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7: La Fouly~Champex, 17.08km, 7h 15
페레 고개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라폴리 숙소가 있다. 숙소 앞에서 한국 트래커들을 다시 만났다. 모두 열 명, 부부 다섯 쌍인 이 팀은 산악동호회 회원으로 텐트를 가지고 다니며 비박 트레킹을 한다. 나이도 60대 초중반이라는데, 15kg이나 되는 배낭을 짊어지고 다니는 모습이 대단하다. 나도 비박 여행을 해보고 싶지만, 이제는 그 무게를 지고 다닐 자신이 없어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는데, 이분들처럼 한 번 도전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이 근처 캠핑장에서 쉬어간다며, 저녁거리를 사러 왔다. 그들을 보면서 친구들과 함께 남원, 지리산으로 텐트를 지고 비박 여행을 다니던 고등학생 시절 생각이 났다. 남원에서는 날이 어두울 때 텐트를 치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이장한 무덤이었고, 지리산에서는 밤새 추위에 떨다 기름 버너를 켜기 위해 알코올로 데우다가 텐트를 홀랑 태워 먹을 뻔도 했었다. 신발을 텐트 안에 넣고 잘 생각하지 못해, 아침에 비바람에 젖어 꽁꽁 언 신발을 보며 우리는 얼마나 또 어이가 없었는지.... 밤새 불어닥친 비바람에 날아가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라며 웃고 말았던 우리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위험하고 아찔한 순간이었지만 그래도 좋아서 낄낄대며 즐거웠던 낭만에 절었던 시절이다. 요즘은 그런 중고등학생을 본 적이 없다. 요즘 우리나라 고등학생은 너무 바빠서 순례길을 걸을 수도, 비박 여행을 다닐 수도, 자전거 하이킹을 할 수도 없다.
숙소는 레스토랑과 같이 운영하는 곳이고, 저녁 식사와 다음 날 아침 식사까지 포함해서 예약했다. 1인당 가격이 16만 원(96 CHF)이 조금 넘는다. 두 사람 숙박비로 계산하면 웬만한 관광지의 5성급 호텔 가격인데, 2인실도 아니고 2층 침대 4개가 있는 8인실이다. 침대나 샤워 시설로 봐서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알베르게와 비슷한데, 가격은 거의 10배 수준이다. 산 아래 마을에 있는 숙소도, 산 중턱에 있는 산장도 비싸기는 마찬가지다. 비박하는 것도 재미 있겠지만, 비싼 숙박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비박을 하는 이들도 있을 듯 싶다. 9~10일 일정의 숙박비를 합하면 왕복 항공료보다 훨씬 비싸다.
오늘은 샹팩스 호수(Champex Lac)로 유명한 샹펙스까지 17km를 가는 여정이다. 이 코스에서는 몽블랑의 아름다운 준봉들을 볼 수 없는 코스라 패스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걸어보니 지나온 길에서 마주한 가슴 벅찬 몽블랑 산군을 볼 수는 없지만, 걷는 재미가 있는 길이다. 숙소에서 나오면 길 양옆으로 나란히 서 있는 스위스 느낌이 물씬 나는 집들을 지나 어드벤처 스포츠 센터(Sentoer suspendu) 쪽으로 돌아간다. 이 근처에 캠핑장도 있어 비박하는 사람들은 이곳에 머문다. 부스스한 모습으로 텐트 앞 테이블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이곳부터는 삼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다. 숲에서부터 밀려오는 생명의 공기는 땀에 젖은 피부로 직접 파고들어 가슴 깊은 곳까지 닿는다. 멀리 왼쪽으로 몽블랑 산군의 만년설이 간간이 보이는 숲길은 일부러 패스하고 걸어도 되는 길이 아니라, 트리코트, 본 옴므, 페레 고개를 넘으며 지친 몸을 재충전하고 활기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걸어야 하는 길이다. 게다가 내일은 상팩스에서 샤라미리옹 산장까지 22km를 가야 한다. 숲속 둘레길 수준이라면 그리 걱정할 일도 아니고, 아내와 단 둘이면 조금 무리해서라도 걷겠지만 몸이 불편한 L선배 걱정을 안 할 수가 없었다.
길 중간 잠시 쉬면서 혼자 트레킹 중인 중년 여성을 만났다. 어디서 왔냐고 물으니, '호와이'에서 왔다고 한다. 호와이? 처음 듣는 지명이라 어리둥절했는데, 알고 보니 '하와이'다. 본토 발음으로는 '호와이'라고 하는 모양이다. 트레킹을 많이 다니는 분 같아서 사정 얘기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오면서 다리를 절며 걷는 L선배를 봤다며 '어메이징~'이라고 연신 엄지척을 했다. 샹펙스에서 본옴므 고개를 넘어 샤라미리옹 산장까지 가는 좀 더 빠른 방법이 있는지를 물었다. 배낭에서 책자를 하나 꺼내더니 보여준다. 샹펙스에서 보민 목장까지 가는 안내자료인데, 썩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열심히 도와주려는 그 마음이 고마웠다.
8km를 지나 마을(Saleinaz)에 언덕 풀밭에 반가운 가페(La kabana)가 있다. 여주인이 직접 만드는 크레페에 군침이 돌았지만, 배가 고프지 않아 커피를 마시며 한가로운 아침을 즐겼다. 이곳은 휴양지인 듯 크고 예쁜 통나무집들이 넓은 들에 드문드문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인적은 드물다. 마을을 지나는 길에 다급하게 가던 길을 되돌아오는 키 작은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핸드폰을 어디에 두고 왔다고 급히 찾으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혹시 다른 사람이 주웠을까 싶어 잠시 기다려 보시라고 하고, 전화번호를 물어 전화를 걸어도 답이 없다. 마음이 급했는지 급히 다시 달려갔다. 해외여행을 나와서 핸드폰을 잃어버리는 것은 지갑이나 여권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더 낭패다. 핸드폰에는 연락처뿐만 아니라 항공권, 숙박 예약 정보, 신용카드 등 일상의 거의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나도 스페인 여행에서 핸드폰을 소매치기당해 본 적이 있다. 그때는 마침 직장 공용폰도 가지고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불편한 점이 한둘 아니었다. 쉬던 자리에 가면 그대로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걱정이 되어 발걸음이 무거웠다. 한참 후에 다시 할머니를 만났는데 핸드폰을 찾았다며 활짝 웃는 모습을 보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가쁜 숨을 몰아쉬지 않아도 되고, 힘겹게 올라야 할 오르막도 없는 편안한 길이 이어진다. 숲길을 걷다가 다시 작은 마을의 골목길로 접어들고, 오래된 집에는 오래전에 쓰던 농기구가 걸려 있고, 그 농기구의 세월만큼이나 나이가 든 노인들이 텃밭에서 과일을 딴다. 오래된 낡은 집은 허물고 새로 지을 수 있으나, 그 집보다도 훨씬 짧은 세월을 산 나이 든 노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을 영원히 떠날 것이다. 그들이 떠나고 나면 이 오래된 집, 오래된 동네에는 어떤 이들이 살아갈까? 오래된 마을의 담과 벽에는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여 정겨운 마음이 잠시 머물지만, 오래전 이곳에서 북적이며 살아가던 사람들의 자취는 찾아볼 수 없어 금세 마음이 허물어진다. 사람은 떠나고 집과 마을은 오래도록 남아 이곳에 살다간 이들을 추억한다. 이 골목을 지나는 낯선 나라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잠시 그들을 그리워한다.
오래된 마을을 빠져나오자, 헬리콥터 소리가 요란했다. 산장으로 땔감을 실어 나르는 중일까, 아니면 산에서 낙상 사고라고 난 것일까? 한 곳으로 멀리 날아가지 않고 이쪽저쪽을 연신 왔다 갔다 했다. 가만히 보니 벌목한 나무를 하나씩 옮기는 중이었다. 산에서 벌목한 나무를 트럭에 실어 옮기는 모습은 보았어도, 헬리콥터로 나무 하나하나를 옮기는 모습은 신기하기만 했다. Chanton 마을을 지나 오르막을 올라갈 즈음, 헬리콥터가 바로 머리 위쪽으로 날아 다녔다. 트레킹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위해 직원 한 명이 길에 나와서 통제하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샹펙스까지는 6km, 제법 오르막이다. 이 길이 재미가 없어 패스한다고들 하는데, 일정이 촉박하지 않으면 즐기기에 충분히 괜찮은 길이다. 다람쥐가 많은 곳인지 곳곳에 다람쥐와 송이버섯 조각 작품이 나무 사이에 매달려 있어 작은 재미를 준다. 잠시 쉬면서 메일을 확인했더니, 샤라미리옹 산장으로 가는 좀 더 빠른 방법이 없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장이 와 있다. '체크인 시간은 오후 3시부터 6시까지다. 저녁 식사는 오후 7시에 제공되는데, 늦으면 식사 서비스를 보장할 수 없으니 늦지 마라. 상펙스에서 샤라미리옹 산장까지는 도보로 10시간이 소요된다. 아르페트 다리(Fenetre d'Arpette)는 경유하는 코스는 숙련된 등산객만 다니는 곳이니 다른 루트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긴 구간을 완주하기에 실력이 부족하다면, 버스나 기차 등 대중교통 수단을 알아보라.' 이런 내용이다. 샹펙스 근처에서 구글 검색을 해 보니, 버스 노선이 있다. 일단 버스를 타고 Orsieres 역까지 가면 방법이 생기겠구나 싶었다. 옆에 있던 아내는 관광안내소를 찾아 가면 더 좋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했다.
엊그제 산을 내려오면 아내가 시키는대로 사진을 찍는다고 뒷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아내가 시켜서 찍어야 한다고 했더니, 키 큰 외국인이 "That is very important"하고 해서 같이 웃었다. 동양이나 서양이나 아내 말을 잘 들어야 하는 건 같은 모양이다. 아내 말대로 샹펙스에 도착해서 관광안내소를 찾아 갔다. 상황 설명을 하자 마자 직원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긴 이런 상황, 트레킹 후반에 지쳐서 10시간을 걷기 힘들거나 몸이 불편해서 점프를 하고 싶은 트레커들이 우리 뿐이겠나. 미리 알고 준비하고 있었다는 듯이 차편이 안내된 상세한 설명 자료를 프린트해서 보여준다. 버스를 두 번, 기차를 두 번 타고 Vallorcine 역까지 가는 데 3시간, 거기서부터는 도보로 이동하면 된다. 10시간을 걸어 22km를 이동하는 대신, 9km를 4시간을 걷는 방법이 생긴 것이다. 걷기 위해서 왔고, 힘들어도 걷는 것이 제일 좋지만, 버스와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도 가히 나쁘지 않다.
숙소는 깨끗하고 좋았다. 아침에 버스를 타야 하는 시간과 아침 식사 시작 시간이 오전 7시라 좀 더 일찍 식사를 시작해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준비해 주겠단다. 내일 이동하는데 걱정이 없어졌고, 잠자리도 편안했다. 이만하면 썩 괜찮은 하루다.
<이동 경로>
■라폴리 – 프라즈 드 포르(Praz-de-Fort, 8.5) –이세르(isser, 2.0)–벨베데레 호텔(Hôtel Belvédère, 4.0)- 샹펙스(Champex, 0.5, 1700m)
-여정이 짧고 완만한 숲길이 어서 마치 둘레길을 걷는 느낌.
-아름다운 호수와 설산의 어우러진 풍경
♨ 숙박 : Pension en Plein Air 384 CHF, 4 bed room, 76 CHF9/1인
쓴 책 : <산티아고, 내 인생에 가장 아름다운 33일>, <뇌가 섹시한 중년>, <책의 이끌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