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재훈 Nov 30. 2020

당신은 아바타(Avatar)다?

헷갈린다 헷갈려, 나는 누구인가..!

이 브런치는 전문가가 아닌, 한 명의 기획자겸 대표가 시행착오를 겪으며 느꼈던 이야기들, 그리고 같은 관심사를 갖고 있는 사람들과 고민을 나누기 위해 시작한 푸념 공간이다. 전문가의 실속 있는 이야기를 기대했던 분들에게는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 조언은 언제나 환영한다. 비슷한 고민을 가진 독자가 많기를 바라며, 미술이 누구나 즐길 수 있는 문화가 되기 위해 함께 고민하기를 고대한다.


‘아바타(Avatar)’라는 단어는 “인간 혹은 동물의 모습을 가진 힌두신의 분신, 혹은 어떤 것에 대한 구체화”를 의미한다. 하지만 현 세대에게 아바타란 영화계를 휩쓸었던 3D 영화 혹은 예능에서 나오는 조종 가능한 피사체, 혹은 본인의 손가락 움직임에 따라 움직이는 게임 속 존재를 의미한다.


본래의 의미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만 이전 세대로 돌아갔을 때 아바타는 ‘아바타’라고 불리우진 않았겠지만 소설 혹은 영화와 같은 관객이 몰입하여 향유하는 콘텐츠 속 존재를 의미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아바타’라 함은 ‘나’, 혹은 표현하고 싶은 무언가를 대신할 어떠한 ‘존재’라는 점이다. 나는 조금은 이르게 울타리 밖으로 뛰쳐나가 ‘대표’ 행세를 하며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역할의 NPC들을 마주하고 함께 호흡하고 있다.


승낙이 나에게는 낯선 단어가 될 만큼 거절은 나에게 일상적인 단어가 되었다. 이제 막 사회에 나온 어린 대표라는 무시를 받지 않기 위해 어느 미팅엔 면도를 하지 않고 나가기도 하며(이상하다) 어울리지 않는 어른스러운 의상을 구입하기도 하면서, 유리할 때가 되어서는 “어린데 대표까지 하네”라는 말을 듣기 위해 은근슬쩍 내 정신연령을 티내고는 한다.

세상을 경험하면서 나는 ‘가면’이라는 단어를 자주 떠올리고는 한다. 여러 집단 속에서 나도 모르게 바꿔 쓰게 되는 내 수많은 인격들은 간혹 괴리감과 허무함으로 다가왔고, ‘아바타’, ‘페르소나’라는 단어를 내 삶에 빗대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나’라는 자아와 누군가의 ‘이재훈’이라는 또다른 자아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두 이야기의 간극이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았다. 그리고 간혹 과도한 몰입이 서로의 입장에 위협이 되기도, 되려 삶의 큰 돌파구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모두 속해 있는 수십,수백가지의 조직과 관계에서 커다란 교집합을 중심으로 흩어져 있는 다양한 존재로서 기능하고 역할 한다. 마치 ‘롤플레잉’ 캐릭터처럼, 그리고 그것이 좋든 싫든 우리는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선택 이전에 각 자아에 지배되어 시간을 보낸다.

 

그래서 나는 정말 누구일까?


나는 집에선 철부지 아들, 직장에선 성격 급한 대표자, 업계에선 열정만 넘치는 햇병아리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자취방에선 성취를 꿈꾸는 도전자이자 열등감 가득한 어린아이라는 여러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지인 혹은 선배들과 술 한잔 기울일 때 ‘가면’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어쩌면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고 나누며 위로하는 그 술자리에서도 모두 각자의 가면을 여전히 쓰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것이라 확신하는 편이다.


그러다 보면 귀갓길에 과연 진짜 ‘나’라는 존재가 있는 것일까? 라는 의문으로 연결된다. 사회와 연결되고 유기적 존재로서 기능하면서 ‘본질’적인 ‘나’, 즉 본질이라 믿었던 첫 자아는 희석되어 간다.

사회를 통해 희석된 ‘나’는 ‘페르소나’로 대체되어 버리기도, 혹은 특정 페르소나의 또다른 페르소나로서 역할하기도 한다.  얼마 전 나는 몇 달 만에 가진 부모님(최고의 인생선배)과의 식사자리에서 사업은 아무리 해도 모르겠다고, 그냥 용돈만 받으면서 살던 때가 가장 행복했던 것 같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사실 어느정도는 진심이라고 해도 거짓은 아닐 것 같다.


독립성이라곤 느껴지지 않는 철부지 같은 이야기다. 사회에선 절대 뱉어선 안되는 그런 말을 뱉으며 부모님에게 잔소리를 듣고, 몇십년 동안 사업을 이어가는 아버지의 조언을 자리 내내 들었다.


사실 그러한 조언은 대부분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고 아버지에게 처음듣는 이야기도 아니다. 조금 더 어렸을 때 들었다면 귀찮은 잔소리로 흘려들었을 이야기였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에서 행복감을 느꼈다. 내 온전한 약점을 보여줘도 되는 존재들 앞에서 뱉은 이야기는 이해관계 속 쌓인 혹덩어리들의 무게를 잠시 덜어내어준다.


이처럼 열정만 넘치는 햇병아리로서 업계에서 이리저리 치이며 지칠대로 지친 본인은 몇 달에 한번 찾아가는 집에서 부모님에게 응석을 부리고 사회에선 약점이 되기에 털어놓지도 않던 쓰잘데기 없는 고민을 털어놓으며 잔소리를 듣고, 그것에서 행복을 얻기도 한다. 나는 업계에서의 ‘대표 이재훈’이라는 페르소나로 가정에서의 아들이라는 ‘페르소나’를 이용했다.


한편으론 직장에서의 ‘성격 급한 대표자’라는 또다른 페르소나로서 선배 기업가에게 업계에 대한 팁과 대가를 최대한 미룰 수 있는 도움을 받기 위해 모르는 척 뻔뻔한 도움을 청하기도 한다. 이 경우에는 ‘햇병아리’라는 업계에서의 페르소나를 이용한 격이 된다고 생각한다. (이쯤되면 페르소나에 강박이 있나 싶겠지만 이것이 오늘 내 이야기의 주제다.)


앞서 언급한 집에서는 철부지 아들, 직장에선 성격 급한 대표자, 업계에선 열정만 넘치는 햇병아리 그리고 자취방에선 성공을 꿈꾸는 도전자이자 열등감 가득한 어린아이라는 페르소나들은 모두 ‘나’이기도 하며 아니기도 하다.

나는 내가 가진 여러 환경과 '페르소나'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나는 나를 특정 환경에 밀어넣고는 한다. 나는 대체로 가만히 휴식을 취할 때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된다.


모든 행위엔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리고 리스크를 피하는 최고의 방법은 ‘언제 시작하고’, ‘언제 멈추는지’ 아는데 있다. 나는 간혹 이 지점을 놓쳐 밸런스를 무너트리곤 했다.


어느 한가지 역할에 과몰입 할 경우 행복 보다는 모든 상황에서의 고충을 느끼며 불행감만 커지게 되는 것을 경험했다. 자취방에 존재하는 '성취를 열망하는 어린아이'의 자아는 '성격 급한 대표자'와 '열정만 넘치는 햇병아리 사업가'라는 자아에게 좋은 동력원이 된다.


하지만 간혹 내 하루를 지배하는 자아들의 균형을 맞추지 못했을 때 비교하지 않아도 되는 대상과 나를 비교하고, 나를 지나치게 자책하며 에너지로 삼을 수 없을 만큼 내 자존감을 도려내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점을 발견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다.

자존감이 떨어지거나 방향성에 대한 혼란이 오는 시기에는 자신이 가진 여러가지 자아와 그것들이 갖고 있는 역할들을 생각해보고, 어떤 것이 지금 나를 과도하게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고민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무엇이든지 과하면 탈이나고 적당하면 이로운 법이다.


터무니 없는 의문이지만 ‘나’라는 주체는 존재하는 것일까? 본질적인 ‘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새로운 재료들로 새롭게 탄생하고 새로운 본질이 된다. 나는 지금도 앞으로도 결코 완전해질 수 없고 수많은 자아와 씨름하며 살아갈 것이고 지금 내가 가진 자아들은 헌 것이 되어 새 것으로 탄생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페르소나'들을 적절히 활용할 수 있다면 새로이 탄생할 내 모습을 설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코로나가 문화예술 시장에 가져온, 가져올 변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