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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bj Jun 10. 2024

따뜻한 프라푸치노 같은 상사를 씹으며

깜빡이 없이 들어오던 친절, 그리고 무례


"안녕~이거 먹어~"


아침 7시부터 홀로  회사를 지키던 내게 정식 출근시간인 9시쯤 한 선배가 다가와 툭, 바나나와 스타벅스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너무 따뜻하지도, 경직되지도 않은 적당히 다정한 목소리. 재작년 말 사직서를  당시 몸담던 부서에서 윗선이었던 선배였다. 속은 아니고.. 그보단 조금 먼. 다른 부서되고는 볼 일이 거의 없다. 오늘 출근이시구나. 오랜만이었다. 근데 배고프던 차에 예고 없는 바나나와 커피라니!  선배의 이런 호의 처음이었다.


"감사합니다.." 뭐야 뭐야. 내적 '힝….'을 외치며 카카오톡이었다면 냉큼 보냈을 이모티콘을 흉내 내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마음을 담아. 입꼬리는 한껏 아래로, 눈은 장화 신은 고양이 같은 느낌으로 동그랗게. 선배는 오다 주운 걸 돌려준 행인처럼 아무 말 없 유유히 본인의 자리로 가 앉았다.


이게 얼마만의 간장통 비주얼의 저렴이 대용량 1L 커피, 1800원짜리 매머드 커피가 아닌 스타벅스 아이스아메리카노더냐. 내근 이래 첫 스타벅스 커피 테이크아웃이었다. 성의 없이 러가던 가성비 카페인 라이프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작은 변주. 감사했다. 커피의 키읔자도 모르는 내게도 먹어오던 그것보다 맛이 좋았다. 힘이 났다.


'찰칵' 사진을 찍어 A에게 보내 자랑했다. 00 선배가 사주신 것 있지 (눈물 글썽 이모티콘). 보내며 생각했다. 그래, 재작년에도 나랑 별로 안 친하셔서 까칠했던 거지, 그렇게 나쁜 선배는 아니었어. 나라고 후배들에게 그리 따뜻하다거나 잘 챙겨주는 선배는 아니잖아?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고 국장실에 사표를 던졌던가. 그녀 함부로 씹지 말라. 나는 어느 후배에게 한 번이라도 커피와 바나나를 건네는 사람이었느냐. 무작위 혐오를 확장하며 마음이 좁아졌던 날의 경솔함을 반성했다.


시간은 흘러 퇴근 시간이 다가온 1시 반쯤. 당일 내 롤 매뉴얼 상으론 점심식사를 마치고 복귀한 후에는 주어진 별다른 업무가 없다. 이제 그녀,의 몫. 그런데 회의시간이 다가오는데도 그녀가 회사 톡방에서 마땅히 내려야 할 업무 관련 공지를 내리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 깜빡하신 건가, 선심 쓰듯 물었다. "오후 이거 제가 할까요?" "응 업데이트만 좀 해줘."


할 일도 없고 퇴근 시간은 1시간 정도 남았고, 바나나랑 커피도 얻어먹었고. 이 정돈해줄 수 있지. 해달란 게 업데이트지. 오전과는 달라진 오후 발제들을 취합하고 문서화해 그녀에게 보냈다. 이제 퇴근이다. 싶었다.


그때였다. 오후 회의가 시작되기 직전, 그제야 내가 보낸 파일을 확인한 듯한 그녀는 회의실에서 나와 내게 터벅 다가와선 생짜증을 내었다. "야! 이걸 왜 해 큐시트를 업데이트해야지." "네..?" 그녀의 업데이트 지시엔 분명 주어가 없었다 '업데이트'하라고만 툭- 말했다. 오전에 바나나를 건네듯. 통 업데이트하라면 내용을 수정 및 추가하는 건 개별 발제. 큐시트 제목은 그녀와 같은 부장들이 직접 채워넣고 수정한다.


공연한 말대꾸로 상황을 악화시키고 싶진 않았지만 억울한 마음도 감출 수 없었다. 죄송합니다라고도 할 수 없었다. 죄송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의 부탁으로 소관 아니며 의무 없는 일을 시간을 내 해주고도 핀잔을 들은 선량한 시민인 것이다. 안 죄송했다.


"00 부장이 보낸 건 어딨어?" "네? 아까 거기요." "..?ㅡㅡ" "제가 보내드린 파일이요." 사실이다. 삔또가 상하지 않았더라면 나도 더 길게 대답할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고마운 줄도 모르고 자신의 기분대로 행동하는 에게 나라고 왜  추가 감정노동을 베풀어야 한단 말인가? 그 노동은 특근비도 없잖아.


약지도 않았지만 계산 없지도 않은 나는, 순진무구하게 절대선이 되려는 생각일랑 없고 앞으로도 그러리. 보이지 않는 짧은 기싸움 후 그녀는 자신의 어이없음을 누구라도 알아주라는 듯 둔탁한 발소리를 내며 회의실로 다시 들어갔다.


   "야!" "..?" 단말마에 담겼던 '얘 정말 황당하네'식독이 퇴근길에 한참 머리에 맴돌았다. 그래. 개떡같이 말해놓고 찰떡같이 알아듣기를 바라는 상사. 그게 그녀였다. 내가 괜히 퇴사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찰떡같이 알아듣길 바라기 전에 자신이 개떡같이 했는지는 돌아보지 못하는, 너무 평범한 어른. 폐급이라고 하기도 뭐하지만 썩 근사하지도 않은. 시에도 꼭 그 정도의 불친절과 무성의가 나를 작아지게 하고, 회사를 나가고 싶게 했었다. (뭐, 그녀가 퇴사 결심의 주 요인은 아니긴 했다. 하지만 싫기도 했다.)


작 바나나와 커피 하나 정절 팔아넘기고 과거의 평가를 갱신했던 스스로가 바보 느껴졌다. 난 바나나 먹을게 넌 뻐큐나 먹어라. 억울한 것이라곤  못 참는 성정에 변호사 꿈꿔봤던 나. 상황을 복기하며 '아니 황당한 게 누군데'를 찐따처럼 반복하며, 이걸 누구에게라도 하소연하고 싶어졌다. 그냥 털어버리면 될 일을 말이다. 감정 쓰레기통 찾던 기분파 나.


  그 대상은 또 가장 가까운 A였다. 'ㅅㅂ 나 내 업무도 아닌 것 도와줬다가 욕만 먹음' 고민할 겨를도 없이 보내고, 공감받았다. 좋은 친구는 그녀를 규탄하며, 나를 회사에서 석방하고, 그녀를 구속하라고 외쳐다. 내가 느꼈을 수모의 크기를 과장해 응수하며 상대를 극형에 처하라고 명하는 대문자 F식 위로. 차올랐던 가슴의 응어리는 이내 눈 녹듯 누그러졌다.


좋은 친구.. A. 나쁜 선배.. 00. 약 5시간 전 나의 평가 서둘러 수정하면서 곱씹었다. 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의 '힝'과 '야ㅅㅂ' 사이는 얼마나 좁고 얄팍한가. 오전과 오후의 모습 중 무엇이 더 그녀의 본질에 가까울까. 그녀는 세심한가 경솔한가. 바나나와 커피를 챙겨준 것도 그녀. 본인의 업무를 짬 때려놓고,  불만까지 한껏 감정적으로 표하던 것도 그녀. 둘 모두 그녀였다. 때론 다정하고 때론 무례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다 보니 글쎄, 그건 생각해 보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애꿎은 A에게  아침저녁으로 감동과 혐오, 그 소화되지 않은 감정들을 어지럽게 설해 댄 인간 말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는 말했다. 우리는 스스로는 복잡하게 좋은 사람이고, 타인은 단순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믿는다고. 실상은 그보다 우리 모두가 대체로 복잡하게 나쁜 사람이라고.


딱 나만큼 입체적인 인간. 을 쉽게 판단하는 인간. 단한 잣대를 가지고 타인을 심판하는 척하던 내 호오는 얼마나 값싼가. 그 바나나랑 커피. 합해서 6천 원쯤 됐으려나 그래, 너나 나나. 오전엔 인심 베풀다가도 오후엔 기분대로 위없이 욱하기도 하고. 이런 게 이슬아 작가가 말한 접속사 없이 말하는 사랑이려나. 그렇게 사는 거지 뭐.


   그렇게 쿨하게 자기연민버리고, 여러 얼굴의 그녀도 느슨히 받아들이고 싶다가.. 그래도 나라면 최소한 한 번이라도 내가 지시가 명확하지 않진 않았나 돌아볼 거라고. 특히 내 업무를 기꺼이 대신해준 사람에게는. 지 일인 걸 몰랐나? 그것도 당연히 그녀 잘못. 반복레.


박완서 선생님은 현생에서 극혐인 인물을 볼때마다 '당신같은 사람을 꼭 한 번 그려보겠다'는 식으로 소설식 복수를 기약했다고 한다. 그런 다짐으로 시작한 글인데,   줄로 갈무리할 수 없이 진자 운동하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 본다. 그녀를 속해야 할지 석방해야 할지 기립해야 할 지 심란해진 , 바나나와 카페인으로 단숨에 쌩쌩해졌던 머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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