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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 정원의 과학

소쇄원의 베르누이 정리

by 더웨이

골짜기에서 만난 엔지니어

전남 담양군 소쇄원에서 나는 한 문화 해설사를 만났다. 그는 69세(1956년생)라고 소개했다. 기계공학을 전공했고 2011년 정년퇴직 후 관광학을 공부했다고 했다.


그는 문학적 수사 대신 공학의 언어로 소쇄원을 설명했다. "이 굴뚝은 베르누이 정리가 적용된 구조입니다. 엔지니어로 살아온 나는 그의 설명 방식이 반가웠다.


아내는 한국 정원 역사에 관심이 많았다. 수년 전부터 소쇄원에 가자고 했으나 은퇴 후에야 방문했다. 500년 된 이 별서 정원에서 나는 문학보다 건축 구조를 먼저 보았다. 엔지니어의 습성이었다.


소쇄원은 국가 명승 제40호다. 16세기(1519년) 제주 양 씨 양산보가 30년에 걸쳐 완성한 원림이다. 35,000평의 산야에 한때 30여 채의 건물이 있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며 대부분 소실되었다. 지금은 광풍각과 제월당 등 몇 채만 남아 있다.


소쇄원은 자연과 인격, 교유의 가치를 추구한 조선 선비문화의 대표 별서정원이다. 주인 양산보와 벗 김인후 등 문인들이 우정과 학문, 이상적인 삶을 노래했다.


자연과 어우러진 장소성, 겸손과 성찰이 이 공간을 채웠다. 양산보의 지혜는 건물이 아니라 자연과 공학 속에 살아 있었다.


낮은 곳으로 흐르는 연기

광풍각 옆에서 해설사가 안내했다. "여기 앉아 저 앞을 보세요. 옛 선비들의 시선과 감동을 느껴보십시오. 조선 선비들이 이곳에서 우정과 자연, 시와 그림을 나눴습니다."


제월당 건물의 아궁이를 보라고 했다. 그리고 낮은 담장 아래를 가리켰다. "굴뚝이 여기 있습니다." 굴뚝은 아궁이보다 낮은 곳에 있었다. 상식에 어긋났다. 굴뚝은 높을수록 불이 잘 들고 연기가 잘 빠진다.


이것이 통상적인 난방 구조의 원리다. 연기는 위로 올라간다. 뜨거운 공기는 가볍다. 그런데 이 굴뚝은 아래로 향했다. 중력을 거스르는 구조였다. "어떻게 연기가 빠져나갑니까?" 내가 물었다. "바람 때문입니다." 해설사가 답했다. "소쇄원은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골짜기 바람은 넓은 곳에서 좁은 곳으로 흐를 때 속도가 빨라집니다. 속도가 빨라진 곳의 압력은 낮아집니다. 그 차이가 연기를 잡아당기는 겁니다. 베르누이 정리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람의 속도와 압력의 변화였다. 유체역학의 기본 원리였다. 높은 아궁이에서 나온 연기가 골짜기 바람이 만든 저압 지대로 빨려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연기가 중력을 거슬러 흘렀다.


해설사가 덧붙였다. "골짜기의 지형이 만드는 공기 흐름을 정확히 읽어야 가능한 설계입니다." 나는 주변 지형을 다시 살폈다. 평지에서 좁은 골짜기로 이어지는 지형. 그 사이를 흐르는 바람의 속도 변화. 압력의 미세한 차이. 모든 것이 계산된 위치였다.


500년 전 양산보는 이 원리를 알았다. 18세기 베르누이가 이 원리를 발표하기 200년 전이었다. 양산보는 자연의 이치를 알았다. 골짜기의 바람을 관찰했다.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압력의 차이를 이해했다. 그리고 굴뚝을 아궁이보다 낮은 곳에 만들었다.


이것은 과학이었다. 공식 없는 과학, 이론 없는 실제였다. 관찰과 직관으로 자연의 법칙을 읽어낸 것이었다. 나는 엔지니어로서 양산보의 감각을 느꼈다. 연기가 빠져나갈 때 신선이 구름 위에서 노는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유체역학 설계 위에 난방 시스템이 완성되었다. 문학은 과학 위에 있었다.


문장 뒤에 숨은 손들

제월당에 앉았다. 조선의 선비들이 시를 지었던 자리였다. 김인후는 이곳에서 48 영(제목)을 남겼다. 소쇄원 곳곳의 연못, 다리, 돌, 정자, 담장, 계곡을 시적으로 표현했다. 김인후는 조선 제일의 문장가였다. 그의 글솜씨는 당대 최고로 평가받았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났다. 양산보의 스승 조광조가 능주에서 사약을 받았다. 양산보는 출사를 포기했다. 벼슬길을 접었다. 고향으로 돌아와 이곳에 별서를 지었다. 30년이 걸렸다. 고독과 절망 속에서 한 사람의 정원이 완성되었다.


35,000평의 땅에 30여 채의 건물을 세웠다. 물길을 내고 돌을 쌓았다. 활터와 대봉대를 만들었다. 나무를 심었다. 굴뚝을 낮은 곳에 설치했다. 중림제를 조성하고 광풍각을 올렸다. 제월당을 지었다.


누가 건축했을까? 양산보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노비와 종들이 있었다. 당대 인권이 배제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30년 동안 땅을 파고 돌을 날랐다. 나무를 가꿨다. 불을 지폈다. 여름 더위와 겨울 추위 속에서 흙과 돌을 만지며 이 정원을 만들었다.


광풍각 아래로 신비로운 연기가 빠져나갈 때, 누군가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었다. 양산보가 풍류를 논할 때, 누군가 땀을 흘리고 있었다. 48편의 제목이 완성될 때, 얼마나 많은 손이 움직였는가? 한 편의 시가 탄생하는 동안 몇 사람이 일했는가?


나는 제월당을 나왔다. 정원을 천천히 걸었다. 아내는 500년 전 이곳을 만든 이름 없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다. 베르누이 정리를 구현한 것은 양산보의 지혜였다. 하지만 그 지혜를 땅 위에 세운 것은 무명의 노동이었다. 설계는 한 사람이 했지만 건축은 여러 명이 했다.


문학은 노동 위에 섰다. 풍류는 땀 위에 피었다. 베르누이 정리는 과학의 원리였다. 그것을 낮은 굴뚝으로 만든 것은 사람의 손이었다.


지금도 제주 양 씨 종중 후손 10명가량이 이곳을 유지 보수하며 운영한다. 500년 동안 누군가는 계속 이 땅을 돌봤다. 역사는 기록된 이름과 무명의 손으로 함께 만들어진다.


500년 전, 과학과 인문이 만나는 정원

해설사가 말했다. "이 구조는 지금 봐도 놀랍습니다." 나는 공감했다. 과학은 관찰에서 시작한다. 양산보는 골짜기의 바람을 관찰했다. 공기의 흐름을 느꼈다.


압력의 차이를 알았다. 그리고 굴뚝을 설계했다. 공식이 없어도 자연을 읽었다. 이론이 없어도 굴뚝을 만들었다. 이것이 과학의 본질이었다.


하지만 과학만으로는 소쇄원이 완성되지 않았다. 제월당에서 선비들의 풍류가 있었다. 광풍각에서 정취가 흘렀다. 이것은 인문이었다. 조광조의 죽음 이후 세상을 등진 선비의 고독과 절망, 그 속에서 피어난 문학적 성취가 이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노동 없이는 불가능했다. 땅을 파고 돌을 쌓고 불을 지피는 손들이 있었다. 보이지 않는 바람이 보이는 물체를 움직이듯, 이름 없는 손들이 기록된 역사를 만들었다.


그 해설사는 정년 후에도 멈추지 않고 공부했다. 기계에서 역사로 영역을 넓혔다. 그리고 공학의 언어로 대중과 소통했다. 나도 엔지니어로 이제 인문의 눈으로 자연을 보려 한다. 양산보가 베르누이 정리를 관찰로 이해했듯이, 나는 그렇게 사물을 이해하려 한다.


소쇄원은 하나의 시스템이었다.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감성과 땀의 현실이 맞물려 있었다. 500년이 지나도 그 시스템은 작동했다. 과학은 원리를 설명한다. 인문은 삶을 이야기한다. 노동은 두 세계를 현실로 만든다. 과학, 인문, 노동이 만나는 곳에 소쇄원이 있었다.


거기 그것을 읽어내는 해설사가 있었고, 그것을 듣는 또 한 명의 시니어 엔지니어가 있었다.

500년 전의 지혜가 오늘도 골짜기 바람을 타고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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