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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호텔 일기 (1).

 호텔 좋아하는(?) 아저씨의 런던 차링크로스 역 근처 호텔 상상

먼저 호캉스, 라는 말이 싫은 이유



언젠가부터 호캉스라는 말이 쓰인다. 호텔에서 바캉스를 즐긴다는 말일 텐데, 그런 식의 조합을 썩 즐기지도 않을뿐더러, 장소에 별다른 품격을 부여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인 것 같아서 아저씨의 입장에서 사용하기 싫다. 말에 품격이 없기 때문이다.

장소엔 어떤 품격이 있다. 할머니의 집엔 할머니의 고즈넉한 삶이 드러나는 품격이 있고,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엔 또 그것을 극복하는 품격이 있을 수 있다. 다만 그 품격을 눈치채고 발견하는 사람과 그것을 모르거나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장소에 나름의 이야기와 역사가 덧붙여지면 품격을 넘어 신화까지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장소에 품격이 형성되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먼저 시간이 필요하다. 공무원들이 장소에 이야기를 입히기 위해 기안을 올리고 예산을 편성하지만 대개 불필요한 일이다.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무심하게 지나치지만 늘 그 장소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시간. 

장소가 가지는 품격에 대해 생각하기.

차링크로스(Charing Cross) 역은 그렇게 썩 유명한 역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셜록 홈스가 등장하는 추리 소설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기억할 만한 장소이다. 홈즈는 CC, 즉 차링 크로스 역 근처의 호텔을 조사하면서 단서를 찾아간다. 홈즈를 따라 백여 년 전의 차링크로스 역 근처 호텔을 탐험하는 것은 놀랍도록 재미있는 일이다. 


아마 전 세계의 홈즈 팬들이라면 한 번쯤은 차링크로스 역에 가보고 싶지 않을까. 백 년 전의  차링크로스 역 근처 호텔의 컨시어지들은 단골 고객들의 명단을 수첩에 적어 보관했다. 명단엔 이름만 적혀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객들의 특징, 구두 닦는 소년에게 팁을 주는지에 대한 여부에서부터 자주 입는 옷, 자주 들르는 상점, 좋아하는 음식과 심지어 데리고 다니는 하인들의 이름까지. 셜록 홈스는 의뢰인에게 의미 있는 조언을 해 주기 위해 이 컨시어지들의 수첩을 활용하고 싶어 했다. 


나는 책을 덮고, 차링크로스 역 근처의 호텔을 상상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이후에 세워진 별 세 개짜리 싸구려 호텔은 제외했다. 그런 호텔은 아직 품격이 생기기 전의 호텔이다. 내가 관심 있는 곳은 셜록 홈스 시절부터 지금까지 영업을 하고 있는 호텔이다. 


나는 그런 호텔을 꿈꾼다. 정문엔 웰컴 인사와 발레 파킹만 사십오 년째 하고 있는 인도인 와하브라씨가 투숙객을 맞아 준다. 와하브라씨의 딸 하루다는 캘커타 국립 공과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는데 회사에 취직할 생각은 안 하고 여행만 다니고 있는 중이다. 와하브라씨의 상양한 인사를 받은 투숙객 중 일부는 하루다의 안부를 묻는다. 와하브라씨는 웃으며 고개만 절레절레 저을 뿐이다. 로비는 백오십 년 전 그 모습 그대로 꾸며졌다. 물론 투숙객 기록은 컴퓨터로 하지만 홍차와 만년필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나는 컨시어지에게 작고 값이 싸면서 구석에 파묻혀 있는 방을 원한다고 말한다. 컨시어지는 나에게 “뭔가 대단한 글이라도 쓰시려나 보군요.”라고 ‘쌀쌀맞으면서도 친절한’ 서비스를 해준다. 

관점에 따라선 베르사유 궁도 어느 정도 천박하다.

나는 호텔이 이윤을 추구하는 곳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호텔은 대개 천박한 자본의 장삿속과 노동 착취로 이루어져 있다. 품격 있는 호텔처럼 보이는 곳들도 대개  그 모양이다. 그래서 호텔에 품격이 없다. 호텔의 인테리어는 대개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래서 호텔은 스스로 품격을 포기하고 싸구려 인테리어 전시장으로 만족한다. 그래서 호텔은 자본가의 천박함과 노동자의 고통과 투숙객의 싸구려 감상평만 서로 겹친 채 뭔가 인테리어만 그럴듯한, 이도 저도 아닌 공간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외국엔, 워낙 호텔 평론가도 많고 무형의 품격을 원하는 고객층도 많아서 제법 그럴듯한 호텔도 존재하지만 한국엔 이렇다 할 호텔 문화도 없고, 호텔 문화는 고사하고 자본이 어떻게 우리 사회 속에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도 문화도 없는 터라, 이렇게 말하면 그렇지만, 그저 그냥 아무것도 없다고 보는 편이 옳다. 

호텔 문화는, 혹은 호텔이 지녀야 할 품격은, 뭐 그런 것까지 따지며 사느냐는 핀잔을 들을만한 것이지만 반대로 반드시 필요한 어떤 것이기도 하다. 호텔의 품격은 호텔 노동자를 대하는 태도, 자본가들의 정신, 그리고 호텔과 투숙객이 만들어가는 이야기와 역사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아무것도 없다. 자본은 반성하지 않고 품격이란 꾸미면 되는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투숙객들은 등산복을 입고 호텔에 들른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 것일까. 참 어려운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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