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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특이점 Sep 02. 2024

나는 왜 태어났는가?

자유롭게 생각해 보는 내 인생사

나는 왜 태어났을까? 무슨 중2병 같은 질문이지 싶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 인생을 비관해 왔다. 소개 글에는 어린 시절 청소년기 등을 뭉뚱그려 평범한 삶을 살아왔다고 했다. 뭐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유아일 때 위독할 정도로 심각한 열병에 죽을 위기에 처했으나 가까스로 살려내었다고 한다.


  초중고 학창 시절 지나면서 키는 또래보다 작고 잔병치레를 많이 했다. 체육에선 항상 꼴등이었다. 그게 뭐 대단한가 싶지만 3살 위 친형은 항상 전교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신체적으로도 튼튼했고 높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래서 자기 관리에도 철저한 사람이다. 서울대 물리학 박사라는 타이틀만 있어도 이미 인증되었고 군대도 빠졌다. 나는 부동시가 심하여 3급 현역을 받아서 전쟁 중 안경이 파손될 때를 염려하여 라식수술을 받고 입대했다.


  나는 타인들이 "넌 똑똑한 것 같아." , "머리가 좋은 거 같아."라고 할 때마다 형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유전자이지만 하늘과 땅 차이의 지능과 허약한 신체를 타고난 나로서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부끄러웠지만 겉으론 겸손 떤다고 보였나 보다. 

이러한 자격지심은 마음속 깊은 곳에 분명 존재했지만 나는 나만의 삶을 꿈꿨다. 그냥 다르게 태어난 거고 형이 유별날 뿐이니까. 


  나름 밀덕(밀리터리 마니아)이기도 했던 나는 군에 가서 개인화기도 꽤나 잘 다루었고 훈련받지 않은 처음 보는 총기의 분해 결합까지 기계적 원리를 파악하여 해내곤 했다. 그만큼 기계의 정교한 작동 메커니즘에 매료되어 있었고 그래서 기계공학과를 택하고 2학년으로 복학할 날만 기다렸다.


  어느 날 훈련 이후 오른쪽 손목이 붓고 아프기에 파스를 붙이고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때까진 그런 증상들은 1주일 이상 가지 않고 자연 치유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2주고 3주가 지나도 낫기는커녕 엄청나게 부어오르고 살짝만 스쳐도 엄청난 통증을 수반했다. 마침 첫 장기 휴가가 계획되어 있었기에 나가서 큰 병원에 가보기로 하였다. 대학병원에서도 부산에서는 단 1군데 교수님 말고는 이 골육종이라는 뼈암을 치료할 의사가 없다고 할 정도로 심각했었다. 실감 나지 않았다. 의경이었기에 서울에 있는 경찰대 병원에 가서 그 병원에서는 치료할 수 없는 질병이므로 다른 병원으로 이첩한다는 서류를 받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 휴가이자 다시는 부대로 복귀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직 검사하니 악성도가 꽤 높았다.(뼈암은 주로 원래 악성도가 높긴 하다. 악성도란 암세포가 얼마나 질기고 잘 퍼지는지를 나타내는 지표라고 들었다.)


  손목만 유독 불룩하고 아파서 그 악성종양 부분만 문제 있는 줄 알았으나 이미 그 관절뼈를 타고 팔뚝의 상완골 관절 가까이 올라온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대부분의 골육종은 하체에 나기 마련인데 나는 팔에 생겨서 걸을 순 있을 것이다, 아직 주요 장기 등에 전이된 게 없어서 항암화학요법과 수술을 병행하면 승산이 꽤 높단 거였다.


이미 정형화된 치료법이 있어서 통상적인 암처럼 먼저 항암치료하여 종양 크기를 줄인 후 제거 수술을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항암제가 얼마나 효과 있었는지 점검도 한다 하였다.


  그리고 첫 항암제(약을 가장한 독극물)를 투여하자 지옥이 시작되었다. 아무리 어떠한 형용사를 부여하여 설명하여도 직접 겪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이 시작된 것이었다. 온몸의 털이 모조리 빠질 만큼 강력한 독을 투여하여 암세포보다 오래 살아남으면 이기는 일종의 치킨게임이었다. 나는 무서워서 핸들을 옆으로 꺾고 싶었다. 그것도 여러 번. 그 순간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인간이라고 스스로를 여겼다. 원래도 체중이 많이 나가진 않았지만 앞자리가 4인 경우를 처음 보게 되었다.



(말이 길어졌는데 내 암 투병기와 병원생활에 대해선 또 다른 글에서 자세히 써볼까 싶다.)



심신일체라고 하였던가. 육체적 고통이 계속되니 정신 또한 망가졌고 여전히 고쳐가고 있는 중이라 볼 수 있다. 비관적이지만 결코 이전의 온전한 마음으로 100% 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다들 목숨은 건졌지만 정서적 붕괴로 인해 폐인으로 살 것이라고 했다.(오른손에 생긴 영구적 장애도 있고)


  하지만 보란 듯이 연애도 하였고 9개월 수험 기간 후 국가직 공채 공무원에 합격하였다. 여전히 각종 항암치료 후유증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말이다.  원래는 어느 정도 회복 후 대학교 복학을 원했다. 그러나 팔의 장애, 약해진 신체 등을 이유로 가족들의 끈질긴 만류로 거기에 굴복하고 말았다. 여전히 중증 질환으로 인한 복학 보류인 상태다.


  나에게는 국가 행정직 공무원으로서 성적순으로 어느 부처에 갈지 선택권이 생겼었다. 개중 산림청과 방위사업청만 기억에 남는데 어릴 때부터 밀덕기질도 있고 했으니 그나마 관심사와 가깝고 한 곳에 정착할 수 있는 방위사업청을 희망했으나 가족들은 병원에서 멀다는 이유로 그리고 산림청 가서 좋은 공기 마시고 요양하라며 반 강요 비슷한 설득에 또다시 굴복하여 산림청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자마자 9급 신규 직원임에도 국가예산 업무와 수십억 대 산림사업 계약 업무를 부여받았다. 

  가족들이 생각하던 그런 한가한 산림청이 절대 아니었다. 난이도도 높고 국가예산이라 1원만 실수해도 중대한 리스크를 짊어지는 그런 업무들이었다. 국가 재산 관리는 보너스였다. 그래도 버텼다. 

  사람들이 좋았고 어쩔 수 없이 정기적 진료받으러 병가를 낼 때면 모두들 내가 있으니 걱정 말고 다녀오라 하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업무는 힘들었지만 견뎠다. 박봉인데 공제는 어찌나 많은지.... 워라밸은 개나 줬는지 야근 안 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어느 날 팀장의 자리가 공석이 되었다. 그럴 땐 차석이 팀장 대리를 해야 하지만 책임감 없고 무능한 사람이 차석이었기에 8급에 팀장 대행까지 맡게 되었다. 어느 날 격무에 시달리다가 잠시 졸았나 싶었는데 응급실에 누워있었다. 과로로 쓰러져서 119에 실려왔다고 들었다. 

그리고 몇 달 후 다음 팀장으로 온 사람은 마음에 안 들면 직설적으로 독설을 내뱉고 소리 지르고 대항하여 싸우고 하면서 안 그래도 산림에 관심이라곤 0.0001%도 없고 일만 많아서 지방직으로 옮기려 했으나 좋은 동료들 때문에 남았었던 것이었는데 그 팀장이 트리거가 되었다.


나는 지체 없이 인사혁신처 인사 교류를 통해 지자체로 넘어왔고 처음엔 좋았다. 상대적으로 업무량도 적고 복지나 수당이 훨씬 많았다.(비교적인 수치일 뿐 박봉인건 여전했다. 공제는 더 많아졌고.)  그러나 점차 후회의 감정이 들기 시작했다. 

  읍 행정복지센터로 발령받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모르는데 당연히 알 것이라는 듯이 가르쳐 주지도 않고 지시만 했다. 그게 뭐냐고 할 때마다 싫어하는 티가 났다. 난 개의치 않았다. 아무리 국가직이었다 해도 완전히 다른 시스템인 그곳에서 완벽히 상반되는 상식을 가지고 있을 때 실수를 나무라면 나는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 그걸 내가 어찌 알았겠느냐고 반문했다. 


  이런 일들이 쌓이니 내 업무능력은 높아갔지만 그 지역 토박이들은 오래전부터 알음알음 알던 카르텔과 같이 엮여 있어서 타지인에, 말대꾸하고, 장애까지 있는 나를 대놓고 차별했다. 병원 때문에 병가를 내야 하는 날에도 같은 팀원이 "제가 왜 주사님 일을 대신해 줘야 하는데요?"라는 말을 듣기 일쑤였다. 난 그럼 하지 말라 했다. 하라고 한 적도 없는데 혼자 해놓고 왜 난리냐고만 했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질 테니 그냥 하지 말아라 하기 싫으면. 그러면 또 왜곡된 소문이 돌아서 나는 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팀장에게 대놓고 차별하는 카톡 받은 증거를 들이밀어도 그자를 감싸기에 급급했다. 결국 더 높은 읍장 면담까지 했고 읍장은 말만 들어줄 뿐 실질적 변화엔 관심 없는 듯하였다. 그래서 상위 인사과까지 직장 내 따돌림에 대한 고충을 넣었다.


말로 하자면 길지만 아무튼 그로 인해 심신이 더욱 쇠약해져 갔고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얻은 무릎뼈경색(항암치료로 인해 무릎뼈 쪽 혈관이 죽거나 매우 좁아져 원활한 산소 및 영양공급이 되지 않아 뼈세포가 괴사 해가는 증상)으로 인해 지팡이 짚고 걷는 상태가 되었다. 스트레스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부끄러운 과거지만 박봉이라서 멘탈이 흔들릴 때 접근한 사기꾼 때문에 빚을 크게 졌고 갚기 위해선 일해야 했지만 더 이상 일할 상태가 아니라 휴직을 낼 수밖에 없었다. 


질병휴직 중 법령에는 본봉의 70퍼센트 지급이라고 되어있었으나 공제는 그대로이고 수당 모두 다 빼기 때문에 실수령은 50퍼센트 정도였고 그 돈으론 빚 한 달분 조차 갚을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께 용돈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고 언제 복직할 거냐, 너 때문에 우리 노후대비 안 된다. 죽더라도 일하면서 죽어라 등 평소 같으면 부모님일지라도 용납할 수 없는 폭언의 치욕을 참아내면서 일할 때 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게 되었다. 


공무원 같은 직장 생활하며 망가진 몸과 정신 이를 고치려면 공무원 사직밖에 답이 없었다. 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반대가 극심했고 자식의 건강은 알 바 아니고 본인의 노후만이 중요하다는 부모님의 말에 가족으로서 배신감도 느꼈지만 다 내 잘못이라고 여기며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의 무력감에 절망했다. '이럴 거면 암 걸렸을 때 차라리 죽었어야 했는데' '물려줄 재산 자산 하나 안 모아놓고 큰소리는' 이런 남 탓, 세상 탓 그 자체의 생각도 많이 했다.


고뇌가 심했다. 나는 공무원 관두고 아직 복학 가능한 대학교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학비가 문제였다. 그렇다. 모든 것은 돈이 없으면 안 되는 세상이구나. 참으로 씁쓸했다. 나는 자식을 낳아본 경험이 없지만 만약 낳게 된다면 어떤 꿈을 갖고 꼭 하고 싶다고 하면 간과 쓸개를 다 내주어서라도 꿈을 이루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첫 번째 질문인 나는 왜 태났을까? 여기엔 답이 없다. 그냥 우연히 암에 걸렸듯이 우연히 태어났을 뿐.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태어난 김에 살 것인가? 그것을 인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절망에 빠져 살다가 20살 때 습작으로 쓴 소설(시놉시스에 가까운) 파일을 클라우드에서 발견하여 읽어보았다. 

그래 난 글 쓰는 것 또한 좋아했었지. 그렇게 그 습작들과 시험 삼아 작성해 본 첫 포스팅 글 등을 첨부하여 카카오브런치 스토리 작가 신청을 하였고 바로 합격했다. 별건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기쁨은 있었다.


물론 꿈과 현실은 다르다. 나는 잘 나가는 SF 작가가 되어 소설가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지만 필모그래피에 당장 한 줄 적을 대학교 이름조차 없다. 하지만 상관없다. 블로그든, 브런치든 간에 돈이 되건 안되건 글 쓰는 게 난 좋을 뿐이니 이것이라도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에 시작하게 되었다. 30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블로그의 생태 등 아무런 노하우도 없이 맨땅 박치기로 시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작심삼일이 될지는 두고 봐야 아는 거겠지. 


나는 남에게 내 치부(흑역사)를 드러내는 데에 개의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조차도 실제로 있었던 사실이자 내 인생의 한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걸 부정하면 난 스스로를 부정하는 것이라 믿기에 그냥 솔직히 있는 그대로 말해왔다. 개중에 색안경 끼는 사람이 참 많았다. 하지만 소수의 마음이 잘 통하고 나의 진가를 알아주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1천 배 이상 가치 있다고 믿는다. 


머릿속엔 훨씬 많이 하고 싶은 혼잣말이 존재하지만 몇 시간 동안 썼더니 이 육체로썬 너무 힘이 든다. 


위에서 말한 다음에 말하기로 한 디테일한 경험들은 차차 풀어나갈 예정이다. 


 * 위 글은 저만의 생각을 때로는 정리하여 때로는 프리스타일로 나오는 대로 마음껏 쓰는 것이니 경어체를 쓰지 않는 것에 부디 불편하시지 않길 바랍니다. 혹시라도 읽어주셨다면 감사드리며 인생 선배님들의 훈수, 건전한 비판, 혹은 공감 가시는 분들께서 어떠한 형태로라도 관심을 표해주시면 더할 나위 없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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