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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평화로운 꾸르마외르 Courmayeur

day 4 : 엘리자베타 산장 ~ 꾸르마외르, 14.15km, 4h

by 배정철


엘리자베타 산장은 본옴므 산장과 여러 가지로 비교된다. 새로 지은 깨끗한 건물, 2유로짜리 코인을 넣어야 하지만 따뜻한 물 샤워가 가능하고, 방마다 전기 콘센트가 있어서 충전도 쉽다. 산장 옆에는 빙하가 흘러내리는 거대한 폭포와 산장 발코니 정면으로는 광활한 콤발 평원이 펼쳐진 풍광도 최고다. 게다가 음식도 본옴므 산장에 비해 훨씬 맛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보나티 산장의 저녁 식사가 두 시간짜리 풀코스로 최고라고 하지만 엘리자베타 산장의 저녁 식사도 훌륭했다.

뚜르 드 몽블랑 트레킹 중에 산장에서 숙박할 때는 식사를 포함해서 예약을 한다. 예약 사이트에 Half board라고 되어 있는데, 저녁과 아침 식사를 포함한 것을 말한다. 식사 메뉴는 선택할 수 없고 산장에서 주는 대로 먹어야 한다. 다만 채식주의자에게는 고기를 뺀 다른 음식을 가져다준다. 다음 날 점심도 미리 주문하면 아침 식사 후에 가져갈 수 있다. 바게트로 만든 샌드위치, 사과, 초콜릿이나 비스킷을 넣어 주는데 가격이 20유로 정도로 비싸다. 비용을 절약하려면 마트가 있는 곳에서 간식을 미리 사서 다니는 것이 좋다. 물은 굳이 살 필요가 없다. 가는 길 곳곳에 깨끗한 빙하수가 있어서 물병에 물을 보충하는데 문제가 없고, 산장에서도 얼마든지 물병을 채울 수 있다.

엘리자베타 산장에서 숙박을 하지 못했다면, 메종 비에이 산장에서 꾸르마외르까지 5km, 한두 시간 정도 트레킹할 예정이었는데, 오늘 일정이 길어졌다. 산장에서 제공하는 빵과 커피로 가볍게 아침 식사를 하고 출발. 우리를 제외한 산장에서 묵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출발을 늦추고 있다. 느긋하게 아침 식사를 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비 내리는 풍경을 걱정스레 감상 중이다. 출발 준비를 하며 산장을 나서는 우리를 보고 '이 우중에 간다고?' 하는 눈빛으로 다들 쳐다본다. 산장의 위치가 높은 곳이라 비바람이 더 심하다. 산장 아래 콤발 평원은 바람이 세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등산화 끈을 조였다. 바람이 어찌나 센 지, 산장 유리문이 열리지 않을 정도였다.


문을 열고 나서자 판초우의가 바람에 날려 시야를 가린다. 비의 양이 많지 않지만 바람이 거세어 걷기가 불편하다. 하지만 예상했던 대로 평지로 내려오자 비바람이 잦아든다. 산장 쪽을 바라보며 여기는 괜찮다고 팔을 흔들어 주었다. 산장 아래에서부터 콤발 산장(Cabane du Combal, 1968m)까지는 신작로를 걷는 느낌이라는 어느 유튜버의 소감처럼 콤발 산장 앞까지 길이 곧게 나 있다. 콤발 산장이 있는 삼거리까지는 한 시간 거리다. 길의 왼쪽으로 보이는 콤발 산장을 바라보며 '저곳에 예약을 했더라면 걱정을 덜 했을 텐데' 하며 씁쓰레 웃었다. 콤발 산장에서 한 무리의 중국인 트레커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우리와는 반대 방향인 엘리자베타 산장 쪽으로 걸었다. 침대 개수가 많지 않은 콤발 산장에 중국인 단체 손님이 있었나 보다.

원래 계획은 콤발 삼거리에서 오른쪽 산길로 접어들어 몽테 파브르 중턱(2436m)까지 베니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가 메종 비에이 산장에서 숙박 후, 다음 날 돌로네 마을을 거쳐 꾸르마외르까지 가는 것이었다. 삼거리에서 잠시 망설였다. 몽테 파브르 중턱으로 올라갈 것인가, 아니면 곧장 라비사일레(La visaille) 마을 쪽으로 쉽게 갈 것인가. L선배도 오늘은 좀 쉽게 갔으면 좋겠다는 의견이고, 비가 오는 날씨이고, 망설이는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핑계가 생겼다. 라비사일레 마을까지는 계곡 옆으로 난 아스팔트 포장도로라 빗길에 걷기는 편하지만 걷는 재미는 덜 하다.

며칠 사이에 비가 많이 내렸는지 계곡으로 큰 물 내려가는 소리가 우렁차고, 도로 양쪽으로 높게 솟은 삼나무는 바람에 수군거린다. 물은 한 자리에 머무는 법이 없고 낮은 곳을 찾아 끊임없이 흘러간다. 어느 웅덩이, 어느 호수, 큰 바다에 머물 때에도 오래지 않아 햇볕을 타고 하늘로 올라 구름을 만들고, 그러다가 지상으로 내려와 다시 더 낮은 곳을 찾아 흐른다. 끊임없이 순환하는 물의 어느 순간에 우리는 비를 만나고, 개울을 만나고, 호수를 만나고, 바다를 만나며 그 영원성을 예찬한다. 수십 억년 전, 지구에 물방울이 맺히던 날, 드디어 생명의 싹이 텄고 마침내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물은 생명의 시작이고 생명을 이어가게 하는 말 그대로 생명수다.


라비사일레 마을까지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가 그곳에 오는 무료 셔틀버스를 타고 꾸르마외르 시내로 들어갈 까 망설이다 비가 그쳐 날씨도 좋아졌고, 오르내리막이 심하지 않아 그냥 걷기로 했다. 멀리 베니 계곡 캠핑장(HOBO Camping Val Veny)까지 아스팔트길이라 산길로 방향을 틀었다. 산 허리를 돌아가는 완만한 경사의 숲 속 둘레길을 걸으며 방전된 배터리를 충전하듯 새로운 기운을 충전했다. 날씨가 점점 맑아지면서 왼편으로 해발 3000m가 넘는 푼타 바레티(Punta Baretti, 4013 m)와 에귀 노아르 드 퍼트레이(Aiguille Noire de Peuterey, 3773m)가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산 아래에는 삼나무가 숲을 이루고, 회색빛 맨 몸을 드러낸 중턱에는 빙하가 녹아 크고 작은 폭포가 흘러내리고, 산 정상 부근에는 하얀 구름과 빙하가 얼굴을 드러내었다 숨기기를 반복하며 거대한 산의 절정을 이룬다. 몇 달 뒤, 눈이 오기 시작하면 저 산은 하얀 눈덩이가 되어 어디가 정상이고 어디가 계곡인지 알 수 없는 신비와 경외로 뒤덮일 터이다.


엘리사베타 산장에서 10km, 둘레길을 빠져나오자 자동차 도로다. 걸을 만한 갓길은 좁고 위험해 보여 버스를 탔다. 버스는 도시 관광세로 운영되는 무료 셔틀이다. 옆자리에 수원에서 온 여성 분이 말을 걸어왔다. 우리는 샤모니에서 출발해서 나흘 째인데, 이틀 만에 꾸르마외르로 왔다고 해서 놀랐다. 우리가 오른 트리코트, 본옴므, 세이뉴 고개를 다 오르지 않고 낮은 곳으로 빠르게 질러왔다고 한다. 시간 내기가 여의치 않아서 짧게 여행하는 일정을 잡았다는 그녀의 용기와 도전이 멋졌다. 피자 맛집과 아이스크림 맛집 정보를 서로 주고받으며 남은 여행을 응원했다.

오늘 점심은 피자다. 제임스 형이 알려 준, 꾸르마외르 피자 맛집(Pizzeria Ristorante du Tunnel). 소문대로 줄을 서는 맛집이다. 피자는 이탈리아가 원조라는데 맛에 대해서는 안 좋은 추억이 있어서 반신반의했다. 오래전, 이탈리아 여행에서 먹어 본 피자는 차고 딱딱하고 밋밋한 맛의 그저 그런 피자였다. 하지만 이곳 피자는 큰 접시에 담기지 않을 큰 사이즈만큼이나 맛도 일품이다. 이탈리아 피자 맛이 이런 것이구나 할 정도로 맛있다. 옆 테이블에 앉은 이 동네 사람들은 한 사람이 피자 한 판씩을 먹으며, '정말 맛있지? 네가 사는 동네는 이런 피자집 없지?'라고 말하는 듯 연신 눈웃음을 날린다. 수원 아줌마가 소개해준 아이스크림 가게(Creme et chocholat)에서 아이스크림과 카푸치노를 마시며 7월의 따듯한 햇살이 내리쬐는 꾸르마외르의 나른한 오후에 천천히 잠겨 간다.


<이동 경로>

■ 엘리자베타 산장 - 콤발 평원 - 콤발 호수 - 라비사일레 마을 - Plan Ponquet에서 셔틀버스 - 꾸르마외르(1226m)

♨ 숙박 : hotel les jumeaux courmayeur 369,066원(조식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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