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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II제이 Dec 16. 2024

'리바이어던'을 보는 욥과 나

(2024년 12월 중순의 순간) 쓰면 쓸수록 부족해 보이는.

'리바이어던’은 성경 욥기에 등장하는, 거대하고 막강한 힘을 가진 존재다. 현대에 이것은 ‘국가’나 ‘국가적 통치자’의 상징물로 이해되고 있는데, 유명한 철학자인 토마스 홉스가 국가권력에 대해서 쓴 책인 <<리바이어던>>에서 비유로 이것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리바이어던’이 등장하는 맥락은 아무 잘못 없이 고통 속에 처한 억울한 인물 ‘욥’이 신에게 항변할 때 신이 인간의 생각과 능력을 뛰어넘는 존재로서의 절대성을 표현하는 부분이다. 신의 창조물인 ‘리바이어던’조차도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데 어찌 창조주인 신의 섭리에 대해 인간이 뭐라 불평할 수 있겠는가 하는 내용이다. 토마스 홉스는 인간이 각자 스스로의 힘을 잘라내어 모아 만들어낸 어떤 절대 권력, 이미 형성된 이후에는 인간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강력한 권한을 가진 존재로서의 ‘국가’라는 개념이 ‘리바이어던’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국가라는 강대한 힘에 한낱 개인이 - 현대에도 - 어떤 영향을 받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지금도 ‘리바이어던’과 함께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욥기>에서 욥은 고통을 당할만한 죄를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욥은 억울하다. 이 생각에 깔려있는 전제는 ‘고통은 죄의 대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제가 참인가? 적어도 성경 <욥기>의 맥락에서는 이 전제가 참이 아니다. 애초 욥기의 시작이 악마가 신에게 욥을 시험하겠다고 하고, 신이 이를 허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욥의 고통은 죄의 대가가 아니다. 그렇지만 욥과 친구들은 공통적으로 이 전제를 참으로 믿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욥은 억울하고, (욥이 뭔가 죄를 지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욥에게 당당히 회개를 요구한다. 적어도 신이 직접 욥에게 무언가 말을 하기 전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신이 욥에게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부분(<욥기> 38장 이하)에서 욥은 신의 목소리를 듣고 이렇게 반응한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욥기> 42장 5절) 상상을 가미해 해석해 보자면, 이 순간에 욥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생각은 ‘귀로 들었던 것’이고, 신의 목소리를 듣는 지금은 ‘직접 뵙는 것’이다. 이것은 그간 자신이 알고 있었던 내용과 무언가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의 반응이 아닐까. 이 생각의 변화는 욥이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욥은 ‘고통이 죄의 대가이다’라는 관점에서 벗어난다. 그것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신의 섭리 안에 있다는 것,  즉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자는 의견은 어쩌면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으로, 혹은 너무 염세적인 관점으로 보일 수 있다. 또한 책임을 회피하거나 현실에 타협하는 무책임한 발상이라고 비판할 여지도 있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면, 고민도 그에 따른 결단도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신의 섭리를 인정하며 주변의 일들을 바라보는 것은, 일어난 모든 것이 신의 뜻이니 무조건 받아들이고 다른 아무것도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보는 것과는 다르다. 많은 것이 지나간 후가 아닌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욥의 입장에서, 알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는 그 순간에) 어떤 것은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상태로 나와 주변을 바라보는 일은 절망의 벽일까 아니면 희망의 틈일까. 나 혹은 주변에 보이는 모든 성공이 응당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 마찬가지로 나와 주변에 일어나는 모든 불행이 인과응보처럼 분명한 원인이 나에게 내재된 당연한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어떤 출구로서 작용할 수 있지는 않은가 생각해 보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후에는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리고 보이게 될 것이다. 미래의 나를 불러 지금의 나에게 조언을 부탁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우리에게 그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욥기>의 결말을 이미 본 우리가 아직 알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 과거의 욥에게 “결국 이렇게 될 것이니 지금 잘 견디어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일 수 있다. 지금의 고통이 과거의 결과물이 아닐 수 있듯, 지금의 고통이 미래의 어떤 것을 담보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물론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다만 지금 여기에서 그걸 확신할 수 없다는 것만이 확실하다.) 다만, 처음부터 욥이 자신의 손으로는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있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다시 한번,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이라기보다는 ‘이루기 위해 무리하게 선을 넘어가지 말라’는 쪽에 가깝다. 그 경계가 불분명하다는 것, 그래서 어쩌면 비겁해 보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어떤 영역이 내 손 밖에 있음을 인정하자는 것을, 그리고 그 경계가 어디까지인지에 대해서 탐색하고 경계하는 것도 놓치지 말자는 것이다. 욥의 입장에 대입해 보면 알 수 없는 고통의 순간에, 그 고통에 대하여 가만히 받아들이기만 해야 한다는 것이라기보다는 원인 모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을 찾되, (욥의 관점에서 결국은 그 고통의 원인이 신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에) 신에게 부탁하는 것을 넘어서 신을 비난하는 것까지는 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을 비난하기 시작하는 지점이 자신도 세계에 대해 어떤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생각으로 일종의 경계를 넘어가는 지점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진행시키다가 나를 돌아본다. 우선 나는 할 수 있는 것을 충분히, 성실히 찾아왔는가? 어떤 고통의 원인이 신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수준에까지 이르기 위해 무언가를 - 악을 피하면서 - 진행시켜 왔는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뭔가를 더 할 수 있었을 것 같고, 또 무언가를 더 할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둘째로, 나는 욥보다 더 정의로운가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다. 나를 괴롭게 하는 그들은 사탄보다 더 악한가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주제를 넘지 않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비난, 비방하지 말고 관찰한 후 자신의 내면으로 눈으로 돌려 나의 어떤 욕구가 충족되지 않았는가를 살펴보고 외부를 향해 부탁을 해 나가자’는, 인간인 우리가 모두 공유될 수 있는 공통의 욕구를 지닌 존재라는 점에 기대어 행동지침을 제안하는 ‘비폭력대화’의 관점이 떠오른다. 지금은 이런 관점이 나이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 제목의 이미지는 위키백과사전의 '리바이어던' 항목에 있는 이미지를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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