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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인의 희생

나 흑인 처음 봐- 할머니 손

by 더웨이

우리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2008년 3월, 외국 기업의 한국 대표로 바쁜 일상을 지냈다. 유럽 본사와 8시간 시차를 맞추며 하루 12시간 일했다. 그런 내가 일의 우선순위를 바꿨다. 탄자니아에서 온 보컬그룹 (Tanzania Methodist Messengers, TMM) 때문이었다. 나는 교회 해외선교부 평신도 리더로 이들의 한국 공연을 이끌며 낮에는 회사 일하고 밤에는 이들과 함께 동행했다.


TMM은 탄자니아 목사가 거리의 청년들을 모아 만든 보컬 그룹이었다. 이들은 정식으로 음악을 배우지 않았다. 악보를 볼 줄 몰랐다. 그러나 천부적인 소질과 절대 음감으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했다. 스와힐리어, 영어, 한국어 노래를 불렀다. 2005년에 탄자니아 최고 보컬그룹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들은 13명의 단원으로 구성됐다. 남성 단원 7명과 여성 단원 6명이었다. 최연장자는 39세, 막내는 18세 고등학생이었다.


새로운 지평을 연 여인

탄자니아 M (Matthew Biyamungu) 목사의 인생 스토리는 특별했다. 1981년, 그는 탄자니아 신문에 난 장학금 광고를 보고 한국에 유학 왔다. 아세아 연합신학대학에서 공부하며 한 여성을 만났다. 학장 비서로 일하던 R전도사였다.


그녀는 신학을 공부하고 아프리카의 선교를 결심했다. 아프리카 흑인과의 결혼을 온 집안이 반대했다. 40년 전 당시 한국 사회에서 국제결혼, 특히 흑인과의 결혼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가족들과 친구들이 말렸다. 그러나 R전도사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녀에게는 아프리카 땅에 복음을 전하라는 소명이 있었다. 세상의 시선보다 자신의 신앙이 우선이었다. 1984년, 이들은 결혼 후 탄자니아로 떠났다. R선교사의 사랑과 희생의 시작이었다. 그녀는 낯선 땅에서 두 딸을 키우며 선교 활동을 했다.


남편과 함께 거리의 청년들을 만났다. 그때 TMM을 창단하게 되었다. 영어를 가르치고 기독교 복음을 전했다. 노래를 가르쳤다. 그렇게 24년이 흘렀고 복음의 씨앗이 열매를 맺었다. 그 열매 TMM과 함께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동행과 감동의 연속

TMM은 한국에서 미션 스쿨, 교회, 군부대에서 연주를 했다. 이동하는 대형 버스 안은 아프리카 전통 소품과 악기로 가득했다. 음향 장비를 실은 트럭 한 대가 함께했다.


나는 해외선교부를 맡고 이 행사를 기획하고 관리했다. 교회와 학교, 군부대를 연결했다. 일정을 조율하고 예산을 관리했다. 서울, 경기, 강원도에서 포항 해병교회까지, 충주와 논산까지 다녀왔다.


음향 담당자는 공연장마다 두 시간 전에 도착해 장비를 세팅하며 리허설을 도왔다. 공연이 끝나면 장비를 철수했다. 서울 숙소로 돌아오면 자정이 넘었다. 먼 지방에서는 새벽 두세 시에 도착했다.


한 번 공연에 열두 곡에서 열다섯 곡을 연주했다. 아프리카 전통 춤과 찬양이 있었다. 아카펠라로 한국 노래를 불렀다. 일렉트릭 밴드로 한국어와 영어 찬양을 연주했다. 한국어, 영어, 스와힐리어 노래가 어우러졌다.


관객은 감동했고, 앙코르곡을 서너 곡 준비해야 했다. 두 달 동안 80여 회의 순회공연이 이어졌다. 낮에는 미션 스쿨, 밤에는 교회와 군부대를 찾았다.


2008년 논산의 한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할머니가 말했다. "나 흑인을 처음 봐. 어디 한번 만져보자." 한 대원이 할머니 손을 잡아주고 허그까지 했다. 순박한 시골 교회의 따뜻함이었다.


우리의 정체성은 확실했다.

공연을 계속하며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 같았고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깊었다. 우리는 엔터테이너인가? 메신저인가? 그들은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간증하며 정체성을 분명히 밝혔다. 우리는 메신저였다. 단순한 보컬 그룹이 아니었다. 복음을 전하며 찬양하는 이들이었다. 탄자니아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의 노래는 영혼에게 호소하는 간절함이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진심이었다. 복음의 증인으로 한국에서 자신들의 은혜를 나누는 것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공연하는 것이 아니었다. 빚진 사랑을 갚는다고 했다.


교회와 학교들은 공연에 감사하며 사례를 했다. 군부대는 사례를 하지 못했다. 받은 사례비로 항공료와 두 달간의 경비를 쓰고 메신져스 단원들에게 선물과 감사금을 지급했다. TMM이 인천 공항을 떠나던 날, 화물 중량이 초과되어 추가 요금을 지불할 정도였다.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그날들은 은총의 시간으로 천상과 직접 연결돼 있었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었다. 내 평생에 그런 날이 다시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사업가로 살며 낮에는 일하고 저녁에는 그들과 동행했던 그날들. 영혼의 감동으로 은혜를 나누던 그날들. 같이 웃고 울며 찬양하고 간증하던 그날들. 2008년의 그날들은 매우 숭고하게 각인된 시간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2017년 12월 M 목사는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심은 사랑의 나무는 여전히 열매를 맺고 씨를 뿌리고 있다. R목사는 지금도 탄자니아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나는 교회를 옮겼고 직장도 은퇴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사연이 쌓여도 그날의 감동과 따뜻한 추억은 잊지 못할 것이다.


선택과 희생으로 열매를 맺다

역사는 선택에 의해 쓰인다. 그 선택이 가치를 향할 때, 역사는 비로소 시간 속에 남는다. 한 알의 밀알이 희생할 때 열매가 있으며, 내려놓을 때 채워지며 동행할 때 완성 된다는 것을 알았다. R목사는 온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탄자니아로 갔다.


한 여인의 희생과 헌신이 복음을 전파하며 메신저스를 만들었고 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리며 감동시켰다.

나는 두 달을 그들과 동행했고 그들이 나를 변화시켰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그날이 아직 생생하다. 나는 어디서 와서 무엇을 하다 어디로 가는가. 한 여인의 희생과 헌신 앞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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