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공간 - 시간, 공간, 인간, 행간
서점일기
식사단상 : 간편 조리식 불고기 해동 간(間) 콩나물 다듬으며.
아침 나절부터 콩나물 대가리를 똑! 똑! 따고 있자니 먹는 일의 위대함보다 소요되는 시간이 아쉬워 슬몃 짜증부터 인다. 정말이지 스스로 챙기자니 먹는[食] 것도 죄 일[事]. 그러니 재료 준비부터 조리하여 내기까지 과정 간 소비되게 마련인 노동력을 타인이 부담하면 그에 부합하는 값을 치러야 마땅. 당연하다.
이를 전제하면, 가사 노동 전담에 따르는 주부의 스트레스를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 그러나 상당수는 머리로 이해한다면서도, '주부로 전업이면 이미 분업인데 뭐가 그리 힘들고 괴로울까. 바깥 일은 만만한가, 나도 힘들다'로 잇는다. 그러니 깊어지는 골.
요는 이렇다.
혼자 1인 가구로 삶을 영위할 적엔 저마다 그저 제가 감당하면 그만. 그야말로 단순히 1인분이어서라기보다 그 자체가 온전히 '나'의 소관이란 얘기. 그런데 말처럼 '분업화' 체계에 들게 되면서 그러니까 제도화된 결혼을 의례로 통과하면서부터 개인은, 배우자와 함께 노동력 재생산 최소 단위인 '가정' 그러니까 경제 공동체를 책임지는 역할 수행의 구성원1, 2가 된다. 입장이 달라지고 처지가 뒤바뀌는 것. 내키는 대로, (미루고 미루다) 치뤄내듯 처리해도 그만이던, 제 손아귀 속 일로 장악 하여 핸들링 가능하던 것들이 혼인 문턱을 넘어서자마자 하지 않을 수 없고, 해야만 하는 '일'이 되어버린 것. 그것도 2인분을 '분업'이라는 미명 아래 홀로 감당해야 한다.
하면 바깥 일 또한 동일한 수준으로 그렇게 느는가? 그렇진 않다. 물론 혼자서 병행하던 바깥 일에서 손을 놓는 전업이면 그렇게 기우는 건 아니지 않나 할 수 있지만. 사회적 동물로 길러진 문명인으로 사회라는 '광장'을 뒤로하고 둘 만의 '밀실'에 거하는 게 마냥 행복할까. (행복, 하겠어요?! 아이고 주여 -_-;;) 꽉 막힌 폐쇠회로 지경이 아니면 이해하지 싶다.
그래서 젊은 세대부터 홀몸 건사가 차라리 속 편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란 얘기. 사실 경제적 안정이 최소 단위로 보장(이를 테면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 최저 수준 보장)된다 하여도 이러한 경향은 쉬 바뀌진 않을 성싶다. 이미 정체성 확립과 자아 실현에 대한 욕구가 비할 데 없이 성장한 마당. 그러니 가부장제를 향수하는 전근대적 회귀를 꿈꾸는 저출산 방지/출산 장려책이라면 실패가 명약관화. (관계 부처 비롯 정책 입안자든 기안 실무자든 제발 정신 좀 차렸으면 -_-;;)
가전제품 성능이 제아무리 뛰어나봐야 아직까진(출시 기준)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과정들로 여전히 산재. 따라서 신경을 쓰는 만큼, 손이 가는 꼭 그만큼, 일은 일로써 시간을 빼앗는다. 어떤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어도 그만인, 그저 자기 만의 시간.
『19호실로 가다』에서 도리스 레싱은, 옴짝달싹 가능한 '밀실'이야말로 인간에게 필수불가결함을 드러낸 바 있다. 그와 같은 '공간' 못지 않게 중한 것이 심리적 '밀실'로 제 '시간'일 테지만. 그러니까 한가로이 몸을 부려놓고 멍할 수 있는 시간이야말로, 누구에게든 방해 받지 않고 홀로 거하는 '밀실'과 같다는 이야기. 아무튼 대개의 갈등은 이런 사소한 바람을 도외시하는 데서 비롯한다. 무딘 감각이 문제라는 것. 유불리를 따질 건 아니다만, 때문에 섬세함은 절로 우위를 점하게 마련이다. 가려운 데를 알아서 긁어주는 것처럼 후련한 것도 드물지. ─ 한편 그래서 외도는 떼려 해도 떼어지지 않는 것이랄 수도 있겠다. 섬세를 모사하며 파고들어 공략. 속칭 제비/꽃뱀이 하는 짓거리가 죄 이런 만큼. 이런 유사 체험에 혹하여 탈탈 털리는 '이춘풍'은, 이 시대 우리 속에서 끊임없이 귀환한다.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말이지. 한심하지만.. 그만큼 또 안타깝다. ─ 채플린도 그래서 멀리서 건너 보면 아름답고 가까이 하면 괴롭다 한 것이다. 셰잌스피어를 경유한 맑스를 지젝 다시 장전, 처음에는 비극 다음에는 희극이라 거듭하여 이른 것이고.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고. 그렇지. 이때 'Right now'는 여러 갈래로 뻗는 게 가능한 잠재-태. ─ 그러나 어찌 되었든 자업자득 결자해지는 여전히 저지른 자의 몫이니 감당하게 두면 그만. 외려 책임지도록 함이 중하다. 이런 데에 관대한 사회. 실은 관대한 게 아니라 법이 무른 것. 물론 항시 신설/입법이 만능 해결책은 아니겠지. 다만 고의성 입증이면 중과는 필수. 이를 작동시키는 압력으로 '일반의지'는 실존해야 할 터인데.. 외려 퇴행 지경이니 새로운 문제로 촉발;; 다시, 요는 섬세. 이는 분/초를, 순간으로 또 찰나로 그러한 미세한 단위를 자기 자신으로 살아낸다는 것을, 살고 있음을 감각으로 경험하는 데서 비롯한다. 해서 이런 경험은 일개인에겐 물론이거니와 사회 전체로 보아도 매우라고 해도 과언 아닌 정도로 중하다 하겠다. 이것이 쌓임으로 해서 과거는, 한낱 화석 아닌 당장을 지탱하는 토대와 반석으로 한 사람의 내면에 구체적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 이런 것들이 받침되는 한에서 비로소 인간은 나아간다, 나아갈 수 있음이다. 이르자면, 힘의 본질이겠다.
이처럼 연거푸 일어 꼬리를 무는 생각을 쫓다보면 정말이지 결혼? 그처럼 무거운 짐을 함께 지자고 지어보자고 하기 쉽지 않겠다. 게다가 이렇게 망설이면서 가까스로 성사된 초혼도 그르친 마당이라면 하물며.. 재혼이라니 언감생심이다. (미치지 않고서야 섣불리;;)
2인분(자녀까지 염두에 두면 +α) 일거리를 1인분과 다를 바 없이 감당 가능한 시대가 과연 도래할까. 신기루 마냥 닿을 것처럼 보이지만 끝내 가닿을 수 없는 유토피아로 그저 판타지일지 모르겠다. 물론 발전/혁신은 그를 목표로 이뤄졌다지만 계획적 진부화로, 태반의 임노동자에겐 항시 그림의 떡으로나 존재하지 않았나 싶은, 따위의 발전이니 혁신이니. 아~ 나는 모르겠네~~;; 와중에 사람의 역사는, 자존감은 체감하고 일은 일대로 체증하였음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지. 타인에 부담을 전가하는 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 양심 실종 지경이 소수로 점점 좁혀지는 걸 목도하는 한편, 이제는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기조차 두려워하는 태반이, 그저 그런 향락으로 누린다는 여유를 부러워하는 모양새이니 정말이지 어쩌려고 이러는지 모를 일이다. 돌이켜보면 나름의 깜냥으로 누리고 살았다 싶으니 후세에겐 미안할 따름인데 이거 이렇게 '뭐 어쩌겠니' 하고 손 놓고 있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