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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몽블랑의 끝판왕, 몽드라삭스

day 5 : 꾸르마외르~보나티 산장, 16.15km, 10h

by 배정철

쿠르마외르는 몽블랑 둘레길의 일부 구간만 걷는 트레커들의 중간 기착점이자 아름답고 기품 있는 산악 도시다. 게다가 알프스에선 가장 중요한 교통 요충지이기도 하다. 프랑스의 샤모니와 이탈리아의 쿠르마외르를 연결하는 몽블랑 터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인 몽블랑 아래를 관통하는 이 터널은 그 자체로 거대한 공학적 성과이며, 많은 역사적 사건을 담고 있다. 터널의 총길이는 약 11.6km로,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65년 개통 당시 세계 최장 자동차 터널이었다. 너비는 8.6m, 높이는 4.35m이며 왕복 2차선이다.


터널은 1908년 프랑스 엔지니어가 처음 제안한 후, 수십 년간의 논의 끝에 1959년 착공하여 6년 만에 개통했다. 이 터널의 개통으로 샤모니와 쿠르마외르 사이의 이동 시간이 크게 단축되었을 뿐만 아니라, 두 국가 간의 경제적, 정치적 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총 711톤의 폭약을 사용해 555,000㎥의 암석을 파쇄했을 정도로 터널 건설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는데, 공사 기간 중 21명이나 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엘리자베타 산장에서 꾸르마외르까지의 어제 구간이 다른 날 보다 쉬운 길이라 이탈리아 스키 성지인 이곳에서 긴 시간을 쉬었다. 제임스 형이 알려준 피자 맛집의 피자 맛은 지금도 생각날 정도다. 맛이 검증된 곳이라 저녁도 같은 곳에서 파스타와 스테이크로 해결했다. 식사 후에는 불 꺼진 상점가를 어슬렁거리며 돌아다니다 호텔 앞 벤치에 앉아 늦은 밤까지 시간을 보냈다. 낯선 거리에는 낯선 언어와 담배 연기가 뒤섞여 밤공기 속에 흩어지고, 일상과 평화가 좁은 도로 위에 나지막이 깔렸다. 한가로이 지나가는 낯선 이들에게 괜스레 말을 걸어 밤늦도록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진다. 우리는 왜 이곳에 왔으며, 저 높은 돌산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힘든 길을 걸으며 당신과 나는 무엇을 얻고자 하는 것인지. 불빛이 하나 둘 꺼져 가는 길 건너 상점을 바라보며, 긴 침묵과 짧은 대화 속에 지나온 시간의 질곡과 살아갈 날들에 대한 희망이 묻어나고, 그 희망에는 알듯 말듯한 쓸쓸함도 없지 않다. 아내와 나는 그렇게 조용히 나이 들어간다.


기대했던 것보다 훌륭한 호텔 조식을 먹고, TMB가 시작되는 성당 (Church of saint pantalon) 쪽으로 걸었다. 성당 앞에는 벌써 트레킹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출발을 기념하려는지 사진 찍는 사람이 많다. 성당에 들어가 잠시 기도를 드렸다. 마을 도로를 따라 산 쪽으로 걷다가 길을 잘못 들어 알바를 한참 했다. 꾸르마외르 마을이 해발 1220m, 첫 번째 목적지인 베르토네 산장(Rifugio Alpine G. Bertone, 2000m)까지는 고도차가 770m나 되는 급경사다. 안내 표지판에는 2시간 반이 걸린다고 했는데, 3시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하루 편한 길을 걷고 오래 쉬어서인지 몸이 준비하는데도 시간이 한참 걸린다.


베르토네 산장으로 올라가는 길은 딱 우리나라 산의 가파른 등산 코스다. 힘겹게 올라가다가 제시카를 만났다. 일행보다 한참 뒤처져 가는 그녀는 가다 쉬기를 반복하는 우리와 거의 보조가 맞았다. 친구들과 보스턴에서 왔다는 그녀는 두 달 전에 큰 수술을 해서 걷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앉아 쉬기에 좋은 자리를 내어주며 쉬어 가라고 하자 손키스를 날리는 명랑한 아가씨다. 천천히 걷던 그녀도 어느새 베르토네 산장에 도착해 친구들과 합류했다.

베르토네 산장에서 300m를 더 올라가면 갈림길이다. 왼쪽의 완만한 능선을 따라가면 아뢰세 쉬브를 지나 보나티 산장(Walter Bonatti)까지 짧고 편하게 갈 수 있고, 오른쪽 가파른 몽드라삭스 능선을 따라 오르면 그랑조라스(les Grandes Jorassses, 4208m), 에귀 드 레슈(Aiguille de Leschaux, 3759m), 당 뒤 제앙(Dent du Géant, 4014m), 아이귈 데 비 오네 세이(Aiguille de Bionnassay, 4052m)를 비롯한 해발 4000m가 넘는 몽블랑의 준봉들을 바로 눈높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몸이 불편한 L선배가 걱정이 되긴 했지만, 평생 다시 올 수 없는 기회라 생각하고 같이 도전하기로 했다. 발을 헛디디면 천 미터 아래 낭떠러지로 떨어질 듯한 좁고 가파른 길은 오르기도 힘들지만, 옆을 돌아보면 간담이 서늘해진다. 수많은 유튜버 중에 몽드라삭스 능선을 타고 올라가는 이는 몇 되지 않는 것은 TMB의 정규 코스가 아니기도 하지만, 힘들고 위험하기 때문이다.


해발 2346m의 몽드라삭스(Mont de la Saxe) 능선을 오르기는 그만큼 힘들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 산 아래에서 올려다보던 산의 모습과는 달리 눈높이에서 계곡 하나를 사이를 두고 몽블랑의 준봉을 바라보는 기분은 직접 보지 않은 사람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리라. 게다가 운이 정말 좋은 사람만이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준봉들을 볼 수 있다는데, 출발지 성당에서 드린 기도가 통했는지 거대한 산들의 정상까지 훤히 보였다. 이 풍경이 얼마나 아름답고 경이로운지 도베르만 종, 반려견 필립도 주인과 같이 능선을 올라가며 지나간 길을 자주 되돌아보며 풍광을 즐길 정도였다. 이곳에 올라온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감격의 눈물을 흘린다도 한다.


인간이 웅장한 풍경을 마주할 때 느끼는 경외감은 큰 감동으로 이어진다. 이런 경외감은 몽블랑의 산군처럼 압도적인 규모와 힘 앞에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깨닫게 할 때 저절로 생겨난다. 경이로운 풍경은 그 속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자연의 신비와 힘이 숨겨져 있음을 암시하고, 인간은 자연의 영원성과 무한성에 절로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압도적인 자연의 앞에 서면 인류의 근원으로부터 몸속에 새겨져 온 인간 생존에 대한 본능이 경외와 감동으로 발현되는 것이리라.


몽드라삭스 능선에서 바라본 몽블랑의 준봉들은 어쩌면 우라노스가 흘린 피에서 태어난 거인족, 기간테스( Gigantes)들이 아닐까? 제우스를 중심으로 한 12명의 올림포스 신들과의 싸움에서 패한 기간테스들이 이곳에 내쳐져 산이 된 것이 아닐까? 이곳에서 그리스의 올림포스산은 그리 멀지 않고, 절치부심의 마음으로 그곳을 노려보며 그들의 세상을 위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 해발 2500m나 되는 곳에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작은 웅덩이에서 물을 마시는 살찐 소들은 거인족이 기르는 것일까?

코스에서 가장 높은 곳은 몽드라삭스(2346m)가 아니라, 사핀 고개(col sapin, 2581m)다. 사핀 고개까지 가는 길은 말 그대로 천길 낭떠러지, 발을 잘못 디딜까 봐 조심조심 걸을 수밖에 없다. 한라산이(1947m)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산인데, 그 보다 더 높은 곳을 올라왔다. 오래전, 스위스 인터라켄에서 융프라우를(4158m) 올라간 적이 있는데, 그때는 걸어서 간 것이 아니라 궤도 열차를 타고 올라간 것이라 두 발로 선 지금의 감회는 그때와는 비교할 수 조차 없다. 지금 나는 거인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는 것이다.


사핀 고개에서 뚜르 드 몽블랑의 진면목, 제1경, 끝판왕의 경치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고 보나티 산장으로 향했다. 몽블랑 삭스와 사핀 고개를 오르는 길이 가파르고 힘든 만큼 반대 방향으로 내려가는 길도 가파르고 거칠다. 산비탈이 햇볕이 바로 닿는 남향이라 깨어진 돌이 길 위에 나뒹굴고 땅은 푸석거린다. 맞은편 산 아래 작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왼쪽편의 긴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산이 높고 큰 만큼 산과 산 사이의 골도 깊고 넓다. 이름 모를 풀과 들꽃 사이로 작은 개울이 낮은 곳을 찾아 흘러가고, 그 물길을 따라 오늘의 목적지 보나티 산장으로 부지런히 걸었다. 보나티 산장도 엘리자베타 산장처럼 트레킹 루트에서 한참 올라가야 하는 곳에 위치해 있어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짜낸 다음에야 트레커들의 성지, 월터 보나티 산장에 닿는다.


<이동 경로>

■꾸르마외르–(6.0)베르토네산장-(04)몽드라삭스(Mont de la Saxs)-(1.0)사핀 고개(col sapin)-(5.0) Walter Bonatti보나티 산장

- 베르토네 산장까지는 가파른 등산 코스
- 산장을 지나 가파르고 위험한 몽드라삭스 능선을 따라 사핀 고개까지 오르막

- 1km 내리막 경사가 심해 조심해야 함

♨ 숙박 : Walter Bonatti 산장(75유로 / 1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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