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미국적이어서 오히려 세계적인 폰트
우리가 알고 있는 브랜드의 숫자들 만큼이나 다양한 폰트 중에서 보석 같은 폰트를 만나는 일은 어쩌면 굉장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시기적절하게 좋은 폰트를 고르는 것은 수학의 공식을 풀듯 어렵지만 몇몇 사항들을 이해하고 나면 콘셉트에 맞게 폰트를 사용하는 현명함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여러 방법 중 가장 안전한 방법은 익히 보아왔던 폰트를 쓰는 것이다. 앞서 연재된 칼럼을 통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왔던 올드 스타일 폰트들의 목록이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헬베티카(Helvetica), 푸트라(Futura), 유니버스(Univers), 보도니(Bodoni), 캐슬론(Caslon), 딘(Din), 바스커빌(Baskerville)과 같이 타이포그래피의 역사에 있어서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폰트들은 어떤 곳에 사용하여도 무리 없이 당신의 작업물을 빛내 줄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현재 많은 디자이너들이 즐겨 사용하는 폰트를 사용하는 것일 것이다. 디자이너들의 폰트 취향은 시대에 따라 빠르게 바뀐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서체들은 그 역사를 모르더라도 기본적으로 그 심미적인 조형성에 있어서 디자이너와 대중에게 철저히 검증받은 폰트들인 것이다. 이번 회부터는 제법 인기를 끌고 있고는 최근의 폰트들을 차근차근 설명하려 한다. 이미 앞서 일 년간 연재되었던 올드 스타일 폰트 목록과 더불어 앞으로 소개할 폰트들을 눈에 익혀두면 당신의 폰트 취향도 어느 정도 좋아지리라 생각된다.
오늘 이야기할 폰트인 ‘고담(Gotham)’은 원래 뉴욕을 뜻하는 속칭으로 현재는 트렌드 리더들의 집결지인 뉴욕에서 가장 인기 있는 폰트에 속한다. 뉴욕은 광고, 홍보와 더불어 패션과 건축 등 디자인 역사에 있어서도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도시중 하나다. 폰트를 사용한 타이포그래피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잡지의 역사를 보더라도 디자인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알렉세이 브로도비치의 하퍼스 바자를 비롯하여 다양한 패션 매거진과 컬처 매거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런 다양한 잡지들에 사용된 폰트들 중에서 ‘고담’이 유독 빛나는 이유는 폰트 모양이 굉장히 스타일리쉬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스타일리쉬란 기존의 서체들과 완전히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담은 폰트 한 자 한 자가 가지고 있는 정갈함과 기하학적으로 구성된 디테일의 독특함이 굉장한 장점으로 작용한다.
미국의 대표적인 폰트 디자이너인 토비아스 프레르 존스(Tobias Frere-Jones : 1970~)에 의해 2000년 세상에 선보인 고담은 다른 서체에 비해 다소 넓적한 모양으로 디자인되어있다. 700개가 넘는 폰트들을 디자인하였던 프레르 존스의 다른 폰트를 보더라도 고담은 다소 뚱뚱한(Expanded) 모습이며 다소 둔탁한 편에 속한다. 기존에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던 서체들이 조금은 홀쭉한(Condensed) 모양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돌연변이와 같은 인기인 것이다.
고담의 인기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그 인기의 요인에는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겠지만 고담은 다른 폰트에 비해 시인성과 판독성이 유독 높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캠페인과 이벤트의 디자인에 주로 사용되었는데 주목받아야 할 장소에서 그 빛을 발한다. 시인성과 판독성이란 대상물의 존재 또는 모양이 원거리에서도 식별이 쉬운 성질을 말한다. 또한 단어와 문장으로 쓰였을 때 공간과 대비되는 명도차가 큰 폰트다 보니 단어를 인지할 수 있는 판독성 역시 높아서 뉴욕을 더불어 전 세계의 현수막과 고급스러운 간판에 사용되었고 어느새 일반인들의 눈에도 익숙한 폰트가 되었다.
특히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008년 대선 캠페인에서 ‘CHANGE’라는 슬로건과 함께 당의 혁신성을 주장하는 데 사용된 서체가 고담이다 보니 많은 이들의 뇌리에도 각인되는 효과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뉴욕의 세계 무역센터 사이트에도 사용되었고 다양한 미국 영화의 포스터와 영화 예고편에 주로 사용되며 현재 한 시대를 풍미하는 폰트로 각광받고 있다.
간혹 고담 폰트가 한 때 반짝하고 사라질지도 모를 트렌디한 서체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지만 그리 간단하게 만들어진 서체가 아니다. 미국의 남성용 패션 매거진인 GQ가 의뢰하여 <Hoefler & Co>에서 만들어진 고담은 “산세리프 풍으로 기하학적인 설계”를 원했고 “남성 다우며 새롭고 신선한 걸 만들어 달라”는 의뢰를 완벽하게 완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의뢰를 받은 프레르 존스는 디자인의 영감을 받기 위해 뉴욕의 맨해튼 거리를 시간 날 때마다 걸어 다니며 오랜 시간이 녹아있는 소스를 찾아다니는 여행을 여러 번 반복했다. 오래된 건물에서 볼 수 있는 간판의 글꼴들과 애비뉴 외각에 있는 항만청과 버스터미널에 있는 기호들에도 영감을 받았다. 프레르 존스는 폰트에 뉴욕의 오래된 감성과 역사를 담는데 주력하였고 그렇게 다양한 영감과 감성을 통해 태어난 서체가 바로 고담이다.
고담에 영감을 준 것은 기하학적으로 설계된 푸투라(Futura)를 비롯해 1920년대 산세리프 스타일이었고 이는 뉴욕의 간판과 사인들에서도 점점 사라지고 있는 오래된 서체였다. 하지만 프레르 존스는 그것이 바로 지켜야 할 폰트의 역사라고 생각하였고 점점 화려해지고 있는 폰트들 사이에서 눈에 띄게 명확해 보이는 폰트 디자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뉴욕 타임스에 데이비드 던랩이 기고한 디자인 칼럼을 보면 “고담은 1930년대부터 1960년대 뉴욕의 거리 풍경을 연상시킨다. 무의식적으로 건축에 사용된 레터링들의 추억을 살리고 그 시절의 감성을 불러일으킨다.”라고 하였다. 뉴스위크의 앤드류 로마노 역시 "다른 산세리프 폰트들과 달리, 고담은 프랑스스럽지도 않고 독일스럽지도 않으며 스위스의 스타일도 아니다. 고담은 매우 미국적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미국의 과거와 매너에 대한 향수와 현대적인 세련미의 조합.”이라고 극찬을 했으며,
타이포그래피에 관한 책의 저자로 유명한 존 베리는 "고담은 한편으로 매우 일반이기 때문에 정치 캠페인에 사용될 때 또 다른 재미를 제공한다. 고담은 당신이 생활하는 모든 곳을 비슷한 것을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신뢰성을 갖는다.”라고 말했고 그래픽 디자이너 브라이언 콜린스는 “고담은 오바마의 전체 캠페인 이미지에 ‘중요한 증인’"이라고 말했다. 고담은 이렇듯 미국의 다양한 디자인 관련 인사들과 언론에서 극찬을 받으며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해 나갔다.
고담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상품들과 미디어에서도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코카콜라는 지속적으로 광고에 사용하고 있으며 , 미국의 대표적인 TV 쇼 프로그램인 새러데이 나이트 라이브 (Saturday Night Live)에서도 고담을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 트라이베카 영화제에도 메인 폰트로 사용하고 있으며, 조지아주의 고객 서비스센터와 주지사의 사무실은 모든 로고에 고담을 사용했다.
조지아 주는 고담 사용에 대한 이유로 "모든 마케팅, 광고 및 간판 응용 프로그램에서 사용하기 위한 다양한 서체 옵션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실제로 고담은 폰트 패밀리가 다양하다)”라며 고담의 깨끗하고 깔끔하게 떨어지는 라인의 느낌을 선호한다고 밝혔다. 스타벅스 역시 2008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하는 사람들에게 무료 커피를 제공하는 서비스를 광고하며 사용하였고 미국의 국립 9·11 테러 박물관을 설계 (또는, 9/11 추모 기념관) 설계할 당시에도 로고의 폰트로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최근 동대문의 두타(doota)가 메인 폰트로 사용하고 있으며 CJ헬로비전 측도 고담을 사용해 광고홍보물을 제작하고 있다.
피터 발락(Peter Bilak : 1973~)은 "그래픽 디자인에는 옳고 그른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과 비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폴 스미스(Paul Smith : 1946~)는 "제대로 적용된 디자인은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직업을 만들어내며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라고 말했다.
최근 발표된 여러 서체 중 고담은 커뮤니케이션에 있어 굉장히 효율적이며, 우리 곁에서 다양하게 사용되며 우리 삶의 질을 높이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혹시 명쾌하면서 스타일리시한 콘셉트의 폰트를 찾는다면 고담을 적극 추천한다. 다소 뚱뚱해 보일지는 모르나 딱떨어지는 고급 양복을 입은 든든한 신사처럼 당신의 격을 한껏 높여줄 테니 말이다.
위 내용은 '아레나 옴므' 매거진. 2016년 1월에 연재된 '글자를 위한 글'입니다.
글 : 오영식(토탈임팩트), 김광혁(토탈콘텐츠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