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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앓이 Sep 19. 2019

푸코가 바라본 마그리트

미셸 푸코作,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벨기에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인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들에는 모자를 쓴 신사도 자주 등장하지만, 인물 하나 그려지지 않은 파이프 그림이 가장 유명하지 않을까 싶다. 제목은 몰라도 ‘Ceci n'est pas une pipe.(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만큼은 불어 구사자가 아닌 사람들도 뜻을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La trahison des images(1929)


<이미지의 반역(La trahison des images)>이라는 제목의 파이프 그림은 작품의 해석을 깊이 알지 않아도 묘하게 사람의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다. 특별한 배경도 없이 화폭을 가득 메우는 것은 분명 파이프가 맞는데, 바로 아래 정갈하게 적힌 문구는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관객의 눈앞에 있는 것은 파이프 이미지일 뿐 파이프가 아니다. 파이프라고 착각하여 불을 붙여 봤다가는 파산을 면하기 힘들 것이다.


<이미지의 반역>은 기호학적으로도 해석되는 경우가 많다. 소쉬르의 기호학 이론에 따르면, <이미지의 반역>에 그려진 파이프 이미지와 하단에 적힌 ‘pipe’ 모두 기표에 불과하다. 라캉이라면 파이프 이미지와 ‘pipe’라는 단어 모두 기의에 닿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진다고 할지도 모른다. 마그리트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푸코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를 통해 마그리트의 작품들을 다수 분석하며 단순한 기호학적 분석을 넘어서는 담론을 펼친다.


미술사 안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전통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왔다. 전시장에 가서 보게 되는 작품 옆에 문구가 적혀 있다면, 관객은 당연히 작품에 대한 설명일 것이라 생각한다. 기사에 사진이 포함되어 있다면, 기사의 내용과 관련된 사진일 것이라 여기는 것도 당연하다. 전자의 경우 텍스트가 이미지를, 후자의 경우 이미지가 텍스트를 부연하여 설명한다. 즉 둘 사이에는 종속 관계가 형성된다.


<이미지의 반역>에 나타난 이미지와 텍스트는 둘의 전통적인 관계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관객은 그려진 이미지가 파이프라고 인식하는 순간, 파이프가 아니라는 문장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지와 텍스트는 모두 ‘파이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서로를 배반한다. 그 과정에서 이미지와 텍스트는 어느 방향으로도 종속 관계를 형성하지 않으며, 둘 사이의 여백이 자연스레 두드러진다.


푸코는 마그리트의 작품을 전통적 회화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다고 말한다. 회화는 기나긴 시간 동안 모방과 재현을 통해 시각적 환영을 일으키는 것을 목적으로 해왔다. 물론 인상주의는 완벽한 모방을 추구하지 않았고, 큐비즘은 보이는 대로 그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재현 방식의 차이일 뿐, 유사에서의 원본과 복제라는 관계는 유지된다. 유사와 달리 원본이 무의미한 상사는 칸딘스키의 추상 회화와 같은 현대 미술에 이르러서야 찾아볼 수 있다.


마그리트는 앞서 언급한 이미지와 텍스트의 관계나 유사와 상사와 관계를 전복하는 것을 넘어서 화폭 안에서 끝없는 담론을 양산해낸다. <이미지의 반역> 속 파이프 이미지를 보고 그 누구도 추상적이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구상적으로 완벽하게 재현된 파이프는 하단의 문장을 통해 유사성을 부정당한다. 이 담론은 마그리트가 이후에 선보인 또 다른 파이프 그림인 <두 가지 신비(Les deux mystères)>에서 심화된다.


Les deux mystères(1966)


사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는 <이미지의 반역> 위로 공중에 거대한 파이프가 부유하고 있는 그림인 <두 가지 신비>를 주로 다룬다. 푸코는 해당 작품 자체를 칼리그람으로 보고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의 다양한 해석을 제시한다. 첫째, 파이프 이미지는 단어 ‘pipe’가 아니다. 둘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장 자체는 대상으로서의 파이프를 재현하지 못한다. 셋째, <두 가지 신비>의 액자 속 <이미지의 반역> 그림은 파이프가 아니다. 즉 어디에도 파이프는 없다. 결과적으로 상사체들은 하나의 캔버스 위에 독자적으로 존재한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운동은 20세기 초 예술계와 문학계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는데,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의 ‘무의식’ 개념의 영향으로 의식의 개입을 방지하는 자동기술법(automatism)을 주로 사용하였다. 초현실주의 화가로 대중들이 주로 떠올리는 살바도르 달리는 화폭 자체가 비현실적인 반면, 마그리트는 <이미지의 반역>과 <두 가지 신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철학적 및 인식론적 접근을 통해 관객들이 낯섦을 경험하게 했다. 


마그리트는 철학, 기호학, 언어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거론되곤 하지만, 그중에서도 푸코의 저서가 특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예술적 담론을 이끌어갔기 때문이다. 푸코의 마그리트 작품 분석 이론이 철학은 물론 미술사학에서까지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물론 푸코와 마그리트는 이 인과관계마저 끊어놓으려 할지 모르지만 말이다. 캠벨, 캠벨, 캠벨, 캠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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