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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개념있는 희애씨 Aug 10. 2022

옛날 옛적에, 포기를 잘하던 소녀가 살았어요.

파트 3. 포기, 하시겠습니까?


1억. 성공신화를 얘기하는 TV 프로그램에서 빠질 수 없는 단골 단어다. 2021년도에는 상상 저 너머의 1억이라는 임계점을 넘어서면서, 내가 손에서 놓아야만 했던 것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포기는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지.’라고 포기를 금기시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죽이 될지 밥이 될지는 모르지만 ‘일단 고!’를 해야 된다는 압박이었다. 하지만 냉혹한 현실에서, 그중에서도 차가운 가난 앞에서 포기를 해야 하는 순간은 “안녕하세요!”를 내뱉는 것만큼 자주 찾아온다. 어느 날은 포기를 당했고, 또 어느 날에는 자발적으로 포기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했고 이제는 스스로에게 포기를 할 것이냐고 묻고 있다.


옛날 옛적, 포기를 아주 가까이에 하던 소녀. 기초생활 수급자였던 소녀는 나이 앞자리에 ‘3’을 달면서 프리랜서, N 잡러, 방송인, 작가, 1억 연봉 같은 화려한 수식어를 곁에 두게 됐다. 실제로는 아무도 나에게 그 비결이 무엇인 것 같냐고 물어보지 않지만, 자문자답을 하자면 어느 날 몸을 실었던 택시 기사님이 하신 말씀을 빌어본다.


“결핍을 아는 사람은 열심히 살아요. 내 부모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돈이 없다는 건 얼마나 차갑고 손 끝이 아린 건지 알고 있으니까 또 그 순간을 마주하고 싶지 않은 거죠.” 넉넉하다고 표현할 수는 없겠지만, 자신이 도로 위를 줄기 차게 달린 덕분에 당신의 자식들은 결핍을 모르고 살았다. 그 자식들은 내일에 대한 걱정도 없는지 무슨 시험 준비를 한다며 집에서 놀고 있다며 푸념을 늘어놓다가 나온 말이었다.


나는 스스로가 태생적으로 프로열씸러의 DNA를 갖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여기면서 살아왔다. 그런데 택시 기사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고 부정한다. 포기를 해 본 사람은 결핍을 느끼기 마련이고, 그 결핍은 물 밑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서 쉼 없이 다리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


급식비를 내지 못한다는 것은 부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불편했다. 하고 싶은 것이 생기면 수중의 돈 크기부터 가늠한 것은 당연한 일상이었다. 지금도 그 습관은 불쑥불쑥 튀어나와서, 목이 말라서 5천 원짜리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마실까 싶을 때도 잠시 잠깐 지갑이 열리는 걸 멈칫하게 만든다. 멈칫한다는 거지 마시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설령 조금 더 저렴한 편의점 커피를 마실지언정.


30년 가까이 혼자서 연년생 딸과 아들을 책임졌던 엄마는 종종 분위기에 취해서, 자신의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음을 확인받고자 한다. “부모가 양 쪽 다 있는 애들만큼 아니더라도, 크게 못해준 건 없었지?”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을 때 이따금씩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이라는 물음표를 그려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이어지는 ‘그때도 과연 지금만큼 쉬지 않고 달려올 수 있었을까?’라는 물음표까지 그려보고 나면 “당연하지.”라는 말이 자신 있게 입 밖으로 비집고 나온다. 사실 정확하게 짚고 가자면 그 어떤 가정보다 더 밀도 있는 지원과 보살핌이었다.


포기는 나에게 생채기를 만들었고

그 생채기는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연료가 됐다.

앞으로도 포기하겠는가, 라는 질문에는

그렇다.라는 답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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