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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러기 Feb 03. 2022

세련된 맞춤법

첫사랑

1.


“까만 뿔테 안경을 쓰고 공부 잘하고 숙맥인 문과 모범생. 나랑 완전 정반대인 그런 사람” 내가 원했던 소개팅 상대의 조건이었지만 실제로 내 앞에 그런 사람이 앉아있으니 당황스러웠다. 한창 사춘기로 엇나가고 있던 나였지만 그 앞에서는 나도 방황하지 않고 공부 열심히 하는 여고생인 체했다.


그렇게 고3을 올라가는 1년 선배를 사귀게 되었고 1년 동안 나는 수험생인 남자 친구를 알뜰히 챙기는 여자 친구가 되었다. 내 야자를 튀고 집에 가서 도시락을 싸서 저녁 시간에 그의 학교 앞에서 기다려 도시락을 전해주고, 매일매일 좋은 글을 베껴 손편지를 써서 친구 편에 전했다. 매달 찾아오는 모든 day들, 사귄 지 며칠 이런 기념일, 수능 100일 전, 며칠 전, 이런 날까지 용돈을 탈탈 털어 선물을 보냈다. 나는 순진하고 순수하고 심지어 순종적이기까진 한 여자 친구로 보이고 싶었다.



2.


가끔 서울에서 오는, 우리 동네에서는 구하기 힘들 것 같은 외제 사탕이나 초콜릿이 가득한 커다란 소포는 내게 행복이었지만 인터넷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니 대학생이 된 남자 친구와 연락하기 쉽지 않았다.


드디어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방학이 되어 남자 친구를 만날 수 있었다.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고, 콘서트에서 샀다는 DJ. DOC 티셔츠를 입고 머리 모양이 바뀐 오빠는 너무나도 세련되어 보였고 그가 들려주는 대학생활 이야기, 서울 이야기는 너무나 멋지게만 들렸다.


“이화여대 앞에 기찻길이 있는데 그 기찻길 위를 지나는 다리가 있어. 기차가 딱 지나갈 때 거기를 이대생과 지나가면 사랑이 이루어진대. 나도 건너봤는데 신기하더라”


오빠는 나에게 위트 있고 세련되게 본인이 이대생과 사랑에 빠졌음을, 나에게 그래서 헤어져야 한다고 말하려 했었지만, 나는 저 말이 여자 친구가 생겼다는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우와. 그런 곳이 있어? 신기하다.”라고 대답한 나에게 그는 당황해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했고 우리는 의미 없는 대화를 몇십 분 더 이어나갔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서야 그는 서울에서 여자 친구를 사귀었으니 헤어지자고 말했다. 집에 돌아와 펑펑 울며 그 기찻길 다리 이야기가 그런 이야기였구나를 깨달았고, 오빠의 세련된 헤어지자는 말을 못 알아들은 나의 촌스러움이 부끄러워 더 크게 울었다.



3,


몇 년 후 군대 가기 전에 그가 나의 고향집에 전화해 내 전화번호를 물어 한 번인가 통화한 적이 있었지만 그 뒤 단 한 번도 그를 고향에서도 서울에서도 우연이라도 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15년도 더 지난 후에 지하철에서, 심지어 꽤나 멀리 서있던, 눈 마주친 남자가 그라는 것도, 우리가 서로를 알아봤단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난 놀라서 눈을 피했지만 그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진짜 너구나. 나 누군지 알지?”


“아.. 예, 예...”


왜 하필 이럴 때에 마주친단 말인가? 회사를 때려치우고 방바닥을 뒹굴고 있다가 선배가 술 사준다는 말에 기뻐하며 아무거나 걸쳐 입고 맨얼굴로 선배 회사 앞을 찾아가는 중이었다. 15년 만에 슈트를 멀끔히 입고 있는 첫사랑을 만나기에는 너무나 적절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머나, 반갑다. 어떻게 지내? 어디 가는 길이야? 난 잠깐 여기 회의가 있어서, 와! 멀리서 봐도 넌지 딱 알겠더라고. 넌 나 못 알아봤어? 아 잠깐 커피라도 한 잔 하고 싶은데 회의시간에 딱 맞추어 나오는 바람에... 명함 좀 줘봐. 우리 꼭 다시 만나자.”


“아.. 저기 제가 명함을 안 가져와서...”


백수가 명함이 어딨나? 당황스러웠다.


“아 나 지금 내려야 해서... 이거 내 명함이야. 꼭 연락해. 꼭~!”


그가 내린 다음에야 손에 쥐여준 명함을 보았다. 그는 유명 신문사의 기자였다. 헤어진 그날처럼 세련된 그 앞에서 내가 촌스럽게만 느껴졌지만. 명함을 구겨 휴지통에 버리면서 난 ‘쿨하니까’라고 되뇌었다.



4.


5개월간의 인도 여행을 떠나기 전날이었다. 친구들이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며 자리를 마련해 술 한잔 하고 있는 자리였다. 전화를 받았는데 주위가 소란스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너야? 너 맞아? 와 아직도 이 번호를 쓰고 있어?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연락해볼걸”


발신인을 확인했지만 모르는 번호였다.


“설마 했는데... 아직도 이 번호를 쓰다니, 나 ○○이야. 왜 연락 안 했어?”


첫사랑이었다. 나는 핸드폰을 개통한 뒤로 번호를 단 한 번도 바꾼 적이 없었다.


“아아.. 네... 죄송해요.”


“주위가 시끄럽네. 친구들이랑 있어?”


“네.. 제가 내일 여행을 좀 길게 떠나서...”


“아, 그렇구나. 재밌게 놀아.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고 한참 뒤 그에게 메시지가 왔다. 나와 참 좋은 추억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지내는지 종종 궁금했었다며, 그렇게 우연히 보게 되어 참 좋았고 “우리 꼭 편하게 한 번 보자!”라는 여전히 참 세련된 그였다.



5.


인도 여행 내내 어떻게 답장을 보낼지 고민했다. 나도 세련되게 ‘편하게 보자’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기자라는 그에게 보내는 메시지라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영 신경 쓰였다. 메시지에 불과하지만 난 세련되게 잘 쓴 글을 보내고 싶었다. 문장 호응이 틀리진 않는지, 비문은 아닌지 모든 것이 걱정이었다. 나는 답장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인도의 어느 도시에서 나와 동갑내기 한국인 부부를 만났다. 숙소에서 술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들이 모두 기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와. 요즘 내가 기자를 많이 만나게 되는데’ 라며 첫사랑을 우연히 만났는데 기자였다는 이야기를 했다. 정말 세련되게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데 내 메시지 교정 좀 봐달라고 부탁했다. 기자들이라고 그런 거 신경 쓰지 않는다며, 어쩌면 기자들이 맞춤법 더 모를 거라며 웃었다. 한참을 깔깔거리다가 아내가 본인이 아는 사람인 거 아니냐며 그의 이름을 물었다. 남편이 아내에게 우리나라 기자 다 아냐며 핀잔을 주었다. 나도 그 말에 동조했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게 이름을 말했다.


일순간 정적이 되었다. “혹시 △△뉴스 ◌◌◌?” 그는 남편의 현 직장동료이자, 아내와는 전 직장동료였다. 심지어 아내는 그가 처음 입사했을 때 1년을 데리고 다니며 하나하나 가르쳤던 사수였단다. 세상은 이렇게 좁다.



6.


휴직을 하고 세계여행 중이던 부부는 나보다 6개월쯤 후에 귀국했다. 그사이 나는 아마존으로 파견을 가는 것이 결정되어 출국을 보름쯤 앞둔 때였다. 건강한 귀국과 출국을 축하하고 기원하며 함께 술자리를 나눴다.


“아참, ◌◌◌에겐 그래서 메시지 보냈어?”


잊어버리고 있었다. 나의 첫사랑. 그들과 헤어진 뒤로 여행도 스펙터클했고, 한국에 와서 아마존을 가게 되는 상황도 그랬다. 며칠쯤 더 어떻게 메시지를 보낼까 고민하다 그 뒤로는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우리 이러지 말고 ◌◌◌ 한 번 보자, 지금”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불러내는 것이 가능하냐고 물었더니 기자들 기강 잡기도 만만치 않아서 사수가 부르면 언제 어디서나 달려와야 한단다. 남편이 아마 아직 야근 중일 거라는 말도 덧붙였다.



7.


아무런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나온 그는 깜짝 놀라 했지만, 생각보다 술자리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와 나는 오랜만에 만난 사이라기보다는, 부부를 각각 알아 한자리에 앉은, 서로 모르는 사이지만 금방 친해진 사이 같았다. 기자 부부의 세계여행 이야기는 정말 재미있어서 술자리가 길어져 새벽 3시쯤에야 끝났다. 약간 취한 부부를 먼저 택시 태워 보내고 우린 조금 걸었다.


“왜 연락 안 했어?”


“그냥 여행하다가 보니까 연락이 쉽지 않았어요.”


거짓이었지만, 충분히 변명이 되는 상황이었다.


“출국하기 전에 우리 한 번 보자!”


“미안해요. 정말 출국 전에 봐야 할 사람들이 많아서, 약속이 이미 다 잡혀 있어요. 어떻게 약속 조정할 수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충분히 변명이 되는 상황이었다. 다시 연락하겠다는 말은 거짓이었다.



8.


택시를 잡아놓고 한참 실랑이를 벌였다.


“내 카드 가져가서 이걸로 택시비 계산해”


“괜찮아요.”


“오랜만에 만나고, 멀리 떠난다는데 이 시간에 내가 뭐 사 줄 수도 없고 택시비라도 내주고 싶어.”


“괜찮아요. 그리고 이걸 제게 주시면 카드는 어떡하고요?”


“뭐 그 구실로 한 번 더 보면 좋고, 정 안 되면 재발급받으면 되지 뭐”


나는 그가 택시 안으로 던진 카드를 끝내 다시 창밖으로 던지고 창을 닫았다.



9.


그 카드를 받았다면 우리 사이는 달라졌을까?


나는 출국하기 전 날, 맞춤법과 띄어쓰기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그에게 잘 다녀오겠다며 메시지를 보냈다.


아마존에 온 지 2년쯤 후, 그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며 축하해달라고 내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는 세련되게 축하한다는 답장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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