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조커: 폴리 아 되'를 보고
**이 리뷰에는 무지막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조커: 폴리 아 되'(이하 '조커2')의 전편 '조커'는 2019년 개봉 당시 전 세계 흥행 10억 달러를 기록하며 흥행했다. '조커'의 흥행은 도태됐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전 세계적인 호응을 받으며 조커는 그들의 영웅이 됐다. 그리고 '조커2'에서 영웅은 몰락했다.
'조커2'는 2년 전, 세상을 뒤흔들며 고담시 아이콘으로 자리한 아서 플렉(와킨 피닉스 분)은 아캄 수용소에 갇혀 최종 재판을 앞둔 무기력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수용소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리 퀸젤(레이디 가가 분)은 아서의 삶을 다시 뒤바꾸며 그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조커를 깨우고 리 역시 각성하며 자신을 ‘할리 퀸’이라 지칭하며 서로에게 깊이 빠져든다. 아서는 조커와 자신 사이에서 갈등하고 아서의 재판을 중심으로 사건이 진행된다.
'조커2'는 조커로서 저지른 엄청난 범죄와 간극이 있는 삶을 살아가는 아서의 내면을 보여준다. 토드 필립스 감독이 아서의 망상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음악을 선택한다. 어린 시절 학대로 인해 망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아서는 망상 속에서 자신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다. 아서가 리를 처음 만나고 처음 사랑을 느낀 뒤에 감정을 표현한 노래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애틋한 정서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노래가 주는 감동은 그뿐이었다. 호불호 요소 정도라고 보기에는 과할 정도로 노래가 나와서 끊임없이 감상에 방해를 주고 지루하게 느껴진다. 리의 감정에 몰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리가 부르는 노래들은 영화와 전혀 상관없이 느껴질 정도였다. 둘의 사랑을 이야기 대신 노래로 전달하려고 했지만 관객에게 닿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커2'가 실패한 이유는 이야기가 빈약하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주제는 정체성이다. 다른 사람이 좋아해 주는 모습과 자신의 본모습을 아서는 끊임없이 고민한다. 지옥 같은 아캄 수용소에서 나가긴 위해선 아서를 선택해야 하고,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조커를 선택해야 한다. 다만 조커의 삶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 기로에서 아서는 주인공으로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관객은 노래만 하는 아서를 보기 위해 극장에 오지 않았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아서는 당연히 수동적이다. 그는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고 간수들이나 리나 변호사나 재판부에게 끌려 다니기만 한다. 아서는 평생을 피해자와 피착취자로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렇지만 '조커'에서 아서를 본 이들은 그에게서 능동적인 조커를 기대하기 마련이고 이 기대는 철저하게 배신 당한다. 그가 법정에서 조커 분장을 하는 것 역시 능동적인 모습이 아닌 리의 마음에 들기 위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며 이 역시 수동적일 뿐이다. 아서는 재판이 끝날때가 돼서야 자신이 조커가 아닌 아서라고 말하며, 자신이 어머니를 죽였다고 범죄를 고백하며 모든 것을 내려놓는다.
조커가 아닌 아서를 선택한 아서는 비참해진다. 아무도 그의 본모습을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2시간 내내 주고받는 대상 없는 헛된 사랑을 노래한 아서는 리에게는 물론 자신의 추종자들에게도 처참하게 버림을 받는다. 결국 아서는 아서 그 자신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 없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고 또 다른 조커처럼 보이는 이에게 죽임을 당하며 영화가 끝이 난다.
'조커'에서 아서는 살인이라는 행동을 선택하면서 조커로 각성하고 스스로 행복해진다. 살인을 통해 망상이 아닌 현실을 깨닫고 자신의 삶을 선택하는 능동적인 인물로 탄생했다. 그는 자신을 속이며 망상 속에 살게 한 어머니를 죽였고, 자신의 꿈을 조롱하고 비웃는 사회를 상징하는 머레이를 죽이면서 자신의 뜻대로 살아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다만 그 방식이 범죄였을 뿐이다. 영화라는 허구의 세계에서 조커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대리만족 시켜줬다.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착취자와 피착취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다. 피착취자들이 이를 깨닫고 인지를 할수록 자본주의 사회에 반하는 행동을 하게 된다. 한국 사회 역시도 청년들의 거센 반항에 부딪치며 위기라고 외치고 있다.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을 '배려' 하지 않는다. 짐승에게 먹이를 던져주듯이 '호의'를 베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살아간다.
착취자들은 피착취자들을 끊임없이 위기로 내몰면서 그들을 갈라치며 싸우게 만든다. 피착취자들의 깨달음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피착취자들의 반항을 구속하고 억압하는 법과 제도를 만든다. 서서히 이에 굴복한 루저들은 사회의 모순을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원인을 알 수 없는 분노를 쌓아가며 살아간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영화가 '조커'였다. 아서는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외면받고 학대받았기 때문에 조커가 된 것이라고 외치며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며 루저들의 마음을 알아줬다. 조커의 살인이나 폭력이 정당하다고 외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영화는 환상이며 망상이며 거짓이다. 영화의 세계에서나마 루저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것은 불법도 아니며, 영화에 영향받아 범죄를 저지르는 이들은 영화를 핑계 삼아 자신의 더러운 욕망을 실현하는 범죄자일 뿐이다.
'조커2'에서 토드 필립스는 피착취자들의 분노를 외면하고 그들의 분노가 모두 헛된 망상이며 남들에게 보이는 모습이 아닌 자신의 모습으로 살지 않으면 결국 모두에게 외면받고 쓸쓸하게 죽어갈 것이라고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메시지를 흥겨운 노래로 포장해서 내놨다. 토드 필립스는 만족했을 것이다. 그는 흥행작 '조커'를 만들었고, 루저들에게 깨달음을 준 '조커2'를 만든 감독으로 계속해서 잘 먹고 잘 살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로 잠시나마 위로받았던 루저들의 황망한 마음은 누가 어루만져 줘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