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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파카 Oct 24. 2021

여행을 떠나 쓴 일기

<집 나간 의욕을 찾습니다> 4화



여행은
일과 생존투쟁에 제약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준다.


- 알랭 드 보통, 정영목 옮김, 《여행의 기술》, 이레, 2004.



퇴사하고 한 달 남짓 여행했다. 여행 중 내가 가장 많이 한 일은 기록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봤고, 무엇을 생각했는지 끊임없이 썼다. 그 메모를 읽으면 일과 생존투쟁에 제약받지 않는 나의 삶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2015년 11월 11일 수요일

오늘의 숙소는 에어비앤비에서 찾은 스위스 트루디 할머니네 집이다. 9시쯤 일어났는데 할머니는 이미 일하러 나가시고 없었다. 집 안 구석구석에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Good morning. Help yourself.’ 

(차와 커피를 마실 수 있게 준비해두셨다.) 

그리고 집 문은 두 번 돌려야 잠기니 꼭 두 번 돌리라고.  

(어젯밤에 내가 제대로 안 잠갔나 보다.) 




커피 한 잔, 비스킷 하나가 오늘의 아침이다. 비스킷에서는 종이를 씹은 것처럼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이렇게 맛없는 비스킷이라니. 커피만 마시고 밖으로 나왔다. 아무 계획이 없는 게 계획이다.  

숙소 근처인 호르겐 Horgen역 앞의 호수 벤치에 앉았다. 동양인은 거의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마트에서 계산할 때도, 길을 걸을 때도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움직일 때마다 괜히 긴장돼서 벤치에서 앉아 책을 읽었다.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취리히 시내로 나가보기로 했다. 공원이 많아 보이는 역에 내렸는데, 웬걸 완전 대도시다. 양복을 쫙 빼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빌딩 사이를 걷고 있으니, 나만 직업이 없는 사람 같았다. 



2015년 11월 28일 토요일

마드리드에서 바르셀로나로 이동하는 기차를 탔다. 도시를 벗어나자 황무지 같은 풍경이 계속 이어졌다. 진짜 특이했다. 사막 같기도 하고 나무는 여기저기 많은데 독특한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저 한복판에 떨어지면 그야말로 세상에 혼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기분이 들 것 같다. 하늘은 얼마나 맑고 파랗던지, 너무나 이국적이어서 충격이었다. 


2015년 12월 1일 화요일

근처 카페를 찾아 걷다가 관광객이 전혀 오지 않는 것 같은 동네에 도착했다. 평범한 아저씨, 아기와 엄마, 장 보는 할머니, 주차하는 아저씨….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 사람들을 보며 어느 나라든 사람 사는 건 다를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2015년 12월 4일 금요일

묵고 있는 호텔이 너무 마음에 든다. 이유는 단순하다. 비싸서 그런 것 같다. 무리했나. 카드 잔액을 조회해본다. 쓸쓸한 숫자들을 헤아리고 있자니 온갖 잡생각이 날아든다. 슬슬 여행이 끝나가는가 보다. 



2015년 12월 6일 일요일

오늘은 일찍 일어나 철학자처럼 걸어보기로 했다. 앞으로 뭘 하면서 어떻게 살면 좋을까. 당장 답을 구할 수는 없겠지만, 이 질문은 계속 품고 살아야 한다는 건 알 것 같았다. 





일 바깥에서 지내면서 놀랍게도, 나는 별로 하고 싶은 게 없었다. 조금만 쉬면 금세 뭔가 하고 싶은 게 생길 줄 알았는데, 전혀! 긴 여행에서 딱 하나 얻은 게 있다면 스스로를 멀찍이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간이었다.


나는 남들이 알아주는 회사에서 일하거나 대단한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게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사람.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나는 낯선 세상 속에서 인터넷에 검색해도 알 수 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복지 환경에 사는 이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곳에서도 미친 듯이 돈을 버는 사람이 있고, ‘한량’처럼 사는 사람도 있다.  


아주 사소하고 별거 아닌 것에도 즐거워할 줄 아는 사람이 정말 행복하게 사는 법을 아는 것 같다. 주말마다 가는 축구 경기에서 응원하는 팀이 이기든 지든 상관없이 즐기는 사람들, 지나가는 사람이 저절로 미소 지을 만큼 열심히 자기 집 창문을 꾸미는 사람들, 자신의 행색에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유독 오래 기억에 남았다. 아직까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좋은 기분으로 살고 싶다.






김파카 인스타그램 @kimpac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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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계속 그리는 용기 


첫 번째,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독립

0화 ) 예비 퇴사자의 일기

1화 ) 그놈이 그놈, 그 회사가 그 회사

2화 ) 아이쿠, 이 길이 아닌가

3화 ) 이렇게 살기는 싫어서

4화 ) 여행을 떠나 쓴 일기 

5화 ) 인디밴드가 만드는 음악처럼 


두 번째, 월급 말고 돈 좀 벌어보려다가

6화 ) 퇴사의 맛 

7화 ) 돈을 버는 네 가지 방식 

8화 ) 초심자의 행운 

9화 ) 내가 좋아하는 일이 돈이 안 될 때 

10화 ) 자꾸 신경 쓰여, 남의 시선 

11화 ) 올해도 찾아왔어요, 슬럼프 

12화 ) 불안 덕분에 무사히 도망칩니다 


세 번째, 하고 싶은 일로 먹고살기

13화 ) 아, 난 이렇게 하면 안 되는구나? 

14화 ) 그림으로 먹고사는 방법 

15화 ) 나만의 스타일, 대체 그게 뭔데? 

16화 ) 구독자가 늘어나는 과정 

17화 ) 내가 원하는 성공의 의미 

18화 ) 이상하고 매력 있는 그림의 세계 

19화 ) 먹고살기 중간점검 

20화 ) 취미와 직업을 구분하기 

21화 ) 나 이제 좀 알 것 같아! 


네 번째, 아직 유명하진 않지만, 소신껏 길을 걷는 법

22화 ) 아직 바닥을 안 찍었나 봐? 

23화 ) 바닥을 딛고 일어나는 법 

24화 ) 계획보다 중요한 건 루틴을 잡는 것 

25화 ) 나의 결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26화 ) 첫 작품이 망한 것 같은 작가들을 위한 조언 

27화 ) 좋은 피드백과 나쁜 피드백을 구분하는 방법 

28화 ) ‘이것’을 모으면 오리지널리티가 생긴다

29화 ) 어깨에 힘부터 빼고

30화 ) 10년 뒤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에필로그 어차피 언젠가는 독립해야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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