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시지 in 기당미술관
서귀포시에 사는 아는 동생의 차에 실려 서귀포 삼매봉도서관으로 구경을 가게 되었다. 간단한 절차를 거쳐 동생은 책을 반납하고 간단히 서가들을 구경한 후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멀리 바다가 내려다 보였다. 같은 제주도에 살아도 서귀포는 어딘가 남국의 느낌이 났다. 제주시에서 보이는 바다는 육지로 향하는 길목인데 반해 서귀포에서 너머 보이는 바다는 멀리, 저 멀리 타국으로 향하는 바다이다. 그 시야의 끝은 더 아득하고 어디로 닿을지 알 수 없어 어쩐지 바다가 더 크게 느껴졌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수시로 방향을 바꾸며 길을 방해하는 바람을 맞으며 몇 발자국 내려오니 길옆으로 건물 하나가 들어 앉아 있었다. 기당미술관이었다.
아, 기당미술관이 여기였구나. 한번 와보려고 했는데.
아는 분이 변시지라는 제주도 화가의 그림을 휴대폰 액정을 통해 보여주었다. 언뜻 보기에도 내가 아는 근대 한국화와 어딘지 다르면서도 어딘지 익히 아는 느낌이었다. 처음 보는 그림이었지만 아는 느낌이었다. 나는 꼭 보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우연히 들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어쩌면 심플한 그림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이루고 있는 구성이 소박하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바람 부는 언덕. 그 위에 소나무 한 그루, 초가집 한 채. 그리고 말 한 마리와 한 사내. 이렇게 단출하다. 그 외에는 가친 붓자국으로 휘몰아쳐 가는 누런색 물감이 변시지의 풍경을 채우고 있다. 하늘과 바다를 구분하는 것은 검은색의 선 한 줄이다. 한 줄의 선으로 둘의 공간이 섞이지 않게 금을 그어 놨지만 바람이 전체를 쓸어가고 있다. 가느다란 나뭇가지의 소나무 한 그루는 벼랑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고 초가집 한 채는 이미 공중에 붕 떠있는 것 같다. 그 가운데에 한 남자는 한가하다. 그 남자는 동물처럼, 식물처럼, 바람처럼 풍경 속에 숨으려한다. 하지만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사람이기에 생각을 해야 하고 질문을 해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을. 그렇게 인간은 외롭다. 방황하고 떠나온 곳을 그리워한다.
그림을 보고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전에도 있었다. 구석기인들이 동굴에 그려 놓은 동물들의 모습을 보면서 여기에 이렇게 동물을 그리는 그때의 그 사람의 마음을 무엇이었을까를 그려보았다. 단순히 사냥연습을 하기 위해서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 같다. 그 마음은 변시지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시선이 던져진 풍경이었기에 나는 어딘지 아는 느낌이라는 생각이 들었을까? 나도 그렇게 자연 속에 숨고자 했던 한 사내였기에 그 느낌을 알고 있는 것일까?
변시지의 그림은 그림의 내용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방식에서도 아는 그림이었고 또 알고 싶었던 그림이었다. 유화 재료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동양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었다. 붓으로 면을 칠해가는 서양화의 그림 법과 달리 변시지는 붓으로 선을 그어 대상을 드러낸다. 물감의 두께로 질감을 표현하는 서양의 표현법과 달리 그의 그림에서는 갈라진 붓끝의 거칠음으로 질감을 그려내고 있다. 이는 동양화에서 붓을 사용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나는 또 아는 느낌이라는 느낌을 받았나보다. 다만 동양화와 다른 점은 여백이다. 동양의 미를 여백의 미라고도 할 만큼 빈 공간에는 동양인의 철학과 세계관이 담겨있다고 한다. 변시지의 그림에도 검은 선을 긋지 않은 공간이 많이 있긴 하다. 하지만 그의 여백은 꽉 차있다. 누런 흙빛의 물감으로 빈틈없이 꽉 채워져 있는데 그 누런 빛은 제주도의 세찬 바람이 되어 공간을 잡아 뒤흔들고 있기도 하고, 한 사내의 어떤 열망으로 일렁이기도 하며, 습하고 짠 바닷바람을 토해내고 있기도 하다. 실재하는 곳이 아닌 정신적인 공간을 주로 표현하였던 동양화의 산수화와 다르게 바로 이 빈 공간을 이렇게 진하게 표현하고 있는 점이 변시지 그림의 가장 큰 독창성이라고 생각한다. 독창성이라는 멋없는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다는게 안타깝다.
제주도는 기후의 변화가 정말 극적으로 경험되는 곳이다. 하루에도 공기의 흐림이 수차례 변한다. 이러다가 아가미가 생기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습도가 높고 안개가 많이 끼다가도 갑자기 해가 쨍쨍나고 구름이 우르르 몰려 지나가 파란 하늘이 나타다기도 한다. 제주도 한 가운데에 우뚝 솟은 한라산이 바람을 갈래갈래 찢어 놓아 바람은 여러 방향으로 휘몰아진다. 그런 제주도에 살다보면 자연이란 그렇게 친절하지 많은 않은, 요동치며 살아 있는 생동하는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그 속에 사는 제주인은 바람에 기대어 산다고 생각한다. 맞서 싸우지 않고 그렇다고 원망만 하지도 않고 비스듬히 빗겨 기대어 사는 모습을 예 제주도 집의 지붕에서, 밭을 둘러싸고 있는 낮은 돌담에서, 바람에게 지어준 수많은 바람의 이름에서 엿보았던 것 같다.
제주도가 그려낸 바람의 그림을 보고 나오니 날씨가 또 한 번 바뀌어 있었다. 선명했던 수평선이 흐려져 있다. 아래에서부터 바람이 산을 타고 넘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실려 바람에 기대어 비스듬히 산을 타고 내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