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사각공간 Jun 17. 2022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참 의미 ─ 서점일기 6.17-3

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그러니까 요는 '다큐'로 여길 걸 자꾸 '유머'로 넘기려는 데서 불거지는 문제 아니냐는 것. 그런데 이렇게 문제 삼으려 들면 "Why so serious?!"라고들 한다. 이렇게 이유를 묻는다면 대답해드리는 게 인지상정. 무관심보다 반갑지 아니한가??




거두절미하고 결론부터 이르자면, 각 지체로 서로 다르다 의식하지만 실상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의식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 임을 의식하는 데서 비롯하니, 서로 간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면면의 차이를 두고, 차별을 제조하고 배제를 작동시키는 그 혐오를 문제삼는 것. 개체 간 차이가 자연 상태가 빚는 불완전한 존재의 자연스러움일지언정, 그 차이를 바탕으로 하는 차별과 혐오는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외려 인위의 산물로 부자연스럽고 부적절하다는 것.


이렇게 제각각 다르건만 어째서 하나라 하는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도 그것이 육신 입은 인간 개체로 어려우니 지켜야 마땅한 계명으로, 당위로 세운 게 아닌가? 말로써 목에 칼을 씌운 게 아닌가?! 하나 임을 의식한다는 표현은 말로는 그럴싸 하여 아름답지만 현실과는 무관하지 않은가? 그저 스스로를 도울 수 있을 뿐인 인간으로 딱 그만큼, 그에 해당하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들과 부류로 끼리끼리 유유상종하며 위로하는 정도 아닐까. 사실 이것도 노력해야 가능한 관계로 큰 일 아닌가. 조금만 벗어나면 '손절' 일삼는 층위의 관계. 이해를 타산하는 합리적 인간으로 서로 간 물심 양면으로 손해 끼치는 바 없어야 지속가능하니 다름 아닌 그 '관계' 아닌가?


옳다. 적어도 이 체계 안에선. '시저의 것은 시저에게'라는 예수의 말처럼 속세에 들어선 법칙으로 물산의 유통과 또 그를 닮은 인간 정서는 화폐를 매개로 하는 거래에 기반하여 있으니. 자유는 그래서 경제라는 울타리 내로 국한하여 추구. 법과 제도로 받치는 계약이 관계의 본질인 것처럼 자리해 있으니 세간.

하면 '천부인권'과 직결인 '자존'은 따로 고취/북돋울 필요 또한 없다. 그러나 번번이 침해 당하기 일쑤이니 상호불가침 만이 강조, '다름'을 주장하는 '당신이 옳다'는 식의 달콤한 메시지만 쫓아 귀를 기울일 법도 하다. 왜냐하면 그러지 않아도 나서[生] 죽기[死]까지, 늙어[老] 병(病) 앓는, 고통으로 점철인 인생이니.


이렇게 보면 '해탈'이라는 하나의 길을 열어보인 석가모니가 나면서 일렀다는 말 역시 개체성의 강조로나 읽힌다. 오로지 나로 홀로 존귀하다는, 유아독존(唯我獨尊) 메니페스토. 관계의 본질이 계약인 만큼 불가침이 기본, 화폐라는 매개 수단으로 불필요한 개입 줄이는 경제적 소통을 당연시하는 합리적 인간 임을 선언,하는 것처럼 여길 수도 있겠다. 유니크한 개성으로 나라는 개체야말로 유아(唯我)인 만큼 오롯[獨]하니 이 얼마나 특별하고 존귀(尊貴)하냐고. 그럴싸하다.


그런데 나서 죽기까지 허(虛)에서 무(無)로, 사라지기까지 달음질 연속하는 개체에, 해탈이라는 '다른' 길을 열어 보인 석가가 과연 개체성에 집중하였을지 의문이다. 불경 비롯하여 읽은 바를 제 사유의 뜰로 들여선 이리저리 살펴본 이라면 막연하게나마 느낄 텐데, 오히려 진리(眞理)든 법(法)이든 도(道)든 이르는 바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것이라 지칭이 마뜩찮으나 가리키려는 데에 매이지만 않는다면!)이야말로 참 자아의 실체로 감각한 게 아닐까 하는!! 이를 바탕으로 치환하면 유아(唯我)는, '나'라고 여기는 이 개체로 육신에 갇힌 소아(小-我)가 아니라 저 진리요, 법이요, 도라는 그야말로 길이요 생명인 대아(大-我) 아니겠냐는 것. 해서 그러한 대아로 결집되는 우리 안에서 발현되니 곧 신(神)이지 않겠냐는 것. 따라서 바람직한 바를 쫓으려는 소아들로는 절로 이 대아에 접속 아니할 수 없으리란 것. 역으로 대아에서 비롯한 지체로서 소아인 만큼 매순간 감각이 대아로 총체 이룬 그 진리/법/도.etc의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침은 가리키게 마련이라는 것.


때문에 여러 지체들로 본디 하나의 통속으로 갈래일 뿐인 만큼 서로 사랑 가능하다는 것이 예수가 일러 남긴 말이 가리키는 참 상이지 않겠냐는 것. 플라톤에 의해 기록된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고자 하라는 권유 또한 이를 전제하고 살피면 단박에 이해된다. 그것은 고유하다는 나 자신의 개체성에 집중하려는 착각을 벗는 데서부터 트이니 문리(文理) 임과 상통하는 게 아닐지.




21세기에 이르는 성현의 말씀이 가리키는 바를 거듭하여 살필 수록 결국 나라고 여기는 이 물건에 대한 집착을 '모르는' 상태로 '다름' 만을 서로 간 주장하며 견주는 모습임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각자도생? 가당키나 한가 말이다. 그러니 약육강식 전제로 적자생존을 내면화하고서 갈(葛) vs 등(藤) 일삼는다. 사이에 걸린 외줄 타는 인생이라니 개체로 우쭐거리는 모양새 얼마나 한심한가 말이다;; 우리로 결집 이루는 속에서 겨우 실감하니 오롯함이다. 이것이 유아독존의 참 의미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일상적 혐오 ─ 서점일기 2022.06.17.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