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 보타니 산장 ~ 나폴리 la Fouly
보나티 산장(Rifugio Walter Bonatti, 2025m) 산장은 TMB 루트에서 한참 위쪽, 그랑조라스의 남쪽면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해 있다. 1998년 8월 이탈리아의 유명 산악인이자 탐험가인 월터 보나티(Walter Bonatti, 1930 ~ 2011)의 친구들이 지어서 헌정한 곳이다. 월터 보나티는 이탈리아의 산악인, 알피니스트, 탐험가,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1955년 8월 Aiguille du Dru의 남서쪽 기둥에서 새로운 알파인 등반 루트로 단독 등반하고, 1958년에는 Gasherbrum IV를 최초 등반, 1965년 마터호른의 북벽을 겨울에 처음으로 단독 등반하는 등 많은 등반 업적을 남겼다. 등반 중 불의의 사고로 목숨을 잃은 많은 유명 등반가들과는 달리, 보나티는 35세 때 17년간의 등반 활동을 중단하고 프로 등반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81세까지 살다가 췌장암으로 사망했다. 엘리자베타, 베르토네 산장과는 달리 보나티 산장 이름에는 슬픈 사연이 없어서인지 산장 분위기가 밝다.
보나티 산장은 몽블랑 산군을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 멋진 곳이고, TMB를 하는 트레커들이 꼭 하룻밤 묵고 싶어 하는 성지 같은 곳이다. 그만큼 예약도 어렵다. 2인실, 4인실, 다인실 등 형태에 따라 가격도 다르다. 다인실은 7개의 침대가 양쪽 벽면에 나란히 붙어 있고, 중앙에 칸막이 겸 배낭과 옷을 보관할 수 있는 보관대가 있는 형태다. 등산화는 아래층에 따로 보관하고 산장에서 준비해 둔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화장실과 샤워실도 깨끗하고 더운물 샤워도 가능하다. 콘센트는 방문 옆에 하나밖에 없어서 충전하는 데는 다소 불편하다. 저녁 식사는 두 시간짜리 최고의 풀 코스라고 해서 잔뜩 기대를 했는데, 나쁘지는 않았지만 '최고'라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두 시간이 걸리는 건 음식 하나가 나오고 다음 음식이 나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이른 아침 햇살을 받은 그랑조라스(les Grandes Jorassses, 4208m)는 어제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등산화 끈을 조이고 출발 준비를 하는데, 어제 오후에 산장 앞에서 사진을 찍어 드린 한국분을 다시 만났다. 벤치에 앉아 채비 중인데 양말도 신지 않은 슬리퍼 차림이다. 엄지발톱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나고 부었다. 가방에서 약주머니를 꺼내 프로폴리스액으로 소독하고 밴드를 발라 드렸다. 비상약은 아무것도 챙겨 오지 않았다고 해서 여분의 밴드도 챙겨 드렸다. 약을 발랐다고 해도 상처가 아물 때까지는 며칠 걸릴 텐데... 이틀 전, 베르토네 산장을 지나 올라가는 길에 프랑스 청년이 길가에 앉아 발을 살펴보고 있는 걸 보고, 가져온 바늘에 실을 꿰어 물집을 터뜨리고 소독해 줬었다. 다행히 물집이 크지 않았지만, 그 정도로도 쓰리고 아프다. 산티아고 첫 순례 때 발에 생긴 물집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한 생각이 나서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오늘 트레킹 시작은 제임스 형이랑 같이 하기로 했다. 보나티 산장에서 내려와 살레 발 페레 카페(Chalet Val Ferret)가 있는 곳까지 5.5km를 능선을 타고 가는 대신, 버스가 다니는 도로까지 2km를 곧장 내려가 Arp Nouvaz까지 3km는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내려 공원을 지나 헬레나 산장을 향해 걸었다. L선배는 제임스 형을 따라가고, 나는 젊음이들과 함께 계곡 쪽으로 갔다가 물이 불어나 건너지 못하고 다시 되돌아오는 바람에 많이 뒤처졌다. 버스에서 내린 페레 계곡에서 첫 번째 목적지인 엘레나 산장(Refuge Elena, 2061m)까지는 2km 정도로 긴 구간이 아닌데도 길 초반 경사가 심해 오르기가 만만찮다. 중간에 갑자기 허기 오면서 기운이 빠져서 혼자 한참 쉬었다가 올라갔다. 엘레나 산장에서 샌드위치와 콜라로 에너지를 충전하고 페레 고개를 향해 다시 전진.
페레 고개(Grand col ferret, 2537m)는 이탈리아에서 스위스로 넘어가는 국경이다. 페레 고개로 올라가는 길도 좁고 경사가 심하다. 올라가는 중에 간간이 산악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는 이들이 있다. 등산 스틱을 집고 두 발로 걸어도 아찔한 길을 산악자전거를 타고 내려가다니.... 산악자전거는 그래도 외발전동휠보다는 안전해 보였다. 외발전동휠을 타고 내려오는 사람을 보고 어느 외국 중년 여성은 "Crazy, poor mother, poor mother!"라고 연신 외쳤다. 그때의 분위기를 반영해 우리말로 바꿔 보면 "이 정신 나간 녀석아, 네 엄마가 불쌍하다, 불쌍해!" 정도가 되지 않을까? 두 발로 비교적 안전하게 산을 오르는 트레커들은 그들의 정신 나간 모험심에 그래도 박수와 환호로 화답했다.
페레 고개를 조금 못 미쳐 산과 계곡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에서 제임스 형, L선배와 풀밭에 앉아 한참을 쉬었다. 며칠을 걸으며 가슴에 담은 몽블랑의 산들이 너무 많아 더 이상 담을 수 조차 없어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힘겹게 올라온 페레 고개에는 누군가를 기리는 나무 십자가가 고개의 좌우를 내려다보고 서 있다. 이 고개는 아마도 산악자전거의 성지인 듯했다. 페레(Ferret) 마을로 내려가는 방향에서 산악자전거로 올라오는 이들이 많고, 이미 도착한 바이크 족은 고개 근처에서 고개까지 바로 치고 올라가는 도전에 열중이었다. 박수와 환호로 모두들 응원했지만 번번이 실패다. 그래도 모두들 가던 길을 멈추고 환호성을 지르며 다음 도전자를 응원하며 즐거워했다.
페레로 내려가는 길은 길고 완만한 경사다. 7월 몽블랑의 햇살은 눈부시고 그 햇살을 머금은 풀과 들꽃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중이다. 싱그러운 생명이 온 산과 들과 계곡에 퍼져 있고, 그 생명들 사이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수많은 트레커들이 기쁨을 호흡하며 천천히 오르내린다. 내리막을 거의 내려왔을 즈음에 La Peule 카페가 있다. 이 카페 중앙의 높은 깃대에 스위스 국기, 발레주 깃발,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 루마니아 국기가 매달려 펄럭였다. 이곳에서 보스턴에서 온 제시카를 다시 만나 안부를 묻고 다음 일정을 응원했다. 제임스 형이 사 주신 시원한 맥주로 지나 온 시간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페레 마을에서 라폴리까지는 버스를 탈 수 있다고 한다. 제임스 형은 정말 아는 정보가 많다. 버스 타는 곳까지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라 시간 맞추어 일어났다. 걸음이 빠른 제임스 형은 먼저 내려가고, 우리는 간발의 차이로 버스를 타지 못했다. 몽블랑 일정을 마치고 스위스 융프라우 쪽으로 가는 제임스 형은 버스 안에서 손을 흔들며 다음 인연을 기약했다. 다음 버스는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하고, 트레킹은 원래 걷는 것이니까 버스를 타지 못했다고 아쉬울 것도 없었다.
천천히 걸었다. 라폴리에 도착할 때 즈음 비가 오기 시작했다.
<이동 경로>
■보나티 산장 – (1.8)Bivio Rif Bonatti27 - 버스로 이동(3.0)Arp Nouvaz – (3.5)엘레나(Refuge Elena, 2061m) 산장 – (2.5) 페레 고개((Grand col ferret, 2537m) – (3.0) Alpage de la Peule라푈라 목장 – (5.5) Ferret페레마을 – (0.7)라폴리(1,594m)
- 보나티 산장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하산
- 무료 셔틀 버스로 Arp Nouvaz까지 이동
- 엘레나 산장과 페레 고개까지는 가파른 경사
- 페레 고개를 넘어 라폴리 마을까지는 10km가 넘는 내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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