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온 길 돌아보니
잃어버린 중심
어느 날 아침, 내 마음이 중심을 잃은 느낌이 들었다. 닻이 없는 배 같았다. 배는 닻이 없으면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사람도 다르지 않았다. 중심을 잡지 못하면 세파에 떠밀려 내려간다. 삶에 중요한 것은 내 중심을 잡고 사는 것이다.
일과 직책의 시간
나는 해양 토목과 해상풍력 건설을 평생 업으로 삼았다. 국내 대기업과 글로벌 회사에서 항만을 만들고, 해상 풍력발전 프로젝트를 개발했다. 회사와 직책, 공사 계약과 회의가 나를 지키는 줄 알았다. “직장이라는 배는 견고했고, 내 닻은 여기 있다.” 나는 그렇게 믿고 살았다.
은퇴 후 허무함
은퇴 후 그 배와 닻이 없어졌다. 직책은 사라지고, 이메일은 조용해지고, 아침에 출근하지 않고 미팅 일정이 없었다. 일할 곳이 없어 불안했다. 휴대폰의 메시지도 없고 세상이 나를 잊은 것 같았다. 그제야 일과 직책은 인생의 닻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잠시 배를 묶어 두는 쇠붙이였다.
육지에 놓인 닻을 보며
2019년 전 5월 미국 뉴저지 여행 중이었다. 행사를 마치고 점심을 먹으러 바닷가 식당에 갔다. 출입문 옆에 닻이 놓여 있었다. 길이는 70~80센티미터 정도였다. 소형 선박용이었다. 선박에서 분리되어 거기 있었다. 따개비도 붙어있는 닻은 녹이 슬어 있었다. 짠 냄새가 사라진 쇠덩어리, 바다 모습이 희미하게 있었다.
그 닻은 어딘가 바다에서 선박을 지켰을 것이다. 이제는 식당 문 옆에 장식으로 놓여 있었다. 나는 그 앞에 걸음을 멈췄다. 한때 바다 밑바닥에 박혀 폭풍을 버텼을 쇳덩어리가, 이제는 관광객이 보고 지나가는 장식품이 되었다. 그 순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의 닻도, 저 닻처럼 제자리를 떠난 것이 아닐까?
표류를 멈추게 한 질문
뉴저지에서 본 그 닻은 은퇴 후 내 모습과 겹쳐 보였다. 바다를 떠난 배, 직업을 떠난 직장인. 소속이 없는 사람. 여러 장면이 스치며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지금 내 인생을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마지막까지 잡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라는 닻
가장 먼저 떠오른 닻은 가족이었다. 평생 곁을 지켜준 아내, 멀리 외국에 살지만 화면 속에서 웃으며 안부를 전해오는 딸과 사위가 있다. 손녀가 영상통화에서 ‘하비(할아버지) 재미있어!’라는 한마디에 하루가 신난다. 더 이상 ‘대표’라 불리지 않아도 된다. 할아버지라는 불리는 것으로 충분했다. 가족은 경력이 아니라, 내가 표류할 때 잡아주는 닻이었다.
신앙의 닻
그다음 닻은 신앙이었다. 믿음을 지키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평생 신앙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흔들릴 때가 많다. 출장과 프로젝트가 늘어날수록 믿음 생활은 세상에 떠밀려 갔다. 이제 새벽 다섯 시, 모두 잠들어 고요한 시간에 혼자 성경 말씀을 읽다가 한 구절이 가슴에 안겨왔다. 평온하게 마음을 점검하니 말씀이 닻처럼 중심을 잡았다. 말씀은 나를 지탱해 주는 힘이 되었다.
작은 사명
세 번째 닻은 작은 사명이었다. 탈북민 청년들의 사업을 코칭하고, 해상 풍력 신기술을 나누는 일. 거대한 프로젝트도, 영웅담도 아니다. 한 사람을 돕고 방향을 잡아주는 일이다. 누군가의 사업 계획서를 함께 보고 방향을 고쳐 줄 때, 나는 참된 시간 속에 존재한다고 느꼈다. 닻은 거창한 비전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이어가는 작은 사명이다.
글쓰기는 마음의 항해
네 번째 닻은 글쓰기였다. 새벽에 책상 앞에 앉아 묵상하며 글을 쓴다. 시니어의 삶을 글로 정리해 에세이를 쓴다. 글을 쓰는 동안 나의 속을 들여다본다. 문장을 고치면서 내 마음도 고친다. 글쓰기는 흔들리는 마음에 중심을 잡아주는 또 하나의 닻이다.
건강을 지키는 닻
나이가 들수록 몸도 여기저기 삐걱거린다. 노인성 질환으로 약을 복용하고, 근력 운동과 유산소 운동을 한다. 선체인 몸이 무너지면 튼튼한 닻도 소용없다. 건강이 녹슬면 마음의 닻도 쓸모가 없다. 오늘도 약을 챙겨 먹고 걷는다. 다시 항해를 나설 수 있도록, 내 몸이라는 선체를 돌본다.
우리 닻은 어디에
사람들은 얼마나 빨리, 얼마나 멀리 갔는지 자랑한다. 명예와 소유를 말한다. 그러나 지나온 길 돌아보니 질문은 하나만 남는다. ‘당신의 닻은 어디에 있나?’ 그 닻의 자리만이 인생을 증명한다. 바람이 불고 파도처도, 닻이 바다 밑에 박혀 있는 배는 떠밀려 가지 않는다.
나는 오늘도 내 닻들을 점검한다. 가족의 평안은 지켜지고 있는지, 믿음이 녹슬었는지 살핀다. 비즈니스를 코칭하며 내 편견은 없는지 돌아본다. 글을 쓰며 내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는지, 단어 하나에 다시 묻는다.
뉴저지 식당 문 옆에 서 있던 그 녹슨 닻은, 제 역할 못하는 장식품으로 놓여 있었다. 폭풍을 버텼던 쇳덩이가 무기력하게 서 있었다. 그 닻을 보며 생각했다. ‘저것은 아니다. 나의 닻은 제자리를 지켜야 한다.’
오늘, 우리의 닻은 어디에 놓여 있는가? 그 닻은 제 역할을 하고 있는가? 그 질문 앞에서 솔직해지는 순간, 인생의 항로는 바뀐다. 늦어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지금 다시 닻을 내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