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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숙희 Feb 14. 2019

입술이 다 부르트도록 속상한 날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끓여주고 싶었는데

약 4개월이 지나서 다시 연재하는 엄마와의 유럽여행기.

아무래도 좀 민망해서 변명을 해보자면,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빴고

취업을 하고서 적응을 하느라 바빠서 시간가는 줄을 몰랐다.

정신을 차리니 벌써 2019년 하고도 2월이 지나가는 중이고

도대체 다음편은 언제 올라오는거냐는 친구들의 재촉에 아차! 하고 다시 쓰는 중이다. 

네달만에 이어쓰는 암스테르담 둘째날 이야기.


이 날은 아침에 아파서 눈을 떴다.

전 날 저녁에 사먹은 감자튀김이 문제였는지 체해도 단단히 체해서 몸을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심하게 체하기도 처음인데, 어느정도였냐면

약국가서 약 하나만 삼키면 금방 나을 걸 알면서도 몸이 움직여지지 않아서 침대위에서 몇 시간을

끙끙 앓고만 있었다. 오죽하면 영어 한 마디 못하는 엄마한테 약국 지도와, 약을 달라는 영어를 쪽지에 써줄테니

가서 쪽지를 내밀고 약을 사다줘 라고 부탁을 할 정도였다. 

엄마는 당연히 무서워서 못 한다고 했고, 내가 아프면 뭐든 해 줄 엄마가 또 얼마나 무서웠으면 못 하겠다고 할까 이래저래 아무것도 못 하고 아프고만 있었다. 그러다가는 진짜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엄마의 부축을 받고 현관을 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까지 내려갔는데 머리가 핑 돌고 앞도 잘 안보이는게

도저히 안되겠어서 다시 집으로 올라가 침대 위에 쓰러졌다. 집으로 들어가는 현관에서는 거의 다리가 풀려

엄마가 아이고 웅비야 하며 부축했던 게 기억나고, 그 뒤로는 어찌어찌 침대로 가 지쳐 쓰러져 잠이 든 것 같다.



 

나의 구원, 드디어 약을


그리고는 또 한두시간쯤 기절해있었을까.

눈을 뜨니 아주 조금 나아진 것 같아서 다시 엄마의 부축을 받으며 약국으로 갔다.

약국이 도보 7분 정도 거리였는데, 너무 힘들고 몸이 아파서 약국 가는 길이 천리길이었다.

의자만 보이면 앉아서 쉬었다 가고, 쉬었다 가고...

겨우 약국에 도착해서는 약을 샀다. 친절한 약사가 바로 물을 떠다줘서 그 자리에서 바로 먹었다. 

진짜 얼마나 심하게 체한건지, 약을 한알 삼키고는 안도하려는 찰나 다시 헛구역질이 올라와서 종이컵에 약을 그대로 토해내고는 "안돼 약 꼭 먹어야 돼ㅠㅠ"

마음을 굳게 다잡고 다시 약 한알을 물도 없이 꿀떡 삼켰다.



그리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데 또 그 짧은 길이 너무 힘들어서 의자만 보이면 앉아서 쉬고 쉬고

집을 2분거리쯤 남겨두고 또 앉아서 쉬는데 그때 나는 누가 봐도 병자같은 모습이어서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혹시 임산부냐며 도와줄 일 없냐며 물어보기까지 했다. 

다 큰 딸은 시름시름 앓고 옆에서 엄마가 안절부절 부축하는 모습이라 임산부라고 생각했나? 


엄마의 최애드라마 사랑과 전쟁


이번엔 다행히 약을 토해내지 않았고, 나는 다시 침대에 쓰러져 잠이 들었다. 

약을 먹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약이 바로 효과가 있었던 건지 금방 잠들어서 깊게 잤다. 

그 와중에 내가 계속 자면 엄마가 얼마나 심심할까 싶어, 노트북에 다운 받아온 사랑과 전쟁을 틀어주고 잤다. 

나 잘자라고 커튼을 다 쳐놓고, 어두컴컴한 방에서 나는 잠들고 엄마는 사랑과 전쟁을 봤다. 

두시간쯤 자고 일어나니 몸이 가뿐했다.

고작 몇 시간 전에 쓰러질 정도로 아팠던 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로 싹 나았다. 역시 네덜란드. 약 잘하는 나라.



얼마나 싹 나았냐면 

일어나 주방으로 나가서 한국에서 사온 햇반에 김에 낙지젓갈, 김치찌개를 다 뜯어서

거하게 신나게 식사를 했다.

내가 봐도, 두시간 전에 체해서 쓰러졌던 사람 맞나 싶게 아주 잘 먹었다. 



그리고 문득 엄마를 보니, 엄마 입술 주변에 포진이 생긴 것처럼 다 부르터 있었다. 


"엄마 입술이 왜 그렇게 다 부르텄어?"

"웅비 걱정하느라 그랬지..."


엄마는 피곤하거나 속상한 일이 있으면 입술이 가장 먼저 부르트는데,

내가 아파서 누워있는데 약을 사다주지도 못 하고, 따뜻한 보리차 한 잔을 끓여주고 싶은데 그것도 못 해서

옆에서 멀거니 앉아만있느라 속상해서 그새 입술이 다 부르튼거였다. 

이 집 주방에 가스불을 올리는 방법이 아주 약간 복잡해서, 집주인이 포스트잇으로 순서를 적어놨었는데

나는 내가 하면되지 라는 생각으로 엄마한테는 가스불 올리는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한테 따뜻한 보리차 한 잔도 못 끓여줬다. 그게 마음 아파서 입술이 다 부르텄다. 


내가 아프면 입술이 다 터지도록 걱정하는 사람이랑 보낸 네덜란드 2일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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