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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베짱이J Jun 22. 2023

#25 두 여자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오정희입니다.”


여자가 말한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몸짓에 종합병원 접수창구의 직원도 덩달아 목례한다. 여자는 동그란 보라색 모자를 썼고 그보다 한 톤 다운된 실크 스카프를 둘렀다. 작은 발엔 부드러운 가죽으로 만든 모카신이, 푸른 핏줄이 비치는 손엔 핸드백이 앙증맞게 걸려 있다. 옆에 있던 50대 후반의 파마머리 여성은 지친 기색이다. 아침 일곱 시 반밖에 안 됐는데도 다른 데서 호되게 시달리고 온 사람같다. 직원은 자기도 모르게 모자 여자와 파마머리 여자라고 속으로 명명한다.


대기석에 앉자마자 모자 여자는 로비를 두리번거린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옷 사입는 걸 좋아했다. 장보러 나가면 의류 코너에서 오래 머물렀고 새로 산 옷은 집에 오자마자 입어봐야 직성이 풀렸다. 외출 전 한참 동안 매무새를 살피고 있으면 가족들은 거울공주라며 놀렸다. 지금도 그녀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찬찬히 훑는다. 마음에 드는 옷을 입은 사람을 발견하면 파마머리 여자게 저 옷 참 맘에 든다고 소근거린다.


파마머리 여자는 옷에 관심 가져 본 적 없다. 옷보단 늘 현실적인 문제들이 우선이었다. 예컨대 이틀이 지나도 연락에 답하지 않는 큰오빠같은 것. “나도 이제 환갑이 넘었어”, 오빠는 말했다. “우리도 할 만큼 하지 않았니?” 파마머리 여자는 오빠가 대체 뭘 했다는 건지 알 수 없다. 오빠 부부가 맞벌이하는 동안 엄마는 세 조카를 키웠고 아들 부부의 식사와 빨래, 청소를 도맡아 했다. 아들 가족끼리만 여행가도 혼자 남아 집을 지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엄마의 짐을 치우겠다니? 방을 줄여 이사가겠다니?


“아줌마,”


모자 여자가 파마머리 여자를 툭툭 친다.


“우리 아들은 언제 와?”


파마머리 여자는 모자 여자를 물끄러미 본다. 그녀는 안다. 이제 엄마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나이 서른 셋에 얻었던 귀한 고명딸은 기억 속에서 지워져, 자신을 돌봐주는 간병인으로만 남았다는 걸. 모자 여자의 기억에 남은 건 육십 여 년을 함께 산 큰아들 뿐이다. “할머니, 종일 모자 쓰고 있었어.” 파마머리 여자의 딸이 하룻동안 모자 여자를 돌보고 난 뒤 말했다. “지팡이랑 구두도 꺼내 신고, 외삼촌 찾으러 가겠다고 했어. 옷은 잠옷 그대론데.” 다음날 손녀가 현관 앞에 야트막한 울타리를 설치하는 동안 모자 여자는 여전히 모자를 쓴 채로 엉거주춤 보행기를 짚고 서 있었다.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오정희입니다.” 설치를 마친 손녀가 일어났을 때 모자 여자가 말했다. “저 집에 좀 갈게요. 아들이 기다려요.”


파마머리 여자는 아무 대답 없이 모자 여자의 손등을 쓰다듬는다. 모자 여자는 모든 걸 잊었지만 파마머리 여자는 기억한다. 자기가 사고 싶은 옷이 있어도 참고 어린 딸의 원피스를 사주던 오십 여년 전의 엄마를. 거울 앞에서 야무지게 머리를 땋아준 후 이마에 입맞춤해주던 엄마를. 소독약 냄새가 나는 로비가 순간 희부얘진다. 파마머리 여자가 부산하게 눈을 깜빡인다.


“왜 울어?”


고개를 든다. 뺨 위로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모자 여자가, 엄마가, 조용히 내려다보고 있다.


 “울지마, 우리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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