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벌새> 읽기
영화를 다시 읽기 전, 드는 첫 번 째 의문.
“왜 은희는 첫 번 째 장면에서 자기 집을 놔두고, 902호의 벨을 눌렀나?”
은희는 중학교 2학년 평범한 여학생이다. 평범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영화 주인공인데, 평범하다니. 말만 평범하다고 하고선 사실 숨겨진 엄청난 재능이나, 안경을 벗으면 드러나는 미모나, 하다못해 인도에서 다이아몬드 사업을 하는 아빠 정도는 있지 않을까. 아니다. 진짜 평범하다. 은희의 부모님은 방앗간을 하고, 언니는 자꾸 남자 친구를 방에 데려오며 엄마는 아빠와 싸우고 화해하고 은희에게 감자전을 부쳐준다. 더 이상 어떻게 평범할 수 있지? 이것이 중요하다. 은희는 완전하게 평범할 것. 이것이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점이다.
은희가 평범하면 평범할수록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이 영화에 빠져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관객은, 어쩌면 난생처음으로, 영화관의 스크린에서, 이 세상 특별한 누구의 이야기가 아닌, 진짜 바로 나의 이야기를 펼쳐 놓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다. 이 영화는 아주 정확하게, 바로 당신과 바로 당신이 살아왔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역으로, 이 이야기가 바로 당신의 이야기가 아니라면, 이 영화는 의미를 잃게 된다.
그럼 이 영화는 아주 뛰어난 리얼리즘 영화일까. 물론 이 영화는, 영화를 보는 사람 누구나 빠져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1994년을 재현해 놓았다. 이 영화를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가 바로 ‘재현’이다. 아빠와 엄마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는 작은 소파, 거실 테이블을 덮은 흰색 자수 레이스 러너, LCD폰트로 전자 화면에 486 486을 타전하는 삐삐, 날라리를 두 명 이상 적어내라는 학교 선생님. 얼핏 보면 이 영화는 마치 영화 <1987>이나, <응답하라...> 시리즈처럼 “맞아, 맞아. 우리 동네도 저랬음!”을 외치며 즐거워하는, 고증 자체가 하나의 재미와 이야깃거리가 되는 영화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거의 완벽한 고증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재현하고 있는 1994년은 이상한 말이지만, 1994년이 아니다. 이 영화는 1994년인 척하는 2019년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 등장하는 1994년이라고 찍힌 모든 소품들이 사실은 2019년을 표현하기 위해 설정된 거짓말들이다. 1994년이 2019년을 표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
그러니까. 왜 은희는 자기 집을 놔두고 902호 벨을 눌렀을까. 902호는 아무리 벨을 눌러도 인기척도 없는데. 아무리 애타게 엄마를 불러도. 엄마는 대답하지 않는데. 영화의 첫 장면이다. 딩동. 딩동. 딩동. 엄마! 엄마! 딩동. 딩동. 딩동. 엄마!!! 녹슨 문은 완고하게 닫혀 있다.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간절하게 과거의 문을 열고 싶어도, 한번 지나간 과거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아무리 애타게, 노크를 해도 열 수 없는 문이 시간이라는 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은희’는 아주 간절히 90년대의 문을 열고 싶었지만, 결국 열지 못 했다. 거기로는 들어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은희가 들어갈 수 있는 문은 1002호였다. 거기가 은희의 현실이고, 거기만이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현재라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현재와 현실을 다룬 시간과 공간에 대한 영화이며, 90년대는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잠시 ‘차용된 현재’라는 뜻이다.
정리하겠다. 이 영화는 2019년을 이야기하기 위해 1994년을 빌려온 영화이다. 이 영화는 1994년으로 들어가기 위해 열심히 902호 문을 두드렸지만 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1002호라는 현재로 들어가는 영화다. 은희는 1002호에 들어갔지만, 사실 902호에도 들어간 것이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다. 어디로 들어가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고? 아니다. 매우 중요하다. 영화 <벌새>에 표현된 1994년은, 사실 2019년이기 때문이다. 은희는 사실 매우 사실적으로 고증된 1994년의 중2 학생이기도 하지만, 그 고증이 사실적이면 사실적일수록 은희는 2019년의 39살 우리 모두가 되어, 우리에게 다가오게 된다. 1994년의 성수대교는, 2019년의 재난적 상황 속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벌새는 성장기에도, 성체가 되어서도, 나이가 들어 그 수명을 다 할 때에도, 일 초에 800회 이상의 날갯짓을 해야 생존할 수 있는 새다. 그는 성체가 되어서도 그 크기가 변하지 않으며 삶의 조건 또한 변하지 않는다. 벌새는, 자라지 못한다. 1994년의 중2 여학생이 살아남기 위해 처절히 날갯짓하는 벌새였다면, 2019년 39살의 은희 역시 여전히 날개를 붕붕거리며 살아가고 있는 벌새이다. 이 영화는 지독한 리얼리즘을 두 번 보여 준다. 한 번은 극장에서, 한 번은 극장 앞에 선 우리들의 모습에서.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까.
은희는 그래서 아주 아주 평범한 중2 여학생 같지만, 사실 아주 특별하기도 하다. 그가 그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 매우 조숙하고, 본질적이기 때문이다. 그의 질문은 사춘기 여학생의 그것처럼 막연한 질문처럼 보이면서 동시에 39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 매우 구체적인 질문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당연하다. 은희는 중2 여학생이면서 동시에 2019년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이기도 한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그 시절 우리 모두는 은희였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감상에 불과하다. 제대로 되려면 “이 시대, 나는 은희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은희는 계속해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질문하는 사람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맞을지, 언젠간 내 삶도 빛날지를 계속 고민하고 있다. 은희는 중2의 모습으로,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영지는 은희의 한문 선생님이다. 하지만 선생님이라기보다는 친구에 가까운 것 같다. 영지와 은희가 처음 만날 때 명심보감의 교우편(交友編)을 읽는다. 영지는 자기소개를 한다. 은희도 자기소개를 한다. 자기소개를 통해 두 사람은 이미 친구가 된다. 얼굴을 아는 사람은 천하에 가득하지만, 마음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되겠는가. 은희는 영지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영지는 은희에게 차를 대접한다. 한 여름,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맑은 차. 병원에 입원한 은희에게 영지는 경전의 문구가 아닌, 다른 것을 말해 준다. 이제 너를 부당히 괴롭히는 것들에 대해 참지 마. 오빠가 널 때리면 너도 맞서 싸워. 은희는, 이제, 굳세게. 살 수 있을 것 같…….
그리고.
다리는 무너진다. 다리는 어느 날 끊어진다. 멀쩡하던 다리가 두 동강이 나서 사람들이 죽는다. 세상은 그렇게 언제나 1994년이다. 우리들 삶의 바닥이 무너진다. 은희의 친구이자 선생님인 영지가 세상을 떠난다. 세상은 언제나 1994년이기 때문이다. 이제 마음을 열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내 인생은 언제나 빛이 날지 물어볼 수 있는 친구가 생겼는데, 그 친구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기도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은희는 엄마에게 부탁해 너무나 슬프게도 소담스러운 떡을 한 바구니 싸서 선생님의 집을, 친구의 집을 찾아간다.
성수대교를 지난 윗동네, 시장 상인들에게 길을 물어 가는 길이다. 떡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찾아간 영지의 집엔 이미 슬픔이 감돌고 있다. 영지는 죽었다. 세상은 언제나 2019년에도 1994년이기 때문이다. 은희는 영지의 침대에 앉아 조용히 그녀의 죽음을 애도한다. 영지의 사진 두 장과 좁은 침대 하나, 방안 가득 들어온 빛이 장례의 전부다. 은희가 몸에 품고 온 떡은 아마 영지 선생님도 기쁘게 받았을 것이다. 삶은 기쁨과 슬픔이 번갈아 다가오는 어떤 것이다. 늘 사람을 새로 만나는 일이고, 분명 영원하지 않을, 사람과 다시 관계를 맺는 일이다.
은희의 집. 902호. 아니 1002호.
은희는 집으로 돌아온다. 은희의 집은 아주 견고하게 복원된 2019년이다. 아무리 1994년처럼 보여도 2019년이다. 2019년에 교복을 입고 이름표를 찬 수많은 은희들이 수학여행이라도 떠나는지 왁자지껄 떠들고 있다. 그들 하나하나의 모습을 클로즈업과 느린 화면으로 잡으면서, 은희가 우리 모두로 확장되고, 확대된다. 그들 각자의 영화관일까. 그들 각자의 삶에 다시 카메라를 당겨 살펴보아도 또 비슷하게 고통스럽고 또 기쁠 것이다. 마로니에의 “칵테일 사랑”과 원준희의 “사랑은 유리 같은 것”을 동시에 부르며. 우리는 또 우리의 삶이 언제 빛날지 생각하며, 살아갈 것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대답을 내려야 할 때이다. 이제 세상엔, 영지 같은 선생님도, 연습장에다 연필로 이야기를 이어 나갈 친구도 없다. 다만 그 시절의 은희처럼, 세상을 만나며 살아가는 것만이 남았다. 은희가 자기 나이에 맞게 최선을 다해 세상을 만나고 성장했던 것처럼. 지금도 지금의 나에 맞게 최선을 다해 세상을 만나고, 최선을 다해 성장하는 수밖에. 마치 은희처럼, 혹은 마치 저 작은 벌새처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은희와 영지의 한문학원에 붙어 있던 그 문구.
明鏡 所以察形, 往者 所以知今
명경 소이찰형 왕자 소이지금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맑은 거울과 같은 것이다. 영화 <벌새>가 이 가을. 맑은 거울 혹은 맑은 차 한 잔처럼. 우리를 1994년에 비추고, 놔주지 않는다.
*이 글은 얼리어답터(http://www.earlyadopter.co.kr)에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