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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Dec 03. 2018

빛과 어둠은 항상 함께니, 빛도 어둠도 인간의 선택

뮤지컬 <더데빌> 후기

신과 악마, 그들은 정말 실존하는가. 친구를 따라, 가족들을 따라 집 앞의 큰 교회를 나가던 때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신의 존재에 대해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그날부로 무신론자가 되었다. 이유는 간단명료했다. 신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고,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이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성인이 된 지금의 필자는 여전히 무신론자이다. 신은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것이라 생각한다. 천국과 지옥의 존재 또한 믿지 않는다. 명동 한복판에서 때때로 마주하는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문구는 약간의 불쾌감만을 선사할 뿐, 두려움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다.


뮤지컬 <더 데빌>은 괴테의 「파우스트」를 원작으로 한다. 사실 원작이라기보다는 캐릭터만 차용한 것에 가깝다. 실제로 포스터에도 괴테의 「파우스트」를 오마주(hommage)하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괴테의 「파우스트」 속 '신(주님)'과 '메피스토펠레스'를 각각 대변하는 X-white와 X-black의 체스 게임에서 존 파우스트와 그레첸은 게임 말로서 희생된다. 하지만 관객으로서 존과 그레첸에 대한 연민을 느낄 시간은 없다. 그들의 삶을 뒤흔드는 X들의 경쟁은 관객들의 혼을 빼놓는다.


2018년 포스터는 체스 게임을 가시화한 이미지로 제작되었다.

 

뮤지컬 <더 데빌>의 초연을 관람하지는 않았지만, 후기는 익히 접해왔다. 극 자체가 지니는 분위기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리지만, 극이 전하려는 메시지에 있어서는 관객의 대부분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듯했다. 2017년 다시 돌아온 <더 데빌>은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더욱 분명하게 전하기 위해 극에 큰 변화를 주었다. X를 둘로 가른 것이다. 신과 메피스토펠레스를 오가던 X는 이제 선, 즉 빛을 상징하는 X-white와 악, 즉 어둠을 상징하는 X-black으로 나뉘었다. 바뀐 버전의 재연을 관람한 필자는, 초연 당시 왜 X가 선과 악을 모두 상징하는 캐릭터인지 단번에 이해하게 되었다.


"빛과 어둠은 항상 함께니, 빛도 어둠도 인간의 선택." 뮤지컬 <더 데빌>의 넘버 'Reign of Darkness'의 가사 중 한 구절이다. 2014년 초연 당시에는 없던 넘버이다. 극작가가 관객들이 시나리오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니 답답했던 것 같다. 저 한 문장이 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모두 담고 있다. 그대가 선을 택하든 악을 택하든, 그것은 당신의 선택이다. 무신론자인 필자는 여기에 신과 악마는 인간이 택한 선과 악에 씌워진 겉껍데기일 뿐이라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무신론에 기반을 두고 있는 필자의 생각과 맞아떨어지는 가사는 이뿐만이 아니다. 초연 당시부터 있었던 '그 이름'이라는 제목의 넘버에는 "그의 이름은 중요치 않아, 그를 불러서 행복하다면."이라는 가사가 있다. 신과 악마, 그 이름들도 그저 인간들이 편의에 따라 붙인 이름이 아닌가. 구원과 타락, 천국과 지옥, 모두 인간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것들은 모두 같은 것일 수도,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물론 필자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또 재미있는 점은, X-white와 X-black이 화음을 맞추어 같은 가사를 노래하거나, 서로의 대표 넘버 중 몇 마디를 레프리제 하여 부르기도 한다는 것이다. 'Reign of Darkness'에서 같은 멜로디를 기반으로 X-white는 속죄를, X-black은 욕망을 노래하면서도, "빛을 향한 속죄와 어둠 향한 욕망이란 결국 거부 못할 숙명이라니"라는 가사를 함께 부른다는 점에서 둘을 결코 떼어놓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시한다.


Reign of Darkness


'발푸르기스의 밤'에서 X-black은 X-white의 대표 넘버인 '피와 살'의 도입부를 레프리제 한다. '피와 살'은 더 늦게 나오는 넘버이지만, 해당 넘버가 X-white의 대표 넘버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순간에 꽤나 큰 희열을 느낄 터이다. 그뿐인가. 뮤지컬 <더 데빌>의 포스터에 나타난 마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악마를 뜻하는 DEVIL의 I는 신을 상징하는 십자가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뮤지컬 <더 데빌>에서 신과 악마의 구분은 처음부터 무의미한 것이다.


사실 처음 관람하였을 때 필자의 마음을 가장 뒤흔든 넘버는 '어떤 예감'과 '너는 나의 신전, 너는 나의 사과나무'였다. "너는 나의 신전, 너는 나의 사과나무. 너는 나의 거울, 네 눈 속의 나. 너는 나의 어제, 너는 나의 오늘과 내일. 부서지지 마, 흐려지지 마."라는 가사가 "무너지는 신전, 불타버린 사과나무. 일그러진 얼굴, 보이지 않니. 흐려지는 세상, 거울은 피로 물들어. 깨져버린 시간, 사라진 내일"로 응용될 때, 그 순간의 뒤통수를 강타당한 듯한 충격과 전율을 잊지 못한다. 신전, 사과나무, 거울, 시간. 그 의미를 일일이 따져볼 틈도 없었다.


어떤 예감


존과 그레첸은 구약 성서 속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 같았다. 존에게 건네진 계약서는 선악과였으며, 존은 욕망이라는 약에 취했다. 그레첸은 X-black에게 굴복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지만, 결국 그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된다. 존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그레첸을 지키기 위해 악마와의 계약을 하지만, 결국 그 계약으로 인해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그레첸을 잃고 X-black이 원하는 대로 피로 자신의 시간을 멈추게 된다.

(2018년 삼연에서는 X-white의 손등에 상흔 분장이 추가되었다. 예수의 오상을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어둠이 빛을 삼켰다." X-black은 X-white와의 게임에서 승리하게 된다. "이제 당신과 나의 위치가 바뀌었습니다." 본디 빛을 택하였던 존 파우스트는 욕망에 눈이 멀어 악마와의 계약에 선뜻 응하였지만, 곧 피로 속죄함으로써 X-white가 제자리를 찾게 한다. 결국 '선'이 승리한다는 면에서 결말이 새롭지 않다고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악마에 대한 신의 승리는 인간의 선택으로 빚어진 결과라는 사실이다. X-black의 승리도 X-white의 승리도, 늘 신이 아닌 인간의 선택에 달려 있는 문제였다.


X


이 극의 최대 반전은 무대 위의 존과 그레첸이 겪은 일들이 현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존의 타락부터 그레첸이 광기에 휩싸이는 그 모든 장면이 두 X의 체스 게임 판에서만 벌어진 일일뿐, 존과 그레첸이 실제로 겪은 일은 아니었다. 뮤지컬 <더 데빌>에는 네 명의 배우 외에 다섯 명의 앙상블이 등장한다. 독특한 점은 앙상블들이 특별한 배역을 맡지 않고 코러스로만 남는다는 사실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 부분에서부터 무대 위의 모든 상황들이 현실이 아님을 자각했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 비극에서나 봤을 법한 코러스는, 정말 당시 원형 극장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신의 언어를 노래하고 인물의 감정을 전달하였으며, 때로는 관객들에게 서사를 전하기도 하였다.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코러스가 무대 위에서 버젓이 노래하는 그 순간부터 이 극은 현실을 가장할 생각이 없었다.

(2018년 삼연에서는 존과 그레첸의 꿈임을 보여주는 장면이 삭제되었다.)


취향에 맞을 것 같으면서도 초연에 대한 질타들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관람하였던 작품이다. 하지만 극이 진행된 110분 내내 숨을 쉬지 못할 정도의 흥분을 경험하고는 넘버 가사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결국 다시 극장을 찾았다. 소극장 뮤지컬은 음악에 대한 기대를 크게 하지 않는 편인데, 작곡이 매우 좋았고, 대사와 넘버의 가사들도 흥미로웠다. 가장 칭찬해 주고 싶은 것은 조명 연출이다. 악단이 없음에도 음악과 서사에 맞춰 현란하게 움직이는 조명은, 록 음악의 강렬한 비트가 눈앞에 펼쳐지는 듯 했고 신들의 이야기에 걸맞기까지 하였다. 무대 위 거울에 조명이 반사되어 관객에게 뻗치는 순간, X-black이 무대 한 구석에 있던 사과를 챙겨 들고 관객에게 시선을 던지는 순간, 작품은 관객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거부할 수 있는가."



※2017년 <더데빌> 관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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