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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민차 Jan 30. 2024

버터야, 무지개다리 끝은 어떠니

거긴 따뜻했으면 좋겠다

13년 정도 함께 지내던 반려묘가 세상을 떠났다. 며칠 골골대고 아픈 거 같아서 주의를 살피며 봤는데, 주사기로 먹거리를 주며 힘을 내라고 응원도 했는데 이렇게 허망하게 하루아침에 떠나다니.


노랗고 어여쁜 표정이 사랑스러워 버터라는 이름을 지었다. 하지만 이름처럼 부드럽지 않고 늘 하-악질을 해댔고 날카로운 손톱을 먼저 내밀었다. 그럼에도 처음 키우는 고양이였기에 모든 것이 신기했고 또 사랑스러웠다. 버터가 할퀴는 손톱과 그 손톱으로 긁어놓은 소파 자국까지도 말이다.


처음 키운 동물은 햄스터였다.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작은 체구에 동그랗고 똘망거리는 눈망울, 작은 꼬리, 뒤돌아 섰을 때 공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 너무나 사랑스러웠던 것은 기억한다. 하지만 생긴 것과 달리 굉장한 포악한 성격을 지녔었는데, 만지면 손가락을 물기도 하고 손으로 잡으려고 하면 미끄덩 미역처럼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어린 마음에 왜 내 맘을 몰라주냐며 속상해했다. 햄스터가 좋아하는 먹거리며,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혈육인 오빠와 머리를 맞대고 고심을 했다.


어느 날, 동네 만화책방에서 집에 있는 햄스터 두 배 만한 햄스터가 몇 마리를 보았다. 사장 아주머니는 관심 있으면 집에 가져가 키우라고 했다. 외롭게 혼자 자기 집을 지키고 있을 햄스터를 생각하니, 재고할 겨를이 없었다. 당장 집에 가져가겠다고 했고 작은 상자에 희고 긴 햄스터를 담았다. 사이좋은 둘이 지낼 행복한 미래를 상상하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자다가도 보던 만화책은 고르지도 않고 말이다. 오빠도 친구가 생겨서 다행이라며, 둘이 사이좋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또다시 고심했다.


하지만 이게 무슨 일인지, 둘은 만나기만 하면 싸웠다. 어린 마음에 둘이 안 맞는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핑계가 아니다. 싸우면서 정들겠지, 나도 오빠랑 자주 싸우니까. 며칠 지나지 않아 내가 목격한 것은 피투성이 몸뚱이에 하얀 뼈가 앙상하게 드러난 길고 하얀 햄스터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원래부터 집을 지키고 있던 작은 회색 햄스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구석에서 놀고 있었다. 피투성이 된 몸뚱이를 보고 너무 놀란 나는 작은 회색 햄스터가 밉기도 하고 무섭기도 했다. 작은 녀석이 왜 저렇게 고얀 행위를 저질렀는지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얄밉고 무섭고 만감이 교차하는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고, 사료조차 주고 싶지 않았다. 피칠갑을 한 하얗고 긴 햄스터는 집 앞 나무 앞에 묻어주었다. 그땐 묻는 것이 불법인지도 몰랐고,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다. 지금처럼 반려동물 장례식도 없었다. 작은 회색 햄스터는 이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혼자 놀기에 빠져있었고, 언제부턴가 눈길조차도 주지 않았다. 밥은 어머니께서 주셨던 거 같다. 하지만 그 녀석도 오래 지나지 않아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동종 생물을 살해하고 본인도 괴로웠던 것일까, 아니면 먹었던 것일까. 알 수 없지만, 그렇게 처음 키운 반려동물은 무지개다리를 유유히 건너갔다.


첫 반려동물의 인상이 너무 강해, 또 다른 동물을 집에 들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교도 가고 친구들과 놀고, 싸우고 밥 먹고 또 놀고 라디오를 듣고 지루한 일상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빠가 작은 상자를 갖고 집에 왔다. 무언가 엄청 소중하게 품고 있어 새로 나온 장난감인가 싶었다. 짹짹. 작게 소리가 들렸다. 손바닥만 한 참새였다. 빨대보다 가는 다리에는 실처럼 가는 붕대가 감겨있었다. 고양이 습격을 받은 것인지, 도로변에 누워있는 참새를 고이 모셔 동물병원에 데리고 간 오빠는 참새의 관절이 원활하게 붙을 수 있도록 새의 밥이며 간식을 만들었다.


참새는 벌레를 먹지 않을까 해서, 벌레를 잡기 위해 집 앞 나무, 땅을 보며 벌레의 흔적을 찾았다. 집에 파리라도 들어왔다 싶으면 뭉개지지 않게 목숨만 끊을 정도의 힘조절을 했다. 참새는 쾌차했다. 날개를 펴고 집에서 날아다니면 어쩌나 고민하게 할 정도로 큰 눈은 반짝였고, 얇은 다리에도 힘이 붙는 것 같았다. 완쾌하면 흥부네 박씨를 물어준 것처럼, 우리집에도 박씨를 물어다 주면 어떡하지, 괜한 상상을 하며 미소 짓기도 했다. 참새는 몸이 좋아지자 목청도 높아졌는데, 참새가 이렇게 목소리가 컸나 의심할 정도로 우렁찼다. 집 앞 나무에 앉는 참새마저 우리집으로 날아들면 어쩌나, 친구를 부르는 건지 엄마를 부르는 건지 일상 생활이 불가할 정도로 울어댔다. 참새들이 날아들어 우리집을 가득 채우는 상상을 매일 하던 어느 날, 사무치게 고요한 적막이 흘렀고, 나쁜 생각이 들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은 역시나였고, 나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밤새 개미떼의 습격을 받은 참새는 쾌차하던 몸으로 날아오르지 못하고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다리가 다 나으면 당연히 두 날개를 펼치고 날아오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집에만 있어서 나는 것을 잊어버린 걸까. 개미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들어온 것일까. 개미들이 한없이 무섭고 그 존재만으로 치가 떨렸다. 개미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며, 참새는 왜 도망칠 수 없었던 것일까. 햄스터와 참새와 함께 하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됐고, 더 이상 반려동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켠에서는 반려동물을 늘 생각했던 거 같다. 하지만 강아지에는 관심이 없었고, 안광이 무서운 고양이는 더더욱 관심 밖이었다. 그런 마음에, 일상에 버터가 스며든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빵 같은 내 삶에 버터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존재가 됐다. 다시 태어나도 고양이일 것 같은 버터는 바깥보다 집을 좋아했고, 아주 화가 나지 않는 이상 '냥'이라는 울음소리도 내지 않았다. 뾰족한 손톱은 늘 장전 준비를 했고, 분홍빛 젤리를 만지려면 상처 따윈 영광스러운 자국이었다. 뭣도 모르고 산책용 줄로 동여매고 집 앞을 나갔는데, 지나가는 차소리의 굉포에 놀라 줄행랑을 쳤고, 이대로 영영 다시 못 만날 줄 알았다. 엉엉 울며 다시는 산책 따위는 안 하겠다고 다짐하며 집 근처를 돌아다녔다. 어디선가 '냐'라고 우는 버터의 울음을 들었다. 소리를 따라간 곳은 차 안이었다. 웅크린 채로 눈만 반짝이며 잔뜩 겁에 질려 있었던 버터는 이리 오라는 손짓에도 꼼짝하지 않았다. 차 주인이 나타나 출발해 버리면 어쩌나 손발이 떨렸지만 버터의 근처에 간신히 다다를 수 있었다. 그 뒤로는 버터는 집에서만 있는다. 집에서도 버터의 방에서만 지낸다. 가끔 손톱을 다듬는 것처럼 문을 긁기는 했지만, 워낙 작고 또 소심한 성격이라 몸동작도 기민했다.


인간도 여성은 '자궁' 때문에 고통받는다고 했는데 고양이도 마찬가지였다. 중성화 수술은 인간 편하라고 하는 이기적인 행위라는 것은 이성적으로 알고는 있지만, 밤새 우는 버터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이 중성화 수술을 결정했다. 수컷고양이는 비교적 수술이 수월하다고 하나, 암컷은 달랐다. 개복을 하고 자궁을 드러내는 대수술이다. 이게 맞는 결정인지, 누굴 위한 것인지 버터가 수술대에 오를 때까지 오만가지 생각이 머리를 덮었다. 고양이를 위한 결정이라고 잘한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결국은 사람의 결정이기에 미안했고 또 미안했다. 수술을 마친 버터의 배는 이전보다 반으로 줄어들어 있었고, 입맛이 없는지 물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날 저녁, 엄마와 버터, 나 셋이 껴안고 펑펑 울었다. 고양이로 태어나 어쩔 수 없는 결정을 받아들여야 하는 버터의 상황, 그리고 같은 여자이기에 더 큰 고통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점이 우리를 더욱 슬프게 했다. 사람과 고양이지만, 여자라는 공통분모가 그 순간은 우리를 더 슬프게 만들었다.


버터 혼자서 지내다가 식빵이와 같이 지내게 됐다. 식빵이는 집 앞에서 며칠을 울던 길냥이로, 태어난 지 3주 정도 된 상태에서 냥줍을 하게 됐다. 버터 혼자 지내는 것도 쓸쓸해 보였고, 혼자 밤새도록 우는 식빵이의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버터의 새끼로 보일 정도로 작던 식빵이는 그동안 못 먹었던 설움 때문인지 엄청난 식탐을 자랑했다.


버터의 밥까지 탐냈고, 버터는 힘들어했다. 고양이들 간의 서열 때문인지, 동생이라고 생각한 심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버터는 늘 식빵이가 먹을 만큼의 사료나 간식을 남겼다. 우리 가족은 그런 모습을 보고 늘 대견하다고 생각했다. 버터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하-악질을 해대는 버터보다, 사람을 좋아하고 무릎에서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는 식빵이는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었고, 모든 추억이 식빵이와 함께 한 시간으로 채워졌다. 버터는 늘 조용하고, 얌전하게 자기 자리에 있었다. 잘 울지 않고, 밥을 남기고, 가끔 벽이나 종이를 긁는 행위 외에는 달리 움직임이 없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고, 늘 그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버터의 작은 변화가 한눈에 들어왔다. 밥을 더 남기고, 호기심 어린 반짝거리는 눈에 빛이 사라졌다. 기운이 없고, 잘 걷지도, 점프도 하지 못했다. 급하게 동물병원에 가보니 심각한 상태라고 했다. 간이 좋지 않다며 오늘 저녁에 무지개다리를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상태라고 했다. 눈물이 났다. 왜 이렇게 됐지. 스트레스 때문인가. 호기심에 베란다에 날아든 양파 껍질이라도 먹은 걸까. 하지만 검사를 했지만 간수치 외에는 문제점이 없었다. 황달도 심했고, 잇몸도 하얬다. 철분이 부족한 상태라고 했다. 영양제를 맞추고, 좋아하는 츄르도 먹이고, 상태를 지켜봤다. 병원에서 하루를 더 지켜보기로 하고 울면서 집에 왔다. 마음이 착잡했다. 미안한 마음과 내일 가면 어떤 상태일지 걱정이 돼 전화를 수시로 걸어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마음이 놓였다. 오빠와 함께 버터를 보러 갔다. 오빠는 버터 보호자라고 덥수룩하게 기른 머리를 손질하고 가는 정성을 보였다. 그게 정말 사랑같이 느껴졌다. 버터는 그런 오빠를 몰라봤을까. 아니면 바로 오지 않고 하루 지나고 온 서운함일까. 오빠를 보자마자 손톱을 내밀어 할퀴었다. 근데 오빠와 미소 지었다. '정신 차렸구나'라는 생각에 정말 우리 버터 같았다. 버터는 3일 정도 있다가 퇴원해 집에 왔다. 예전처럼 많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사료 양이 늘었고 곧잘 먹었다. 간에 좋은 약을 인터넷으로 주문해서 먹였지만 자꾸 먹지 않고 피해 사료만 주기로 했다. 약 1년이 지나도록 버터는 예전처럼 지냈다. 밥도 잘 먹고 호기심도 많았다. 불빛이 들어오거나 무언가 움직이는 것에 재빨리 반응했다. 눈만 동그래지는 식빵과는 다른 '찐' 고양이 습성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작년 11월. 버터는 다시 밥을 먹지 않았다. 불안이 엄습했다. 작년 병원에서 한 번 더 이런 상황이 오면 정말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것이 좋다는 수의사의 말이 떠올랐다. 그날, 병원에 가야 했다. 하지만 왠지 내일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사기로 으깬 사료와 물을 줬다. 눈에서 빛이 났다. 작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사료를 주니까 먹었고, 기운을 차리는 거 같았다. 내일 쉬는 날이니까 병원 가보자. 주사기로 물을 주고, 눈을 마주치고 저녁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게 버터와의 마지막이었다.


차가웠다. 단단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눈을 감지 못했다. 믿어지지 않았다. 내일로 미룬 내가 원망스러웠다. 퇴사를 해서라도 병원에 갔어야 했다. 하지만 이미 버터는 무지개다리를 건너고 있었다. 장례를 치르러 가서 들으니 노환 때문이라고 했다. 13살이면 오래 산 거라고. 너무 추운 날씨였다. 얼마나 추웠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같이 잘 걸. 따뜻하게 해 줄걸. 어제 병원에 갔으면 달라졌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두 마리 키우기가 버거운 날도 있었다. 화장실 청소, 사료 챙겨주기, 놀아주기, 어느 하나 제대로 제때 해준 게 없는 거 같았다. 친구네로 보낼까 잠시 생각해 본 적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늘, 거기 그 자리에 버터가 있었기에 그 자체만으로 든든했고, 소중했고 사랑스러웠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도 작은 소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잘 놀던 버터다. 장례는 순식간에 끝났다. 울고 울고 울다 보니 빗자루로 뼛가루를 담아 쓰레받기에 담는 모습을 보여줬다. 뼛가루와 쓰레받기, 빗자루의 조합이 이질적이었다. 그리고 작은 스톤 몇 덩어리가 됐다. 어제만 해도 물을 받아먹던 버터였는데 말이다. 생각지 못한 일이 한순간에 벌어졌고, 집은 너무나 적막했다. 울지도 않고 늘 조용한 버터의 빈자리가 이렇게 클 수 있을까. 버터는 지금쯤 무지개 끝자락즈음에 닿았을까. 그 끝은 어떨까. 춥진 않을까. 좋아하던 츄르는 있을까. 적어도 춥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언젠가 다시 만나는 날이 온다면 그땐 더 반갑게 인사하고 꼭 껴안아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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