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사라져도 믿음은 남는다
그때 믿음의 시절
노트북 폴더와 파일을 정리하던 중 30여 년 전 (1991~1993) H그룹 직장 신우회 자료를 만났다. 당시 H그룹은 재계 6위로 항공사, 해운사, 물류회사, 건설사, 보험사 등을 거느린 거대한 조직이었다. 그룹사 서울 본사에 흩어진 크리스천들이 한 달에 한 번, 일과 후에 정기예배를 드렸다. 서울 중구 서소문교회 예배실에 모였다.
직장에서 믿음의 정체성을 드러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승진에 불리할 수도 있었고, 동료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때도 있었다. 혹시 광신자로 낙인찍히는 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특히 그룹 오너 가족은 불교 신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찬송을 부르며 말씀을 들었고 기도했다.
나는 그때 건설사의 신우회를 창립했고 회원들과 그룹 선교회에 참석했다. 또한 그룹 선교회 임원으로 예배 순서지를 만들고 그룹 각 회사에 연락하는 역할을 했다. 각 회사 신우회 회원들에게 예배 소식을 전했다. 작은 일이었지만 귀한 섬김이었다. 얘배 후에 "수고했어요. 다음 달에 또 만나요." 그 한마디가 따뜻했다.
예배 순서지에는 '땅 끝까지 - H그룹 선교회'라는 제목이 선명했다. 영문 제목은 'TO THE END OF THE EARTH'였다.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이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그들은 자신이 서 있는 그 자리, 매일 출근하는 회사, 때로는 고단하고 때로는 보람된 그 직장을 복음이 닿아야 할 '땅 끝'으로 알았다. 회사는 단지 월급을 받고 출세하는 곳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증인으로 사는 참된 현장이었다. 그 직장 생활이 귀중했던 것이다.
정체성은 분명했다.
당시 존경받는 목사님들이 초청되어 직장 선교회의 중요성을 말씀하셨다. 직장 선교회가 성장해야 한다. 교회밖의 기독교인, 직장 속에서 증인이 되어야 한다는 설교를 하셨다. “언제 어디서나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이라는 제목의 말씀에 우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신앙은 일요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예수님의 제자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교는 직장의 일상을 진지하게 바꾸어 놓았다.
설교 제목들이 순서지에 선명하다. “예수님만이 삶의 목표", "더불어 사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 "나를 깨뜨리소서 “, 의의 길을 향하여 “, 적극적인 전도의 삶". 믿음은 개인의 구원에만 머물지 않았다. 공동체의 정체성이 되었고, 세상을 향한 전도의 사명이 되었다.
순서지 속에는 당시 유명한 교회의 목사님들이 초청 설교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룹 여러 회사 출신의 집사들도 간증을 했다. 직장 선배이자 신앙 선배들이 후배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회사는 각기 달랐지만 그들은 같은 주님을 섬겼다.
정기적으로 성가연습을 했고, 성경공부를 했으며, 헌금찬양과 특별찬양을 준비했다. 신앙고백, 찬송, 기도, 설교로 이어진 예배는 축도와 광고로 마무리되었다. H그룹 신우회 임원명단과 봉사위원 명단이 주보에 인쇄되었다. 직책과 반주자, 안내와 헌금, 모두가 헌신이었다.
특별히 각 회사의 업무협조가 필요하면 신우회 회원들이 담당자를 섭외하여 알려주며 솔선수범하여 업무를 처리했다. 믿음은 교회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일터에서 빛을 발했고, 동료들에게 신뢰를 주었으며, 회사에 선한 영향력을 끼쳤다.
세월은 가고 없어도
30여 년이 지났다. H그룹은 분리되었고 일부 계열사는 사라졌다. 그때 함께했던 사람들의 소식을 알 수 없다. 순서지 속 이름들은 이제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른다. 시간이 흘렀고, 조직이 변했으며, 사람들도 흩어졌다. 그때 그 시절이 그립다. 그 믿음의 열정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하다.
돌아보니 내 믿음의 열정도 식었다. 직장에서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살자던 다짐은 어디로 갔는가? 회사를 위해 기도하던 간절함은 사라졌고, 동료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던 열정도 희미하다. 그때 우리는 무엇을 꿈꾸었던가.
회사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것, 세상 속에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사는 것이었다. 주보에 적힌 그 선명한 비전은 세월 속에 바랬다. 믿음의 순수함을 잃어버렸고, 열정의 기온은 내려갔다. 회상은 부끄러움이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한다.
그들은 분명히 좋은 영향력을 주는 사람들로 살았을 것이다. 그 바쁜 업무 속에서 한 달에 한 번 모여 예배드리던 그 신앙은 깊이와 넓이가 더해졌을 것이다. 직장에서 믿음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던 그 용기가 열매를 맺었을 것이다.
세월이 흘렀어도 그 믿음의 뿌리는 여전히 그들을 지탱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회 어디선가 그들은 여전히 올곧고 성실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은퇴한 이도 있을 것이고, 손주를 돌보며 기쁨을 누리는 이도 있을 것이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어려운 이를 돌아보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하나님의 축복 속에 그들은 지낼 것이다. 땅 끝까지 예수님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을 붙들었던 사람들이다. 그 말씀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조직은 사라져도 믿음은 남는다. 이름을 잊어도 증인의 삶은 계속된다. 예배 순서지 속 그 이름들이 지금도 각자의 자리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고 믿는다. 비록 소식은 끊겼지만, 그들의 믿음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을 통해 복음은 여전히 땅 끝까지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다시 만날 수 있으려나! 그때의 열정을 나누고, 이후의 간증을 듣고 싶다. 어떻게 살아왔는지, 믿음을 어떻게 지켜왔는지 듣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함께 그때를 기억하며 예배드리고 싶다. 찬송을 부르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서로를 격려하고 싶다.
H그룹 선교회는 사라졌지만, 그 믿음의 유산은 남아 있다. 땅 끝까지 증인으로 살라는 그 부르심은 여전하다. 30여 년 전 그 순서지를 다시 펼치며, 나도 그 부르심에 다시 비상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