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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이점 Sep 08. 2024

2편. 기술진보와 인류 문명의 발달

- 과학은 어떻게 인류를 위대하게 만들었는가?

※ 이 시리즈는 주관적 해석과 견해 및 지식을 토대로 쓰였으므로 틀리거나 반박의 여지가 있음을 미리 알립니다.


전 편에서는 여러 매체를 통해 흥미롭게 그려진 미래상들에 대한 예측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과학 공상물들은 결국 인간이 당 시대에 알던 지식의 테두리 내에서 당시까지의 과학 기술문명의 발전 양상에 따라 예측해 왔고, 수십 년 후 실제로 이루어진 기술들도 있지만 그 당시엔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술들이 많이 발명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면 인터넷, 스마트폰, 인공위성, 심우주 탐사선 등) 100여 년 전까지 갈 것도 없이 80년대의 작품들에서 특히 이러한 양상들이 두드러졌습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들이 틀렸는지 맞았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는 결코 예측불가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여태까지 발전해 온 문명과 앞으로 발전해 나갈 문명의 양상이 비슷할 것이란 보장도 없습니다.


그러나 앞으로의 방향성은 제시할 수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비트루비우스적 인간"

              

[1]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도 저명한 학자들뿐 아니라 평범한 대중들도 무의식 중에서라도 당연하다는 듯 인간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난 특별한 존재로 여깁니다. 글쎄요. 저는 반은 동의하지만 반은 다르게 생각합니다.


수천 년간 고대 그리스 시대에서부터도 인간의 정의를 내리려고 여러 시도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오류는 발견되었고요. 인간은 명백히 지구상 어떤 생명체보다 지능이 높고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고도의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 자신이 인간종에 속해있는데 만나본 그 어떠한 생명체 중 이런 지적 생명체는 전혀 없었습니다. 지구상에서는 유일한 지적 생명체이기에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라고 여깁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본인이 어떠한 특수한 사명을 갖고 이 세상에 태어났다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아마 종교라는 믿음의 영역도 여기에서 파생되지 않았나 유추해 봅니다. 


종교계, 과학계, 인문학계 할 것 없이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고 객관적으로 정의 내리지 못합니다. 어느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너무나도 다른 게 인간이거든요. 저는 인간을 아름답고 간결한 수식처럼 정의 내리기는 한계가 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그 정의를 내리는 존재 또한 인간이므로, 즉 자기 객관화를 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답을 내리기 어려운 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입니다. 과학적이든, 인류학적이든, 역사학적이든, 종교적이든, 어떠한 관점에서도 말입니다. 여기서 과학과 철학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합니다. 어쩌면 우주 만물의 이치를 알아내고자 하는 내재된 욕망을 원동력으로 지금까지 왔을지도 모릅니다. 


사실 인류는 농업혁명을 이룩해 내기 전까지는 야생의 짐승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동물이었습니다. 사냥하고, 먹고, 자고, 짝짓기를 하면서 살았지요. 그러나 문명의 시대가 도래하고 "의 식 주" 세 가지가 충족된 인류는 더 이상 사냥에 목숨을 걸지 않아도 되었고 여가시간, 여가 식량, 안전한 집과 사회를 획득했습니다. 그리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생각에 잠깁니다. " 나는 무슨 목적을 갖고 태어났을까?" " 죽음 이후에는 어떤 것이 기다릴까?" "이 모든 세계와 만물을 이루는 것은 무엇일까?"

이러한 생각들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모두 기술하긴 어렵지만 정보 전달을 위한 언어체계, 잉여생산물에 대한 가치(화폐), 그리고 '학문'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B.C. 384 ~ B.C. 322)

고대 그리스 때부터 이미 만물의 현상을 설명하려 했고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함을 논해왔습니다. 그러한 시도와 사고가 학문의 발달로 이어졌고 정립화되어 과학과 철학으로 분류되어나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과학과 철학의 공통점은 진리를 추구한다는 점입니다. 마치 지구상의 모든 생명이 단 하나의 세포로부터 기원하여 나뭇가지처럼 분류되어 진화해 왔듯 학문 또한 여러 가지로 갈래갈래 세분화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에 평생을 바쳐 연구한 전문가들이 다양한 방면에서 나오고 또 교류하면서 진정한 기술적인 문명의 연쇄반응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전쟁을 하며 서로 더 효율적으로 죽이고 고통을 주기 위한 연구를 위해 인체를 탐구하거나 무기의 발달로 부차적인 응용이 더해져 더 발전되어 올 수 있었지만 저는 역사보단 과학을 주로 논하고 싶기에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특별 편을 쓰겠지만 일단은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2] 과학의 발전


제가 감히 말해보자면 인간은 '지식의 저주'에 걸린 존재입니다. 과학이 발전해 온 양상을 보면 어떠한 현상이 왜 나타나는지 검증하고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고 마침내 증명해 내면 끝인 것 같았지만 더 많은 의문점들을 낳곤 했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또 이해하기 위해 과학자들이 각 분야에서 삶을 바쳐 연구하여 이론을 완성합니다. 그러면 또 그 이론으로 인해 기존 학설이 붕괴되며 새로운 의문들이 더욱 많이 태어나며 정교해지고 다듬어져 왔습니다. 그리고 그런 양상은 현재진행형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과학의 본질이기 때문입니다.


프톨레마이오스 등 지동설을 반박하기 위해 내세운 당대의 자료

예를 들자면,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이 주장했던 지동설과 천동설의 대립도 있겠습니다. (너무 먼 과거까지 가진 말자고요 ㅎ) 

물론 당시엔 역사적으로 종교의 권력이 절대적이었기에 신성모독이라는 배경도 깔려있지만 어쨌든 굳이 비유하자면 전편에서도 비슷한 말을 했었지만 현대물리학자들에게 한 학자가 "광속은 시속 30만 km가 아니고 광속보다 더 빠른 물체가 이론 상 존재할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완벽하게 수식으로 증명해 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편으론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거니와 수많은 비판을 받을 얼토당토않은, 그만큼 충격적인 주장이었다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제가 예시로 든 주장이 옳다고 가정한다면 기존 수백 년간 쌓아온 학문적 토대가 모조리 무너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만큼 그야말로 대재앙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뉴턴 고전역학의 집대성인 'Philosophiæ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또는 간단히 프린키피아)'

그렇게 수백 년이 흐르며 결국은 지동설의 승리로 끝나고 뉴턴의 고전역학이 등장합니다. 역시 수백 년간 진리로 여겨져 왔습니다.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 이론'을 세상에 내놓기까지는 말이지요. 물론 고전역학은 천동설과는 다르게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에서의 물체의 운동을 무시할 수 있을 정도의 오차를 가진 근사치로 그 가치를 여전히 뽐내고 있지요. 실제로 미시세계, 광속에 근접한 속도 등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선 고전역학이 여전히 더 많이 쓰이고 가르쳐지고 있습니다. 


한편 뉴턴은 빛이 입자인지 파동인지를 두고 치열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결과론적으론 아인슈타인의 가설이 광전효과를 통해 이중성이 입증됨에 따라 둘 다 정답이었지만 말이지요.


희대의 천재 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1879. 3. 14. ~ 1955. 4. 18.)

아인슈타인은 빛에 대한 통찰과 천재성, 그리고 수백 년간 이어져온 고전역학의 시대가 저물고 상대성이론의 시대를 연 불세출의 천재로써 여전히 존경받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서구권에선 천재의 대명사로 불리기까지 할까요?

(실제로 영미권에선 잘난 체하는 사람에게 "그래 너 잘났어 아인슈타인아!"라고 비꼴 만큼 천재라는 말의 대명사 그 자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아인슈타인조차 끝까지 받아들일 수 없었고 부정했던 학문이 바로 '양자역학'입니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말도 하였지요. 더 정확히는 학문 자체를 부정한다기보단 양자역학에서의 불확실성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특히 개인적으론 코펜하겐 학파를 이끈 닐스 보어와의 팽팽한 논쟁은 아직까지도 기록되어 후대까지 남겨져 글만 읽어도 그 당시의 분위기와 감정이 느껴졌습니다. (네이버 검색만 해도 쉽게 대화문은 찾으실 수 있습니다.^^)


한 장으로 보는 양자역학

이처럼 꼬리에 꼬리를 물고 발전해 나가는 것이 과학이고 반박과 증명을 통해 더욱 정교하고 정확해집니다. 

그리고 다음 목표는 '통일장 이론'의 완성입니다. 이 이론이 완성된다면 상대성이론만큼 물리학계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것입니다. 뭐 아직까진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연구 중에 있지만요. 거시 세계에서의 '상대성 이론', 미시세계에서의 '양자역학'이 둘을 하나로 묶는 것은 가능한 것일지조차 아직은 의문인 시점입니다.

다만 지금껏 발전해 오고 정설로 여겨지던 것들이 더 정교하고 정확한 이론으로 대체되는 일이 많았던 만큼 오래 살고 볼일이지 않나 싶습니다.



[3] 인간 문명


사실 과학은 이 우주가 탄생한 이래 한순간도 빠짐없이 존재해 왔습니다. 빅뱅과 동시에, 즉, 시간 선의 출발 지점부터 현재까지 변함없고 묵묵히 우리 곁에 존재해 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 우리 인간이 지구상 최초로 생각을 할 줄 아는 유일한 생명으로 탄생하여 이 우주의 법칙들과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찾기 시작했지요. 왜 해와 달은 떴다가 지기를 반복하는가? 왜 생명은 언젠가 죽는가? 왜 손에 쥔 사과를 놓으면 땅에 떨어지는가? 왜 우리는 존재하는가? 왜 이 우주는 이렇게 생성되었는가? …….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라는 탐구심을 원동력 삼아 초기에는 미약했으나 오랜 기간에 거쳐 세상의 모든 호모 사피엔스 간의 정보를 교류하고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가면서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 아주 끈끈하고 탄탄한 지식의 네트워크가 형성되며 결국 '생각'을 증명할 수 있는 '이론'으로 정립하게 되었습니다. 


리처드 파인만 (Richard Phillips Feynman, 1918.5.11.~1988.2.15.)

물리학 혹은 과학에 관심 있으신 분들은 들어보셨을지도 모르는 리처드 파인만의 "왜"에 대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 내용 자체는 매우 길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만 말의 요지는 이건 것 같습니다. 첫 번째는 질문자의 지식수준에 따라서 답변 역시도 깊이와 질이 달라져야 하는데 상대가 어떤 지식수준을 갖추고 있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은 정말로 대답하기 모호하고 어려운 질문이다. 두 번째로는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또 '왜' 그러한가? 또 거기에 대한 답에 대한 '왜'? …… 이렇게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결국엔 '모른다, 원래 그렇다' 등의 대답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이 때문입니다. 


저는 이 "왜"라는 단어 하나에 아주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인간의 탐구심을 대표적으로 나타내기도 하면서 그것도 연계된 수많은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과학자들이 우주의 원리를 알아내고자 오랜 세월 동안 연구해 왔고 이론 하나가 정립되면 그것은 단순히 그 학문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으로 응용될 수 있고 그 와중에 새로운 아이디어가 생겨날 수도 있지요. 그러므로 진정한 인류 문명 발달의 원동력은 바로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된 게 아닌가 하고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물론 '왜'가 또 다른'왜'를 낳는 과정에서 '어떻게' 또한 태어남으로써 상상을 직접 실현시키는 것으로 변하고 공상을 현실로 만들어 온 이 역사는 다시금 인간의 위대함을 절감하게 합니다. 

보통 '과학기술'이라는 단어를 많이 씁니다. 틀린 단어는 아니거니와 '과학'과 '기술'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개념이지만 엄연히 다른 의미이고 한 줄로 요약하기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어차피 저는 전문적인 분야보다 흥미 위주의 내용을 다루기에 깊은 의미는 차치하고 '왜=과학', '어떻게=기술'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편하다 생각합니다.

모두가 다 그런 건 당연히 아니지만 일례로 모스부호, 전화기, 무전기 등 장거리로 전자기파 신호를 통해 통신을 하는 것은 과학자들의 이론이 먼저 정립되었고 그걸 본 많은 공학자, 발명가들이 달려들어 각자 창의적인 방법으로 실존하고 작동하는 기계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낸 것이지요. 물론 개인의 관점에선 누가 먼저 했느냐 과학자 이름이 누구냐, 누가 최초로 전화기를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수가 있지만 저는 어디까지나 거시적 관점에서 인류 전체로 보기 때문에 대략적인 흐름만 이야기하는 겁니다. 어차피 개개인의 과학자나 발명가 이름 또는 이론, 작동원리 등은 이미 다 알거나 조금만 검색해도 다 나오는 자칫 지루한 콘텐츠가 될 수 있기에 그렇습니다. (당연히 그들을 폄하하는 것은 절대로 아니고 저의 콘셉트와는 안 맞다 정도로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19세기의 산업혁명을 그린 삽화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기도 합니다. 현실에서, 자연에서 분명히 존재하는 현상이기에 그것을 응용하여 우리 일상에 도움 되는 도구들을 만들어 내기도 합니다만 여전히 왜 그렇게 되는 건지, 작동원리를 몰라서 일단 기술자들이 만들고 나서 과학자들이 그 원리를 이론으로 밝혀내려 노력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눈앞에서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반박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산업혁명의 '증기기관'을 들 수가 있는데 '카르노 기관'을 개량하여 에너지 효율을 대폭 높인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이 먼저 발명되어 산업혁명이라는 거대한 인류사의 혁신을 이루어내고 그 사후에 정확한 학문으로써의 열역학 법칙이 정립되었습니다. 현재의 인공지능 분야도 왜 그렇게 작동하는지, 코드를 제아무리 잘 다루는 전문 프로그래머도 정확하게 인공지능의 작동원리를 모른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자연 현상을 보고 '왜' 그럴까? '어떻게' 하면 실생활에 응용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과학자들이 알아내려 하는 것의 궁극적 목적은 철학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습니다. 결국은 모든 현상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어 합니다. 이 우주의 본질과 만물을 이루는 것들의 법칙을 알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구는 문명이라는 지구 생물계에서 정말로 특이한 것을 만들어내고 또 끊임없이 발전해 나가는 그 동력원이라고 생각합니다.



- 마치며


앞서 보았듯이 문명이라는 것은 그저 하나의 현상이 아닌 거미줄처럼 엮어진 많은 분야들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명이 발전함에 따라 인간의 삶은 더 편해졌을까요? 저는 꼭 그렇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편리해진 도구들과 양질의 퀄리티를 대량생산하는 등 좋은 점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많은 생명을 살리기도 했고 또 아이러니하게도 많은 생명을 앗아가기도 하였습니다. 훨씬 더 일 처리와 에너지 사용이 편리하고 효율이 올라감에 따라 일거리는 과거보다 더 많이 늘어나기도 했지요. 

다음 편은 문명의 이면과 전쟁과 무기들의 상관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합니다. 

읽어주신 독자 여러분 모두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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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분간은 브런치 북 소설 연재에 집중하기 위해 이 시리즈는 연재가 많이 늦어질 것 같습니다. 제 소설도 많이 읽어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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