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트 1. 포기당하다
2010년, 내가 스무 살 대학교 새내기가 돼서 캠퍼스를 누릴 때쯤 엄마는 장애 등급 판정을 받았다. 그 덕택에 (‘덕택’이라는 단어를 이럴 때 쓰는 게 적절할까, 한참을 썼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다.) 엄마가 다치고 나서 ‘차상위계층’이었던 우리 가족은 ‘기초생활수급자’로 선정됐다. 기존의 지원보다 배는 더 많은 복지혜택이 따라왔다. 엄마의 손과 맞바꾼 것치고는 보잘것없는 지원이었다.
일상에서 우리에게 달라진 것은 크게 없었다.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건 휴대폰 요금이 1만 원 정도 저렴해졌다는 것 정도? 가장 큰 체감은 동생의 대학입시 원서를 넣을 때였다.
동생은 나처럼 ‘지방에 있는 고등학교’ 출신이라는 이유로 수시 지원에서 손해를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해 가을, 일과 후에는 동생이 수시로 유리하게 넣을 수 있는 전형을 찾는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1년 전 내가 원서를 쓸 때와는 다르게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서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원서를 넣을 수 있었다. 물론 사회배려자 전형은 공석이 1-2자리 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모 아니면 도였다. 오히려 더 불리해지거나 혹은 눈치싸움에 성공해서 수월하게 합격하거나. 뭐, 인생이 다 그런 거 같기도 하고.
“기왕 다칠 거, 좀 더 일찍 다쳤으면 좋았을 텐데”
그날 휴대폰을 통해 들려온 엄마의 그 말은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언젠가 다칠 운명이었다면 1년 더 빨리 다쳐서 나 역시 대학입시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해졌으면 좋았을 거라는 거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며 퉁명스럽게 전화를 끊고, 모두가 잠든 기숙사 방에서 동생의 자기소개서를 수정해주면서 ‘기초생활수급자’라는 일곱 글자를 한참 동안 들여다봤다.
10년이 지나고 기혼자가 된 나는 아직 아이가 없다. 만약 아이가 생기고 내가 엄마가 된다면, 과연 나의 모성애는 ‘내가 좀 더 일찍 다쳤더라면’이라는 말을 내뱉을 수 있는 정도의 크기가 될까? 내 오른손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그 마음은 어떤 모양일까. 내가 과연 죽기 전까지 오롯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다. 사실 나는 아이 생각에 있어서는 메말라있는 사람이다. 어쩌면 ‘엄마처럼은 못 할 것 같아.’라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되뇜이 나에게 잠재돼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 동생은 결국 정시로 갈 수 있는 대학보다 더 괜찮은 학교로 진학했다. 사회배려자 전형에 의외로 많은 인원이 몰려서 오히려 불리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면접을 꽤 잘 봤다고 한다. 어릴 적 맨날 난센스 퀴즈 책만 주구장창보기에 같은 어린이인 내는
“넌 맨날 그런 거만 보냐?”
라면서 훈수를 두곤 했는데. 이게 웬걸. 어릴 적 봤던 난센스 퍼즐 문제가 면접에 나왔다고 한다. 심지어 똑같이. 세상이 어떻게 풀릴지 모르는 거구나. 그 면접에서 그 질문이 나올 줄, 그리고 그 순간 까마득히 예전히 본 책의 내용을 선명하게 기억해낼 줄 누가 알았을까. 동생을 보면서 깨달았다. 물론 지금도 내가 자기소개서를 멋들어지게 써준 덕분이라고 생색을 내고 있지만, 늘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그 노란색 난센스 퀴즈 책이 아니었다면 이뤄낼 수 있는 결실이었을까 의문이다.
엄마의 상처도 10년이 지나면서 꽤 아물었다. 지금도 오른손은 제 몫을 100% 해내고 있지 못하고 있지만, 온통 실밥 자국에 성치 않은 손톱 때문인지 왼손으로 오른손을 포개어서 가리고 다니는 것이 엄마의 습관이 됐지만, 괜찮다. 다 괜찮다. 추운 겨울에 내가 잡을 수 있는 것이 엄마의 오른 ‘팔’이 아닌 ‘손’이라는 것 만으로 다 되었다.
기왕 다칠 거였다면, 좀 더 늦게 다쳤더라면 좋았을 텐데. 온 마음을 다해 꼭 안아줄 수 있는 어른이 됐을 때 그런 아픔이 찾아왔더라면 덜 쓰라렸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