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밤의 열기
니콜은 오늘 오전 수업만 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은혜와 같이 헤어숍에 들렀다. 니콜에게는 처음 보는 헤어숍의 모습이 신기했다. 깔끔하게 정돈된 하얀색 방에 의자가 3개 있고 이미 한 여자가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 시대는 머리를 자르거나 파마를 하기 위해 미용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머리색과 모양을 선택하기만 하면 기계가 다 알아서 해주었다.
깔끔하게 2:8 가르마를 한 남자가 니콜에게 다가왔다. 그 남자는 니콜과 네트워크 신호를 교환할 수 있는 안드로이드였다. 니콜과 은혜는 남자가 안내하는 대로 자리에 앉았다. 짧은 시간에 머리 스타일을 완성시켜주는 기계가 있기때문에 종업원은 많이 필요 없었다. 완전 무인 미용실도 가능했지만 고객들의 거부감 때문에 한 사람이라도 종업원이 있는 곳이 장사가 잘되었다. 기술은 발전해도 인간은 인간이었다.
"어떤 스타일을 원하세요?”
남자가 손짓하자 앉아있는 니콜 앞에 홀로그램 사진이 떴다. 니콜은 익숙하게 홀로그램 북(Book)을 손으로 넘겼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스타일이 있었다.
"이걸로 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10분 정도면 되니까요. 앉으셔서 기다리시면 됩니다.”
남자의 안내가 끝나자 니콜의 머리 위에서 커다란 통이 내려왔다. 니콜의 목까지 들어가는 통이었다. 은색 통이 어깨에서 멈추자 니콜은 약간 겁이 나서 눈을 감았다가 떴다. 눈앞에는 작은 모니터가 있었다.
“10분간 단계적으로 진행됩니다. 겁내지 마시고 앞에 보이는 뮤직비디오를 감상하세요”
니콜이 기다리고 있으니 뭔가 레이저 빛 같은 것이 왔다 갔다 했다.
“머리 형태 체크 중….”
갑자기 차갑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머리 감기 중….”
“머리 스타일 중….”
눈앞에는 뮤직비디오 화면이 나왔다. 어느 바닷가에서 한 남자가 노래하고 있고 두 남녀가 물에서 첨벙거리며 즐거워하는 장면이었다. 화면 아래에 가사가 보였는데 이상하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HoneyDrippers의 “Sea of love”라는 곡으로 화면에 표시되었다.
“스타일 체크 중….”
몇 곡의 뮤직비디오가 다 지나가도록 음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니콜은 가만히 있었다.
“스타일 완료.”
화면이 끝나고 머리를 감싸고 있던 통이 천장으로 올라갔고 남자는 친절하게 니콜에게 물었다.
"금방 끝났죠?"
“네…."
니콜은 어리둥절했다. 옆을 보니 은혜는 아직 통을 쓰고 있었다.
"옆에 분은 조금 더 걸릴 거예요. 손님은 정확히 8분 걸렸네요.”
남자는 웃으면서 카운터로 돌아갔다. 조금 뒤 은혜의 통이 올라갔을 때 완전히 달라진 은혜가 보였다. 끝을 살짝 말려 올라가게 하고 어깨 밑으로 내려오던 머리카락을 어깨 끝에 닿을 정도로 잘랐다. 머리색은 밝은 갈색으로 바뀌었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이 되었다. 니콜은 거울로 자기 모습을 보았다. 자연스러운 웨이브와 귀밑으로 눈썹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 길이가 마음에 들었다. 옆에 있던 은혜도 끝나고 니콜에게 물었다.
“어때? 마음에 들어?”
"응... 이런 거구나. 머리한다는 게….”
“뭐야… 니콜. 이거 처음 하는 거야? 이 기계 나온 지가 언젠데….”
은혜는 웃으면서 니콜에게 말했지만 니콜이 머리하는 것 자체가 처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니콜도 굳이 그런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일어서서 카운터로 와 각자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왔다. 미용실로 들어서기 전보다는 훨씬 자신감이 느껴졌는데 니콜은 그동안 답답했던 잔머리를 정리해서 귀 밑이 시원해진 느낌이었다. 그들은 은혜의 집으로 이동했다.
"니콜. 그러고 보니 너 처음 봤을 때부터 너무 평범한 스타일이라서 놀랐어. 요즘 귀찮고 인공적인 게 싫어서 내추럴하게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너처럼 화장도 안 하고 머리도 안 하는 건 처음 봤거든. 너 혹시 요즘 유행하는 자연주의자니?”
"자연주의자? 그게 뭔데?"
“그거 몰라? 요즘 그렇잖아. 모든 게 기계로 이뤄지고.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도 수많은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들과 만나고 있고. 어디서 어떤 도움을 받는지도 잘 모르는 게 현실이야. 전 세계 어디서나 로봇을 만날 수 있게 되었지만 여기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거든. 자연주의자들은 우리가 기계에 의존하는 것이 인간성을 잃게 한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인공지능과 로봇에 의존하지 말고 인공지능이 등장하기 전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고 있어.
극단적으로 기계사용을 꺼리면서 기계 파괴 운동도 한다더라. 언론에서는 그런 사람들을 자연주의자라고 부르고 그 사람들은 스스로를 네오 러다이트 주의자라고 불러. 유명해 요즘. 죄 없는 안드로이드들이 살해당하는 경우도 있어. 살해라고 말하니까 좀 그런데 어쨌든 과격한 사람들이야. 전에는 안드로이드인 줄 알고 진짜 사람을 죽인 적도 있었대. 그래서 크게 문제가 된 적이 있어.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과격한 방법을 좋아하지 않지만 그래도 상당수 사람들이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는 경향이 있어. 뭔가에 의존한다는 건 원래 불안한 거잖아. 안드로이드들이 점점 똑똑해지고 있으니 언젠가 인간과 구분이 없어지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리를 뺏길까 봐 겁나는 거지. 사실 뭐... 인간이라고 해서 다 똑똑하고 특별한 건 아니니까. 인간이란 거 기특할 때도 있지만 바보 같을 때도 많거든. 니콜은 어떻게 생각해?"
“나는… 잘 모르겠어."
“그래… 모르는 게 나을 거야. 나는 요즘 수업 들으면서 이것과 관련된 일을 조사한 적이 있는데 앞으로는 인간의 감정을 완벽하게 재현한 안드로이드도 나올 수 있데. 지금도 진행 중이고. 그렇게 되면 인간이라고 해봐야 특별한 것도 없게 되는 거지. 사람들은 자기가 뭐 대단한 듯 떠들고 안드로이드한테 막 대하고 그러지만 내가 보기에 안드로이드보다 못한 인간이 태반이야. 지능도 그렇고 감성이나 도덕적인 면 모두. 니콜은 사회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나 보다."
“응… 나는 시골에서 와서…."
"그렇구나. 난 그런 쪽에 관심이 좀 있어. 지금 같은 시대에 역사는 먹고사는데 아무 도움 안 되는 학문이지만 공부가 끝나면 적극적으로 사회활동을 하는 게 내 꿈이거든. 옳은 이야기를 하고 사회를 좀 더 바르게 바꾸고 싶어. 요즘 사람들은 너무 그런데 관심이 없어서 안타까워. 모든 게 윤택한 시대니까. 역사는 가장 강력한 인문학이라고 생각해. 인간이 문명을 가진 동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이 바로 역사니까.
지나간 일들을 기록하고 그것에 대해 평가하고 연구하는 것은 먹고 사는 문제와는 완전히 별개의 이야기지. 단기적으론 방해만 될 뿐이지. 그런데도 인간은 그냥 주어진 대로 살아가지 않고 기록을 남겨. 기록을 남기는 순간 세상은 이미 바뀔 준비가 된 거야. 누군가 그 기록을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되면 비로소 진보가 이뤄지는 거야. 그래서 역사를 아는 것은 중요한 일이야. 내가 사회운동을 하기 위해서 역사 공부는 필수라고 생각해. 과거의 흐름을 잘 알고 있으면 우리가 어떻게 가야할지도 보이거든.”
니콜은 아무 말이 없이 은혜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아… 너무 어려운 얘기였나?"
은혜는 웃으면서 니콜에게 커피 한잔을 권했다.
"자 니콜. 이거 내가 탄 거니까 먹어봐. 기계가 만든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먹을 만해.”
“그래….”
"너 파티 가면 남자하고 춤춰야 하는데 춤 잘 춰?"
"그냥 조금 배웠어?"
"정말? 어디서?"
"그냥 아는 사람이 하는 거 따라 하면서 배웠어."
"그래? 나는 따로 개인 교습을 받은 적이 있어."
은혜와 니콜은 거실에 있는 식탁 의자 등받이에 팔을 올리고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파티에서 괜찮은 남자 만날 수 있을까? 질문이 좀 웃기긴 하지만."
"남자? 남자를 만나면 좋은 거야? 난 아직 만나보지 못해서….”
"정말? 왜?"
"그냥 기회가 없었어."
"불쌍한 니콜. 도대체 얼마나 시골에 살았던 거니? 요즘 세상엔 시골에 사는 것도 제한되는데.”
"그냥 외딴곳에서 지냈어.”
"이따가 파티에 가면 실수하지 말고 내가 하는 것 보고 따라 해."
“알았어."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면서 웃었다. 여자들의 대화가 이렇게 진행되는 동안 시간은 금방 흘러 파티에 갈 시간이 되었다.
”니콜 시간 됐다. 이제 가자.”
"응"
두 사람은 집에서 나와 택시 중력선을 타고 학교로 향했다. 택시 중력선은 운전사가 안드로이드인 것만 빼고는 21세기의 택시와 거의 같았다. 두 사람은 학교 안에 있는 ‘마이클 혼다(Michael Honda)’ 센터에 내렸다. 마이클 혼다는 이 학교 설립자였다. 건물 앞에는 입장 표지판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학생증을 인식시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건물 안은 마치 궁전처럼 큰 홀이었다.
동그란 홀의 천장이 아치형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유리창엔 색유리로 알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들이 장식되어 있었다. 천장에는 커다란 홀로그램 벽화가 있었다. 미켈란젤로의 그림들이 1분에 한 번씩 바뀌었다. 니콜은 그것을 보다가 발을 헛디딜 뻔했다. 주말이라 다른 건물들이 불을 꺼놓아 이 건물 안만 훤하게 밝았다.
홀 안에는 벽을 따라 빙 둘러서 원탁이 놓여있고 그 위에는 가벼운 핑거푸드가 있었다. 중앙은 춤을 추기 위해 넓게 비워두고 안쪽에는 무대가 설치되었다. 니콜과 은혜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걸었다. 평소 구두나 드레스를 입어본 적이 없는 터라 걷기가 쉽지 않았다. 입을 때마다 불편한 이 옷은 정말 파티할 때만 입어야 한다고 니콜은 생각했다. 둘은 벽을 따라 배치된 의자에 앉았다. 그곳에서 중앙 무대가 잘 보였다.
"자 이제 파티를 시작하겠습니다. 이 파티는 신입생들을 환영하기 위한 파티로서 졸업생과 재학 중인 선배들이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자리입니다. 선배 학생 대표 제임스 허튼의 이야기를 들어볼까요?”
사회자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끝나고 말끔하게 정장을 차려입은 남학생이 마이크를 이어받았다.
"안녕하십니까. 경제학과 제임스 허튼이라고 합니다. 현재 학생회 부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모든 선배 학생을 대표하여 자유 제1 대학에 오신 신입생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오늘 이 자리는 신입생 여러분을 위해 준비한 자리이니 마음껏 즐겨주시고 좋은 추억 많이 쌓으시길 바랍니다.“
박수 소리가 울려 퍼지고 최대한 아날로그와 복고풍으로 준비한 무대에 하나둘씩 조명이 들어왔다. 무대 위로 다섯 명의 남자가 올라와서 각자의 악기를 세팅하기 시작했다. 이 시대의 악기는 모두 전자 악기였다. 현이나 건반을 누를 필요가 없고 모두 터치식이었다. 초보자도 훌륭한 연주를 할 수 있게 되어있었지만 연주자만의 개성은 느낄 수 없어서 프로 뮤지션들은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많았다.
"자 여러분. 중앙 무대에서 마음껏 춤추시고 얘기도 충분히 나누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