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마치 네 뜻대로 될 것 같다는 기분만 들게 할 뿐이지. 누구한테 투표하건 우린 보험료도 못 낼 형편이고 네가 아프면 또다시 내 피라도 팔아야 할 거야"
주인공 버디 존슨(케빈 코스트너 분)이 차 안에서 초등학생 딸 몰리(매들린 캐롤 분)에게 내뱉은 말이다. 이혼 후 뉴멕시코주의 작은 도시 텍시코(Texico)에서 계란 공장 노동자로 일하며 퇴근 후에 마시는 술 한잔이 유일한 낙인 존슨에게 대통령 선거는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 존슨은 딸 몰리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투표에 대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유튜브 캡처)
투표 당일, 일하던 계란 공장에서 해고된 존슨은 바(bar)에서 당구와 술로 시간을 보내느라 딸과 투표소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을 놓치고 만다. 딸 몰리는 투표 마감 시간이 임박했는데도 아빠(존슨)가 나타나지 않자 다급한 마음에 엄청난 사고를 치고 만다. 졸고 있는 선거관리원 몰래 선거인명부에 대리 사인을 하고 투표용지를 빼낸 후, 자신이 직접 투표를 해 버린 것이다. 그런데, 몰리가 투표를 마치려는 순간, 청소원의 부주의로 투표기기의 코드가 빠지면서 존슨(실제로는 몰리가)이 행사한 표는 투표를 한 것도, 안 한 것도 아닌 상태가 되고 만다. 에러가 발생한 것이다.
개표 결과, 현직 대통령인 공화당 후보는 전체 선거인 538명 중 266명을, 도전자인 민주당 후보는 267명을 각각 확보한 상태다. 어느 후보도 대통령 당선에 필요한 270명의 선거인을 확보하지 못한 것이다. 뉴멕시코에 할당된 5명의 선거인단 표를 누가 가져가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 현직 대통령(Boone)과 야당 후보(Greenleaf)가 확보한 선거인 수가 박빙을 보이고 있다(유튜브 캡처).
하지만, 뉴멕시코 주 전체를 개표한 결과, 두 후보의 표가 또다시 동수를 이뤘다. 결국, 에러가 발생한 존슨의 한 표가 뉴멕시코에 할당된 5명의 선거인의 향방을 결정짓고, 결과적으로 대통령까지도 결정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발생해 버렸다.
주 선거관리위원회는 존슨에게 10일 뒤 재투표를 할 권리를 부여하자, 존슨의 한 표에 운명이 갈리게 되는 두 후보 진영은 버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한 비위 맞추기' 경쟁을 펼친다. 갖은 우여곡절 끝에 드라마 같은 10일이 지나고, 그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부녀가 함께 투표소에 들어서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 영화 <Swing Vote>의 공식 예고편
뉴멕시코의 실제 투표시간은?
존슨은 투표시간에 지각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급히 바를 빠져나가다 입구에 걸려있는 간판에 머리를 크게 부딪힌다. 존슨은 머리의 충격으로 차 안에 한동안 드러누운 채로 투표를 건너뛰고 만다. 존슨이 당구 게임 중 확인한 시각은 오후 7시 9분이다. 그런데, 실제 뉴멕시코의 투표 마감 시간은 오후 7시다. 영화의 배경인 2008에도, 가장 최근인 2020년에도 투표 마감 시간은 모두 오후 7시였다. 7시 9분이면 투표시간에 이미 늦은 것이다.
미국의 투표시간은 우리나라와 달리 주마다 제각각이다. 선거법이 주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뉴멕시코처럼 투표시간을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정한 주는 앨라바마, 플로리다, 조지아, 하와이, 캔자스, 미시시피 등이다. 코네티컷은 오전 6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고, 캘리포니아는 오전 7시부터 오후 8시까지다.
▲ 당구를 치다 딸과의 약속 시간이 늦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존슨(유튜브 캡처).
재밌는 것은, 국토면적이 넓은 미국은 여러 개의 표준 시간대(time zone)가 있다는 점이다. 미국 본토만을 놓고 봐도 4개(Pacific, Mountain, Central, Eastern)가 존재한다. 그래서 네브래스카의 경우엔 같은 주 안에서도 Central Time Zone에 해당하는 지역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 Mountain Time Zone에 해당하는 지역은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투표시간을 다르게 운용한다.
유권자 등록은 어떻게?
영화에서는 딸 몰리가 졸고 있는 선거관리원 몰래 유권자 명부를 열람하고 대리 사인을 한 후, 투표용지를 훔쳐 기표소로 들어가는 장면이 나온다. 유권자 명부에 존슨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사전에 유권자 등록을 마쳤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몰리가 대신했지만 말이다. 미국 대부분의 주에서는 시민권을 갖고 있더라도 사전에 주 선거관리위원회에 유권자 등록을 마쳐야만 투표 자격이 부여된다. 우리나라는 유권자 자동 등록제도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별도의 유권자 등록이 필요 없다.
▲ 졸고 있는 선거관리인 몰래 투표용지를 빼내는 몰리(유튜브 캡처).
유권자로 등록할 수 있는 자격은 미국에서 태어났거나 귀화한 시민권자이어야 하고, 선거일 기준 18세 이상이어야 한다. 유권자 등록은 여러 주에서 동시에 할 수 없다. 등록은 유권자가 사는 주 정부에 우편으로 신청하거나 인터넷을 이용해서도 가능하다. 몰리가 아빠를 대신해 유권자 등록을 할 수 있었던 이유다.
유권자 등록제도는 19세기 말 부정선거 방지를 위해 채택됐다. 상대적으로 생계에 바쁜 빈곤 계층인 흑인과 히스패닉, 아시아계 이민자의 등록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대선에서는 전체 유권자 약 2억 2천만 명 가운데 70%만이 유권자 등록을 마쳤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2015년 오리건 주를 시작으로 유권자 자동 등록제도는 서서히 확산되는 추세다. 웨스트버지니아, 버몬트 등 8개 주와 워싱턴D.C에서도 유권자 자동 등록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졸고 있는 선거관리인 몰래 대리투표가 가능할까?
불가능하다. 영화 속에선 투표장에 선거관리인 한 명밖에 없고, 게다가 졸고 있기까지 하다. 영화의 배경인 텍시코의 인구가 천명을 겨우 넘을 정도로 조그만 도시이긴 하지만 모든 투표장에는 주 정부에서 파견 나온 선거관리인(poll official) 외에도 참관인(election observer)과 감시인(a watcher) 등이 배석하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투표장에 있는 선거관리인 등의 눈을 모두 따돌리고 유권자 명부를 열람하고 사인한 후 투표지를 몰래 훔치는 행위는 현실에선 가능하지 않다.
전원코드가 빠져서 투표 장치에 오류가 발생하는 일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뉴멕시코를 포함해 상당수의 주에서는 기계식 투표시스템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권자가 자신의 투표용지(또는 유권자 카드)를 기계에 집어넣으면, 유권자 정보가 자동 스캔되고 화면에 후보자를 선택할 수 있는 리스트가 표출된다. 유권자는 표출된 화면에서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선택한 후 확인(confirm)을 누르면 투표 결과가 전송되고 자동 집계된다. 영화에서처럼, 실제 투표를 했지만 기계적 고장 등의 원인으로 투표 결과가 전송되지 않았다면 오류로 인식되어 재투표를 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다. 가능성이 희박하지만 말이다.
▲ 몰리가 투표하기 직전의 모습(유튜브 캡처)
우리나라와 같이 종이 투표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주는 앨라배마 등 18개 주다. 투표용지에 유권자가 직접 필기구로 지지 후보를 표기한 후 투표함에 집어넣는 방식이다. 일리노이 등 14개 주에서는 기계식 투표방식과 종이 투표방식을 혼용하고 있다. 워싱턴과 콜로라도, 오리건 등 3개 주는 우편(Mail) 투표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참 고>
1. 미국 대선에서 선거인단 수는 538명인데, 이는 연방 하원의원(435명)과 연방 상원의원(100명) 숫자를 합한 535명에 워싱턴 DC 선거인단 3명을 합한 것이다.
2. 미국에는 '정당 직접투표 제도(the Straight-Party Voting System)'가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을 선택하면 해당 정당의 이름으로 출마한 모든 후보에게 자동으로 투표가 되는 시스템이다. 2020년을 예로 들면, 대통령과 부통령, 연방 상원의원, 연방 하원의원, 주의회 상원의원, 주의회 하원의원, 대법원, 항소법원, 공공규제위원, 지역구 판사, 지역구 검사, 카운티 위원, 카운티 서기, 카운티 회계 등 다양한 종류의 선거를 한 번에 치러야 하기 때문에 유권자의 편의를 위해 이러한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2020년 현재, 앨라배마, 인디애나, 미시간, 켄터키, 오클라호마, 사우스 캐롤라이나 등 6개 주가 정당 직접투표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