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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행 Mar 30. 2024

지식제로에서 시작하는 형법 입문

형법 조문에 쓰여있지 않으면 범죄로 처벌할 수 없다.

지식제로에서 시작하는 형법 입문


형법 제1조(범죄의 성립과 처벌) 

①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 시의 법률에 따른다.


웬만한 사람들은 형법과 무관하게 세상을 산다. 간혹 형법이 무슨 내용인지 궁금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간 밤에 취객으로부터 아무런 이유 없이 욕을 얻어먹었을 때 분한 마음을 풀데 없어 혹시 이것도 명예훼손죄로 처벌할 수 있을지 생각하는 정도다. 그것도 바쁜 하루를 보내면 원망하는 마음 따위 까마득하게 잊고 만다. 지나가는 미친개가 짖었다고 생각하는 게 낫지, 그걸 마음에 오랫동안 두는 것도 정신건강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형법 하면 살면서 괜히 엮이면 안 되는 법령 같고, 앞으로도 알아서 좋을 없는 법령 같다. 물론 알되는 상황도 없길 바란다. 


형법에 도통 관심 없을 때, 문득 의문이 들었다. 형법 제1조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과연 우리나라 형법은 어떤 방식으로 운용되는지 궁금했다. 그런 의문에 형법 관련 서적이 빼곡한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뺐다. 그 책을 고른 이유는 단순하다. 대부분 형법을 언급하는 책이 두툼한 데 비해, 내가 꺼낸 책은 제일 얇고 책 표지도 양장본이라 산뜻해서다. 소개하는 제목도 내 처지를 헤아렸다. 

책 제목은 ‘지식 제로에서 시작하는 형법 입문’


대출해서 집에서 보는데 책 저자를 이동훈으로 알았는데, 이분은 편저자고 저자는  ‘이토 마코토’라 했다. 

아뿔싸! 우리나라 형법 체계가 어떤지 개괄적으로 헤아리려 했는데, 일본 형법 소개 책을 가져왔던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실수가 어디 있을까! 책 첫 페이지도 읽지 않고 반납하려 했지만,  편저자 서문을 읽고 마음이 바뀌었다. 

서문에는 법학 자체가 인간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학문이며 진실이 가려졌을 때 인간은 매 순간순간 고통을 받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히고 풀어주는 것이 법의 역할이고 존재의의라며 법의 진정한 의의를 알아가는데, 이 책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책 저자는 형법은 범죄자를 처벌하기 위한 법률이 아니고 반대로 범죄자로 취급되려는 사람을 지킨다는 측면이 있다고 한다. 

역설적이다. 이왕 빌린 거 한번 끝까지 읽어보기로 했다.


형법은 일반 시민이 범죄자로 취급되려는 상황을 막아 주기도 한다.


사실 우리나라 형법은 일본 형법과 유사하다. 우리나라 형법은 1953. 9. 18. 제정하였지만, 그 이전에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공포한 일본 형법을 따랐다. 해방 이후에도 군정법령으로 일본 형법을 한동안 사용했다. 이를 구형법이라 하며, 우리나라 형법의 어휘나 체계가 구형법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일본 저자가 지은 형법을 읽는다고 해서, 우리나라 형법을 이해하는 데 있어 부족하지 않다.     

일본 형법 역시 메이지 시대 근대화 이후 독일의 형법을 그대로 가져와서 사용하고 있다. 독일 형법은 범죄의 법률 효과인 형벌에 중점을 둬서 형벌법이라고 한다. 반면, 영미권에서는 형벌의 기초가 되는 범죄에 대하여 다루고 있어 범죄법이라고 한다. 

독일의 복잡한 철학적 사유가 담긴 법이라는 것 말고도 형법은 다른 법에 비해 매우 이론적이고 논리를 중요시한다. 그 이유는 국가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정당화하는 학문, 즉 사형이라는 제도를 합리화하려는 것이게에 형법의 논리적 개념은 매우 치밀해야 하는 것이다. 


형법은 인간의 자유, 생명까지 앗아가는 정당성을 가지므로, 그 논리는 매우 치밀해야 한다.


이왕 책을 통하여 형법이란 무엇인가 알아보려 했기에 인터넷에서 법령정보센터도 열람하며 책을 읽었다.

우리나라 형법은 1953년 제정 이후 24번의 개정을 거쳤다. 그러나, 형법 최초 제정 목적 ‘범죄의 요건과 그 범죄에 대한 처벌에 관한 사항을 규정하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지금 형법 제1조(범죄의 성립과 처벌) 제1항은 ‘① 범죄의 성립과 처벌은 행위 시의 법률에 따른다.’이다. 

이 뜻은 무엇일까? 다른 법률에서 첫 장에 제일 흔히 나오는 용어 정의보다 법의 적용 범위와 성립요건을 먼저 적시했다. 다음으로 죄에 대해서 거론하고 각 죄에 따른 형의 종류와 양정을 규정하고 있다. 

법률 없으면 범죄 없고, 법률 없으면 형벌 없다.


죄형법정주의

우리나라 형법은 독일처럼 ‘법 없이는 범죄 없고, 범죄 없이는 형벌 없다’라는 죄형법정주의를 근간으로 한다. 즉, 형법은 법이 지켜짐으로써 피해자를 법적으로 보호해야 할 이익을 지키는 것뿐만 아니라, 피해자뿐만 아니라 모든 국민의 자유를 가능한 한 보장한다고 하는 인권보장 기능도 있다. 다소 상반되지만, 법익을 지키는 태도에서는 가능한 한 처벌의 범위를 넓히려는 것이고 인권보장하는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처벌의 범위를 한정해서 자유를 지키려 한다. 이렇게 형법은 상호 모순되는 두 개념을 조화하는 것이라 한다.     

즉 법률로 형벌이 부과되는 것 이외에는 모두 자유라는 것이며, 법률에 쓰여 있는 것 이외에는 국가는 형벌을 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형법은 우리들의 자유를 지켜주고 인권을 보장하는 기능이 있다.


죄의 목록을 법률로 정해야 한다? 형법의 조문에 쓰여 있지 않은 일은 범죄가 되지 않고 처벌받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한 점은 책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법률로 미리 정한다’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 ‘법률로 미리 정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라는 자유주의를 각각 상징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로서 국민이 스스로 법률을 정하고 그것에 구속되는 것이다.


법제처에서는 죄형법정주의를 더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죄형법정주의는 근대국가의 법치사상 주권재민사상의 하나의 표현으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기 위하여는 법률에 의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는 시대적 역사적 사명을 수행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법률이 없으면 범죄도 없고 형벌도 없다」라는 원칙이 수립되어 「근대형법의 모토(motto)」로서 죄형법정주의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논설 저자: 노대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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