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가자
늦은 밤,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보러가는 골목들 사이에서 길을 잃었다. 불과 세달 전에 왔던 길인데 어쩐일인지 구글 지도를 켜놓고 아무리 찾아도 나는 자꾸만 길을 잃었다. 나를 따라 한참이나 유럽의 돌길을 헤매던 엄마는 슬쩍 수술한 무릎을 문지르다가 내가 엄마쪽을 보면 힘들지 않은 척 표정과 자세를 다잡았다. 나는 못 본척하고 다시 태연하게 길을 찾았지만, 심장이 목끝에 붙어 오도도도 뛰고 있었다. 내가 불안해하면 엄마는 분명 엄마는 야경 안봐도 괜찮아 우리 힘드니까 그만 돌아가자 라고 할테니까 나는 더 매정한 표정을 짓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오늘 부다페스트 야경을 꼭 보여줘야 하는데... 엄마가 정말 좋아할건데..."
땀까지 뻘뻘 흘리며 길을 찾는데, 설상가상으로 나는 바지에 생리혈까지 묻히고 말았다. 양이 많아 넘친건지 허둥대다가 샌건지 엉덩이쪽이 흥건하도록 생리혈로 젖었다. 축축한게 땀때문인지 피때문인지도 모르고 초조한 심장을 부여잡고 길찾기에 열중하던 나에게 엄마가 말했다.
"웅비야, 바지 뒤에 생리가 묻었네 어머 어떡하니
얼른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엄마는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어떡하니어쩜좋니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아 진짜 오늘 왜이러지, 속에서 욕지거리가 꼬약꼬약 피어오르는데,
"아 몰라, 밤인데 누가본다고그래 몰라몰라"
신경질적으로 대꾸하고는 다시 길찾기에 몰두했다.
'오늘밤에 못 보면 영영 못보는거야 오늘 반드시 봐야해'
그렇게 심장은 더 빠르게 뛰기 시작하고, 그 치닫는 박동과 긴장감때문에 나는 억 하고 잠에서 깨어났다. 몸은 땀으로 젖어있었고, 생리대의 느낌이 묵직했다. 아 꿈이었구나...어떻게 이런꿈을 꿨지...
꿈에서 깨어나서도 몇 분을 멍하니, 어떻게 이렇게 선명하고 생생한 꿈을 꿨을까 심장이 계속 뛰었다. 꿈 속에서의 흥건한 느낌이 계속 이어져서, 분명 이불에 생리가 묻었을거야 확신하면서도 쉽게 일어나지 못 하고 땀으로 축축한 몸을 한채로 계속 누워있었다. 노란 등이 비추던 그 어두운 골목이, 무릎을 만지던 엄마의 손과 얇은 다리가, 이대로 야경을 못 보고 말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감이 나를 감싸고 한참을 떠나지 않았다. 이 꿈 뭐야 진짜
올해초만해도, 그리스를 떠나는 건 계획에 없었다. 나는 내가 계속 그리스에 살 줄 알았다. 작년부터 엄마랑 통화할 때면 빼놓지 않고 말했다.
"내년에는 꼭 엄마 그리스와서 나랑같이 여행 다니고 살고 그러자, 일년에 삼개월만 그렇게 보내도 내가 그리스에 오래 살아도 괜찮을거야. 우리 같이 일년에 삼개월씩 유럽 여행 다니면 너무 낭만적이겠지."
잔뜩 부푼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엄마도
"그러자, 엄마도 이제 일 줄이고 웅비있는데가서 살아야겠다."
하고 말했다. 나는 우리가 여행을 다니면 돈이 얼마나 들까, 그리스에 엄마랑 같이 살집을 구해야겠지, 이것저것 고민하고 준비하며, 엄마에게 유럽을 구경시켜주는 상상만하면 사는게 뿌듯해졌다. 일을 그만두면서 가장 먼저 한 고민이 '그럼 엄마는 어떡하지?'였다.
결국 엄마와의 유럽 여행은 체념했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 그 일은 까맣게 잊은 채 이제 슬슬 취업준비를 해야하나 생각이 들던 찰나, 이런 꿈을 꾸었다.
신의 계시인지, 내 마음속 응어리가 이렇게 정체를 드러낸건지.
하필 부다페스트인것은 내 마지막 유럽 여행지기도하고, 온천이 많은 그 도시에서 하루 종일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할룽할룽 걸어다니며 여기는 엄마들이 오면 너무 좋아할 곳이다 하고 같이 여행한 동기들과 멀리 있는 엄마를 그리워하며 대화한 게 깊이 남아서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는 입사동기라는 것 외에도, 각자 집에서 사랑 많이 받고 자란 예쁜 딸들이라는 거, 이렇게 멋지고 좋은 걸 혼자만 봐서 늘 아쉬워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래서도 저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엄마랑 같이오면 너무 좋을거야 하고 저마다의 하늘로 시선을 던진 채 말했었다.
꿈은 잊혀지지 않았다. 잔상이 머릿 속에 진하게 남았다. 노란 가로등이 켜진 골목길, 그 길을 헤매는 엄마와 나. 며칠 뒤, 퇴근하고 돌아온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 우리 오로라 보러갈까?
엥? 오로라?
어리둥절해하는 엄마에게 꿈 이야기를 해주었다. 너무 생생하고 무서운 꿈이었다고 어리광을 섞어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그 꿈을 꾸고는 생각했어. 올해 내 가장 큰 목표는 엄마를 그리스에 데려와 같이 살고, 쉬는 날 때때로 유럽의 여러 나라들을 여행다니는 거였는데 그걸 못하게 된게 내 마음 속에 한처럼 남았었나봐. 나도 모르는 새에 응어리졌었나봐. 내가 벌어온 이 돈을 지금 쥐고 있으면 나중에 그 돈으로 뭘 할 수 있을까? 오히려 그 때 그 돈으로 엄마랑 여행하지 않은 걸 두고두고 후회하지 않을까? 내가 언제 또 이렇게 길게 엄마랑 여행을 할 수 있겠어. 지금이 일생일대의 기회인 것 같아. 이 여행이 가져다 줄 추억과 돈을 저울질 해보니까, 택도 없이 돈이 아무것도 아니더라. 우리 오로라 보러가자."
엄마는 내가 하는 말들을 가만 듣고 있다가,
'그래 가자' 하고 대답했다.
그렇게 엄마와 나의 오로라여행이 결정됐다. 더 이상 미룰 것도 없이 출국은 8월 31일, 다음 주다.
일기장도 가져갈거고, 필름카메라도 가져갈거다. 밤에 엄마랑 같이 누워 오늘 뭐 봤나 사진들을 구경하고, 엄마는 엄마의 일기를, 나는 나의 일기를 적어나갈거다. 13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나는 이 13일이 어쩐지 죽기전에도 떠오를 결정적 여행이 될 것임을 직감한다. 그 하루하루를 여기에도 기록하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