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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념있는 희애씨 Apr 12. 2022

좀 더 일찍 다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파트 1. 포기당하다

2010, 내가 스무 살 대학교 새내기가 돼서 캠퍼스를 누릴 때쯤 엄마는 장애 등급 판정을 받았다.  덕택에 (‘덕택’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게 적절할까, 한참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엄마가 다치고 나서 ‘차상위계층이었던 우리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 선정됐다. 기존의 지원보다 배는  많은 복지혜택이 따라왔다. 엄마의 손과 맞바꾼 것치고는 보잘것없는 지원이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크게 없었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건 휴대폰 요금이 1만 원 정도 저렴해졌다는 것 정도? 가장 큰 체감은 동생의 대학입시 원서를 넣을 때였다.


동생은 나처럼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수시 지원에서 손해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일과 후에는 동생이 수시로 유리하게 넣을  있는 전형을 찾는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1  내가 원서를  때와는 다르게 ‘기초생활수급자 돼서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원서를 넣을  있었다. 물론 사회배려자 전형은 공석이 1-2자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였다. 오히려  불리해지거나 혹은 눈치싸움에 성공해서 수월하게 합격하거나. 뭐, 인생이 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기왕 다칠 거, 좀 더 일찍 다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엄마의 그 말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언젠가 다칠 운명이었다면 1년 더 빨리 다쳐서 나 역시 대학입시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해졌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고, 모두가 잠든 기숙사 방에서 동생의 자기소개서를 수정해주면서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일곱 글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10년이 지나고 기혼자가  나는 아직 아이가 없다. 만약 아이가 생기고 내가 엄마가 된다면, 과연 나의 모성애는 ‘내가   일찍 다쳤더라면이라는 말을 내뱉을  있는 정도의 크기가 될까?  오른손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식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내가 과연 죽기 전까지 오롯이 이해할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사실 나는 아이 생각에 있어서는 메말라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엄마처럼은    같아.’라는 뭐라 형용할  없는 되뇜이 나에게 잠재돼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 동생은 결국 정시로   있는 대학보다  괜찮은 학교로 진학했다. 사회배려자 전형에 의외로 많은 인원이 몰려서 오히려 불리할  있는 상황이었지만, 면접을   봤다고 한다. 어릴  맨날 난센스 퀴즈 책만 주구장창보기에 같은 어린이인 


“넌 맨날 그런 거만 보냐?”


라면서 훈수를 두곤 했는데. 이게 웬걸. 어릴  봤던 난센스 퍼즐 문제가 면접에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똑같이. 세상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거구나. 그 면접에서 그 질문이 나올 줄, 그리고 그 순간 까마득히 예전히 본 책의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해낼 줄 누가 알았을까. 동생을 보면서 깨달았다. 물론 지금도 내가 자기소개서를 멋들어지게 써준 덕분이라고 생색을 내고 있지만,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노란색 난센스 퀴즈 책이 아니었다면 이뤄낼  있는 결실이었을까 의문이다.


엄마의 상처도 10년이 지나면서  아물었다. 지금도 오른손은 제 몫을 100% 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온통 실밥 자국에 성치 않은 손톱 때문인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포개어서 가리고 다니는 것이 엄마의 습관이 됐지만, 괜찮다.  괜찮다. 추운 겨울에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엄마의 오른 ‘팔’이 아닌 ‘손’이라는 것 만으로 다 되었다.


기왕 다칠 거였다면,   늦게 다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음을 다해  안아줄  있는 어른이 됐을  그런 아픔이 찾아왔더라면  쓰라렸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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