에는 목에 큰 방울을 메 단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하얀 구름이 뭉쳤다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사이로 새파란 하늘이 유난히 눈부신 날씨다. 비가 올 것 같지 않은데 높은 산이라서 일까, 오후에 비 예보가 있다.


모테 산장에서 세이뉴 고개로 오르는 길도 험난하기는 마찬가지다. 특히 바람이 산 위에서 아래로 불어와 해발 2500m가 넘는 고개를 오르는 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지난 이틀간의 코스가 모두 힘들었고, 특히 어제는 레콩타민에서 본옴므 산장까지 10km가 넘는 오르막 우중 트레킹을 했으니 지칠 만도 하다. 이틀 간의 거친 트레킹으로 다리의 근육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된 상태이지만, 멀리까지 오래 걸어야 한다는 생각에 몸과 마음이 엇박자다. 서두른다고 빨리 갈 수 없고, 빨리 가고 싶다고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몸은 제자리에서 멀리 가지 못해 속도가 느리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다리 통증은 더 커지고 호흡은 거칠어져 몸은 지쳐 가는데, 높이 오른 만큼 눈에 들어오는 경치는 감탄을 금할 수 없다.

서른 걸음을 걷고 잠시 쉬고, 다시 서른 걸음을 걸으며 마침내 모테 산장에서 세 시간 반 만에 세이뉴 고개(col de Seigne 2512m)에 올랐다. 눈 쌓인 거대한 바위산이 파노라마처럼 세이뉴 고개 주위를 에워싼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인 세이뉴 고개에는 풀 한 포기 없는 거친 땅 위에 덩그러니 낮은 돌탑 하나가 전부다. 돌탑에는 노란 표지판들이 붙어 있고, 누군가가 걸쳐 놓은 롱다(lungta)가 바람에 펄럭인다. 롱다는 히말라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으로 하늘로 경전을 퍼뜨린다는 오색 천으로 만든 깃발이다. 이곳을 찾아온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어떤 이의 간절한 마음이리라.

해발 2400m가 넘는 곳에서는 산소가 부족해서 생기는 고산병이 생길 수 있다는데, 그런 현상은 생기지 않아 다행이다. 오래 쉴 시간이 없다. 점심도 먹지 않은 상태라 4.5km 거리에 있는 엘리자베타 산장까지 서둘러야 한다. 거기서 오늘 목적지 메종비에이 산장까지도 4~5시간이 걸린다. 엘리자베타 산장까지는 내리막이다. 왼쪽에는 거대한 바위산이고 오른쪽에는 낮은 풀로 덮인 초록산이다. 산 중턱에는 여전히 눈이 쌓여 빙하를 이루고 있고 그 아래로는 크고 작은 폭포가 쏟아져 내린다. 낮은 곳으로 흘러내린 물은 작은 개울을 만들어 흐르다가 점점 큰 내를 이루며 콤발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빙하수가 콤발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평원의 끝트머리 즈음에 한 맺힌 엘리자베타 산장(Refugio Elisabetta, 2195m)이 있다.


엘리자베타 산장은 등산 중에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이탈리아 등산객 엘리자베타 솔디니 몬타나로(Elisabetta Sodini Montanaro)의 이름을 그대로 따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5월에는 주말에 스키 등산객이 주로 이용하고, 6월 초부터 10월 2일까지 여름 시즌 운영을 운영하는 곳으로 뚜르 드 몽블랑 종주 코스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산장이다. 그래서인지 예약할 때 선금도 받지 않고 예약도 어렵다.

밉다 밉다 하면 더 미워지는 놈처럼 얄밉게도 산장은 길에서 한참 올라가야 하는 높이에 있다. 점심을 먹을 생각이 아니라면 굳이 올라갔다 다시 내려오는 수고를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위치다. 점심도 해결해야 하지만 그것보다는 혹시나 빈 침대가 있을까 하는 작은 기대를 하며 산장까지 올라갔다. 아래쪽에 있는 오래된 예전 산장은 폐허 수준인데 새로 지은 건물은 호텔 마냥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 게다가 산장에서 내려다보는 경치로 봐서는 이곳이 으뜸이다. 어제 본옴므 산장에서의 경치도 만만치 않았지만 산장 주변 경치는 그야말로 환상이다. 산장 옆 거대한 바위 산에는 빙하수가 흘러내려 거대한 폭포가 있고, 저 멀리 콤발 호수가 있는 방향으로는 넓은 평원이 펼쳐져 있다. 산장 맞은편에는 세이뉴 고개부터 이어지는 초록빛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다.

카운터에 서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빈 침대 있어요? 4개가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남은 4개 있어요!”

너무 기쁜 나머지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운이 엄청나게 좋은 거라고, 예약한 사람도 정말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라며 먼저 이곳에 도착한 제임스 형도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예약한 메종 비에이 산장에 미리 지급한 금액이 크지 않아 그마저도 다행이다.

한참을 밖에서 기다린 끝에 드디어 방으로 안내, 처음에는 두 명씩 다른 방에 숙박을 해야 했으나, 다른 분이 방을 바꾸는 것에 동의를 해줘 일행 네 명이 한 방에서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엄청난 운빨의 기분도 잠시, 샤워를 하고 있는 중에 난리가 났다. 산장에서 착오가 있어 오늘 두 명이 예약한 것을 놓쳤다고, 두 명은 그대로 침대를 쓰고 나머지 두 명은 다른 방으로 흩어져 슬라이딩 베드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나 예약한 사람이 오지 않을 경우에는 그대로 쓸 수 있으나, 저녁 식사 시각인 7시에 확정이 된다는 비보다. 먼저 예약한 사람이 우선이니 어쩔 도리가 없다. 이 산장은 인기가 많아 늘 예약이 차는 곳이지만 예약할 때 선금을 내지 않는 곳이라 가끔 예약자가 오지 않기도 한단다. 기도를 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뉴욕에서 왔다는 제임스 형 얘기를 안 할 수 없다. 어제 본옴므 산장에서 우리의 난감한 상황을 듣고, 레사피유로 내려가 버스를 타라는 정보를 알려주신 분인데, 뉴욕에서 26년간 사셨다는 두 분은 나이가 60대 후반이다. 여행 계획을 적어 놓은 노트를 펼쳐놓고 설명을 하시는데, 산길에 가끔 오는 버스 노선과 시간표까지 찾아 놓았다. 이미 다녀온 산티아고 순례길과 파타고니아 트레일, 뉴질랜드 밀포드 트랙, 규슈 올레 등 트레킹 얘기로 서로 죽이 맞았다. 기회가 되면 산티아고 북쪽길을 같이 걸어보자고 했다. 내일 갈 꾸르마외르에서 꼭 가보아야 할 피자 맛집 정보와 그다음 날 보나티 산장까지 가는 길에 몽드라삭스(Mont de la Saxe)를 놓쳐서는 안 된다는 귀한 정보도 얻었다. 여행 중에 이런 분을 만나는 건 기대하지 않았던 크나큰 축복이다.


축복이 아닌 이야기도 있다. 중국 사람 얘기다. 본옴므 산장에 도착했을 때, 산장 식당 화로 옆에서 중년의 중국 남자가 사지를 떨면서 옷을 말리고 있었다. 비를 흠뻑 맞았고, 기온이 낮아 한기를 엄청나게 느끼는 상태였다. 주위 사람들이 옷을 벗어 덮어주고, 어떤 젊은이는 은박보호덮개를 가져와 감싸주기도 했다. 그 중국인 일행이 여럿이었는데 누구 하나 걱정을 하거나 돕지 않고, 남의 일인 듯 자리에 앉아 자기 먹거리만 챙겼다. 서로 개인적으로는 모르는 사람들이 모여 단체로 트레킹을 하는 중이라고 하더라고 같이 걷는 일행이 그렇게 온몸을 떨고 있음에도 걱정은커녕 모르는 척하는 것은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오늘 운 좋게 머무르게 된 엘리자베타 산장에는 따듯한 물에 샤워를 할 수 있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겸하는 공간이 남녀로 구분되어 있다. 샤워실에 들어가 양치를 하고 있는데 중국 여자 두 명이 들어왔다. 여기는 남자용이고 옆에 여자용이 따로 있다고 했더니, 상관없단다. 샤워 부스의 따뜻한 물 사용 방법을 모르는 것 같아 어느 통에 어떻게 코인을 넣어야 하는지 친절하게 알려 줬다. 그다음 상황이 참 어이가 없었다. 가이드인 듯 한 중국 여자가 자기는 여기서 샤워를 하겠다고 한다. 여기는 남자용이고 내가 먼저 와서 샤워를 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먼저 왔지만 양치를 하고 있었고, 자기가 샤워부스에 먼저 들어왔다고 자기가 우선이란다. 그러더니 중국 남자를 불러 먼저 샤워를 하게 한다. 그도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그 어디에서도 이런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이들이 바로 본옴므 산장에서 떨고 있던 중국인과 일행인 사람들이다.


제임스 형도 그 여자 얘기를 하나 해줬다. 저녁 식사 자리,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하는 중에 그 중국 여자가 자기 테이블로 와서 큰 병에 담긴 우유를 가져갔다고 한다. '이 우유 내가 가져갈게요. 원래 여기 우유는 다 나눠 먹는 거라 가져가도 되는 거예요'하면서 가져 가더란다. 다 먹지 않고 남은 것이니 다른 사람이 가져다 먹어도 되는 것이고, 부족하면 산장 직원에게 얘기하면 더 가져다준다. 가져가더라도 가져가도 되겠냐고 정중하게 물어보고 가져가면 되는 일인데 참 예의가 없어 놀랐다고 한다. 모이면 큰소리로 떠들고, 줄을 서는 법이 없고, 배려와 매너는 쌈 싸 먹은 사람들이다. 경제가 나아지는 만큼 해외여행에도 열을 올리는 중국인이다. 하지만 중국인이 많아질수록 불쾌하고 불편해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듯하여 씁쓸하다.


운빨은 죽지 않았다. 식당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데 좋은 소식이 왔다. 예약자가 오지 않아 방 하나, 침대 4개를 그대로 사용해도 된다고 한다. 침대 하나에 울고 웃는 해프닝이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 길 위에 또 하나 새겨졌다.

<이동 경로>

본 옴므 산장–(5.4) 레사피유)-(4.6)글라씨에(La ville des Glaciers) 마을-(1.5)모테 산장(Mottets, 1,850m)-(5.0) 세이뉴 고개(Seigne, 2512m)-(4.5) 엘리자베타 산장(Ellisabetta, 2197m)

- 본옴므 산장에서 레사피유 마을로 내려와 버스를 타고 글라씨에 마을로 이동(요금 5유로)
- 글라씨에 마을에서 모테 산장까지는 완만한 오르막 경사
-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계인 해발 2,500m 세이뉴 고개까지는 세 시간 이상 오르

- 엘리자베타 산장에서 극적으로 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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