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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나연 Nov 26. 2020

가모라, 강간서사, 그리고 필요불가결한 레트콘

타노스 (2019) 리뷰

*TW: 강간/아동학대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나 이미지는 본 리뷰에 수록하지 않았습니다.*

2019년 초에 <타노스> 시리즈가 맨 처음 연재 발표 났을 때 어린 가모라와 타노스의 관계를 암시하고 있는 커버를 보고 저는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말았어요. 그 이유는 우선적으로 <어벤져스: 엔드 게임> 영화 개봉 시기에 맞춰 MCU 타노스 묘사를, 정확히 말하자면 알량한 부성애를 빙자해 수양딸 가모라를 잔인하게 살해해놓고 그것이 대단한 셰익스피어적 비극인 양 포장한 꼬락서니를 기어이 코믹스에 역수입하려는 걸까봐, 그래서 결과적으로 가모라가 당한 아동학대를 미화하는 코믹스가 나올까봐 지레 겁먹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더욱 큰 이유가 있었는데요. 가모라의 크리에이터 짐 스탈린이 1990년대에 직접 집필한 기존 오리진 스토리가 역겨운 여성혐오로 점철된 강간서사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워록과 인피니티 워치> #9 표지. 과거 어린 가모라와 현재 어른 가모라가 각각 타노스와 갤럭투스의 노리개가 되어 있다.

문제의 스토리는 1992년 10월 발매된 <워록과 인피니티 워치> #9에 있습니다. 이 이슈는 <인피니티 건틀렛>의 후속 크로스오버 이벤트인 <인피니티 워>의 타이인 중 하나인데요. <인피니티 워> 이벤트에서는 코스믹큐브를 모은 악당 '메이거스'가 우주적 존재인 '이터니티'를 혼수상태에 빠트린 적이 있어요. 이때 '갤럭투스'가 '이터니티'를 치료하기 위해 가모라의 의사는 묻지도 않은 채 멋대로 가모라의 몸에 빙의해 '이터니티'의 몸 안으로 들어가 수술을 집도합니다(1). 신체의 자유를 빼앗긴 채로 끔찍한 고통을 느끼며 가모라는 과거에도 이렇게 남의 손에 놀아나 이용당한 적이 있었노라고 회상합니다.


회상 속에서 가모라는 이제 갓 15살. 타노스의 수양딸이 된지 몇 년이 지나 무술을 갈고 닦은 실력가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거친 우주행성 항구에 정박해 내리며 타노스는 가모라에게 경고합니다. '이곳은 어린 여자애가 나다닐 곳이 아니다' 그리곤 가모라에게 함선에 붙어서 기다리길 명령해요. 가모라는 스스로 사춘기였음을, 그리고 실로 오랜만의 상륙이었음을 이유로 들면서 결국 타노스의 명령을 거스르고 항구 곳곳을 돌아다니며 아이들이라면 곧잘 그렇듯이 쇼핑에 푹 빠집니다. 즐거운 한때를 보내던 가모라는 실수로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나쁜 마음을 품은 깡패 무리와 조우하게 돼요. 이때 가모라는 '계집애들 환상에 젖어서 냉정한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고 멍청하게 방심해버리고 만' 과거의 스스로를 질타합니다(2). 가모라는 훌륭한 무술 실력으로 필사적으로 저항해보지만 끝내 수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집단 윤간을 당하게 됩니다.


<워록과 인피니티 워치> #9  마지막 페이지

뒤늦게 나타난 타노스가 사태를 정리한 뒤에 땅바닥에 쓰러진 가모라에게 말합니다. "얘야, 왜 내 경고를 듣지 않았느냐? 지금 네 모습을 봐라. 어리석은 아이 같으니라고(3)." 이때 가모라는 '마침내 나의 왕자님이 도착해 나를 구해주었다'라고 회상합니다(4). 타노스는 가모라의 죽어가는 육신을 뜯어 최첨단 기계로 대체하는 수술을 거행합니다. 눈을 뜬 가모라는 온몸이 기계로 뒤바뀐 지금의 자신을 과연 인간으로 칭할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하며, "인간이었던 시절은 고통과 고독과 눈물 밖에 없었다. 차라리 이런 게 더 낫다."라고 비장하게 읊습니다(5). 타노스는 그런 가모라에게 말합니다. "귀중한 교훈을 배웠구나, 얘야. 네가 자랑스럽다." 가모라는 그날의 경험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날 나는 맹세했다. 절대 다시는 어느 누구도 나를 이용하거나 학대하게 놔두지 않겠노라고.'


회상과 함께 '갤럭투스'의 치료도 끝이 나고, 이터니티의 몸 밖으로 빠져나온 가모라. '갤럭투스'에게 사납게 분노를 표출해보지만 '갤럭투스'는 그런 가모라를 벌레처럼 무시할 뿐입니다. <워록과 인피니티 워치> #9를 닫는 마지막 페이지는 실로 처참합니다. 가모라는 자신을 나몰라라하고 각자의 일에 열중하는 우주적 존재들을 바라보며 더럽혀진 기분, 속을 마구 헤집힌 듯한 기분을 느껴요. 치욕스러운 기분에 심지어 자기파괴적인 충동까지 느껴요. 바닥에 주저 앉은 가모라의 마지막 독백은 비참하기 그지 없습니다. '어떤 오래된 상처들은 결코 아물지 않는 법이다.(6)'




지적할 곳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다 아픕니다. (1)일단 이 이슈에서 가모라는 강간을 두 번 당합니다. 과거에 길거리에서 한 번, 현재 지금 갤럭투스에 의해 또 한 번. 갤럭투스가 몸에 대한 가모라의 자율권을 침해하여 몸속에 강제적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충분히 비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지점입니다. (2)어린 아이가 시장에서 재밌게 놀다가 실수로 길을 잃은 것은 전혀 잘못된 일이 아니에요. 언제든 누구한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잘못된 것은 어린 여자애를 노리고 덮치기로 결정한 깡패들이죠. 하지만 작가는 가모라에게 스스로를 채찍질하는 선택을 쥐어주었습니다. 강간 피해자의 대표적인 피해후유증으로 왜곡된 사고를 통해 죄책감을 갖는다는 점이 있습니다(링크). 가모라는 이 순간 강간 피해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이런 묘사는 몹시 부당하게 느껴져요.


(3)그런 일을 당한 어린 가모라에게 타노스가 건네는 첫마디가 "네 잘못"이라고 책망하는 거라니, 너무 화가 나요. 타노스가 빌런이기 때문에 '나쁜 말'을 할 수도 있는 거 아니냐고요? 그렇지 않아요. 왜냐면 이 이슈에서 타노스는 빌런으로서가 아닌 가모라의 양육자이자 보호자로서 등장하고 있거든요. 오죽하면 (4)타노스의 등장을 든든한 왕자님의 이미지에 빗대고 있을 정도 아니겠습니까. 작가는 명명백백 가해자에게 있는 책임을 도리어 피해자에게 지우는 전형적인 2차 가해를 하고 있어요. (5)어린 가모라가 성폭행이 궁극적으로 나약한 인간의 육체를 탈피시켜 자신을 더 강하게 만들어줬다고 결론을 내리는 이 장면은 얼핏 보면 그럴듯 해도 한번만 다시 생각해보면 정말 끔찍해요. 마치 강간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는 양, 강간이 피해자에게 이로운 일인 양 비춰보이게 만들기 때문이에요.


여성이 강간의 원인을 제공했고 강간에 동의했으며 강간은 여성의 피학적 본성을 만족시키는 행위라는 믿음은 강간에 따르는 전형적인 환상이다. 이러한 환상은 여성이 강간을 즐긴다는 관념을 탄생시킨다. 70년대 남성 작가의 소설에서 강간을 즐기는 여성 표상은 빈번하게 출현한다. 흥미롭게도 강간 행위를 직접적으로 즐기는 여성 뿐만 아니라 강간을 계기로 더 나은 모습으로 재생하는 여성의 표상 역시 드물지 않게 발견된다. 이 경우 여성은 강간을 통해 성장하거나 스스로를 치유한다. 강간이 결과적으로 여성에게 이롭게 작용하는 것이다. 강간을 통해 성장하고 자신을 치유하는 여성 표상은 "결과적으로 강간도 모두 좋게 끝나는 포르노그래피"의 이념을 답습한다. 이러한 여성 표상은 강간이 여성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뿐더러 특정한 도움까지 준다는 강간에 대한 남성적 판타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남성은 강간이 여성에게 이롭고 여성이 강간을 즐긴다는 판타지를 여성에게 투사한다. 여성은 남성의 판타지를 실어나르는 수레로서 존재할 뿐 주체로서 존재하지 못하며, 그 내면은 삭제되고 목소리는 침묵당한다.

박수현, 「1970년대 소설과 강간당하는 여성」, 『비교한국학 22권2호』, 국제비교한국학회, 2014.08.


위 인용에서 연구대상으로 삼고 있는 1970년대 소설 말고도, 그리고 지금 얘기하는 가모라의 오리진 말고도 이런 강간-성장 이야기를 본 게 한두 개가 아니에요. <왕좌의 게임>의 산사 역시 강간을 당한 뒤에 가문을 이끄는 냉철한 리더로 거듭납니다. 뤽 베송 감독의 영화 <안나>에서도 주인공이 상습적인 가정폭력과 성폭력을 겪은 뒤에 일류 암살자로 변모하는 스토리를 갖고 있습니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 2014년 SBS 드라마 <끝없는 사랑>에서도 주인공은 감옥에서 안기부 요원에게 성폭행과 원치 않는 임신을 당하지만 그것을 계기로 운동권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하여 출소하게 됩니다. 판타지 웹소설 <전지적 독자 시점>은 강간미수를 당한 조연이 남주인공에게 구조되어 특별한 능력을 각성한다는 전개를 보여주었어요.


강간에 대한 남성적 판타지


여성이 강간을 통해서 강한 여성으로 거듭나는 양상은 '강간은 여성에게 이롭다' 내지 '여성도 강간을 즐긴다'라는 남성적 판타지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여성혐오적입니다. 여성에게 있어 가장 끔찍한 시련은 강간이고, 강간이라는 시련을 통해서만이 진정 강한 여성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인식을 주입해 강간에 대한 사실과는 틀린 통념들, 즉 강간신화를 독자에게 내면화시킬 수 있어 문제적입니다. 남성 캐릭터가 강간을 당한 뒤에 성장해 더 강한 주인공이 된다는 이야기 보신 적 있으십니까? 저는 없습니다. 묻고 싶습니다. 왜 여성은 강간을 당한 뒤에만 강해질 수 있느냐고요. 강간이 아닌 시련을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강간이어야만 하느냐고요.


(6)마지막 가모라의 독백에 와서는 정말 머리를 세게 얻어 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어요. 힘없이 주저앉아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며 하는 말이 '어떤 오래된 상처들은 결코 아물지 않는 법이다.'라니요. 그 어떤 극복 의지도 암시도 없이, 읽히는 것은 오로지 깊이를 모르는 절망과 좌절 뿐입니다. 이 이슈 읽으면서 심적으로 정말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가모라가 강하게 복수심과 결의를 다지기에, 어떤 시원한 '사이다' 마무리가 있을 거라고 기대했어요. 그런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이것뿐이에요. 잔인합니다. 정말 잔인해요. 가모라가 당한 성폭행을 마지막까지 이렇게까지 묘사할 필요가 이 세상 어디에 있는지 가슴을 치면서 묻고 싶어요. 작가는 대체 이 이야기로 무얼 말하고 싶었던 겁니까? 비참한 불행과 고통을 가히 포르노적으로 묘사해서 얻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걸 쓰는 지금도 가슴이 먹먹하고 눈물이 날 것 같아요.


저는 단박에 글작가 티니 하워드의 트위터로 찾아가 직접 여쭤보았습니다. 가모라의 강간서사가 2019년 온고잉 코믹스에 그대로 재현될까봐 너무 무섭고 걱정된다고 말이에요. 작가님은 DM으로 오셔서, 그때만 해도 아직 발매 전이었기 때문에 스토리에 대한 구체적인 언질은 줄 수 없지만 제가 걱정하는 그 부분에 있어서는 마음 놓아도 된다고 보장할 수 있다며, 안심해도 된다고 답변해주셨어요.


You can feel safe for that.


그 표현을 보자마자 제가 느꼈던 불편한 마음이 어디서 비롯된 거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더군요. 저는 '우주에서 가장 위험한 여자'라 불리는 강인한 여성주인공 가모라조차 내가 사는 현실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젠더권력에 의해 비참하게 착취당해 무릎 꿇고 패배했다는 이야기에 공포를 느꼈던 거였어요. 2016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전국민의 사회적 공포, 거기서 이어진 페미니즘 리부트. 가모라의 오리진 코믹스는 90년대에 쓰였던 것이지만 이 사건들과 결코 멀지 않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 대 여성으로 건네주었던 따뜻한 말 덕분에 저는 행여 강간서사를 마주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없이 편한 마음으로 <타노스>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타노스>는 액자 바깥에 위치한 가모라가 누군가에게 액자 속 이야기, 과거 타노스와 처음 만났을 적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성혐오로 점철된 가모라의 오리진 스토리는 다행스럽게도 이 책을 통해 근 30년만에 변화를 맞았어요. 저는 제게 있어 중요한 두 가지 질문에 초점을 맞춰서 면밀하게 독서했습니다. 첫째, 타노스가 가모라에게 가한 아동학대가 미화되고 있는가? 둘째, 가모라의 오리진 스토리가 어떻게 변경되었는가? 어디 한번 함께 읽어볼까요.


영원히 증축 건조를 반복하는 거대 우주정류장 '제로 생츄어리'의 함장 타노스는 강인하고 잔혹한 부하들 '부처 스쿼드론'과 함께 온 우주를 누비며 살인행각을 해오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라이벌 '메이거스'를 방해하기 위해 평화주의자 민족을 무참히 학살하던 중, 타노스는 난생 처음으로 자신 이외에 '죽음'을 볼 수 있는 여자아이 '가모라'를 만나게 된다.


"(살인을 한 덕분에) 나다운 기분이 다시금 조금이나마 느껴지는구나."


타노스라는 캐릭터를 가장 잘 표현한 대사가 무어냐 묻는다면 저는 단연 이슈 #1의 이 대사를 꼽고 싶어요. 타노스가 참을 수 없는 살인 욕구를 해결하기 위해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의 부하를 잔인하게 살해하는 장면인데요. 여러분은 어떤 일을 할 때 가장 나다운 기분을 느끼시나요? 저는 글쓰기입니다. 글을 쓰는 순간에 가장 나다운 사람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껴요. 제게 있어 작가라는 정체성은 그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타노스 같은 경우는 다른 것도 아니고 살인이 자아정체성과 가장 가까이 묶여있다는 거네요. 무서운 놈 같으니라고. 특히 조금이나마(nearly)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저는 글 한 편을 막 완성했을 때 굉장히 뿌듯한 기분을, 만족감을 충만하게 느껴요. 완성한 글을 몇 번이고 다시 읽으면서 검토하고 생각을 되짚어 볼 정도지요. 그런데 타노스는 그렇지 않다는 거예요. 아무리 살인을 많이 하더라도 늘 부족해요. 어떤 행위를 함으로써 자아실현을 이루는데 그게 언제나 부족하다면, '나다움'에 늘 결핍과 갈증을 느끼는 상태라면 누구라도 미칠 수밖에 없겠죠. <타노스>는 그가 별명 그대로 미친 타이탄이라는 것을 정확하게 짚어주고 있습니다.


"내 그대를 보았다, 죽음이여. 이 요사스러운 것. 똑똑히 보았어! 그대가 어찌 감히 나를 우롱하는가?!"


타노스가 우주적 현상이자 인격체로 형상화된 '죽음'을 오래도록 짝사랑하여 그를 향한 구애 행위의 일종으로 살인을 하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이슈 #1에서는 사람들의 믿음으로부터 힘을 얻는 사이비 교주이자 타노스의 라이벌 악당 '메이거스'를 견제하기 위해 타노스가 개종 후보자들을 절멸시키고자 가모라의 종족 젠우베리의 행성에 찾아가는데요. 그곳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죽음을 발견하고 타노스는 극심하게 분노합니다. 타노스는 죽음을 사랑하고 숭배합니다. 다만 이번 시리즈에서는 분노하고 있어요. 저는 이게 끝을 모르는 욕망과 채울 수 없는 결핍에서 비롯된 애증이라고 생각해요. 죽음은 극단적으로 과묵한 캐릭터입니다. 타노스가 죽음의 대립쌍인 생명을 수도 없이 많이 죽여없애 모두 죽음에게 헌정하여도, 그로써 이 너른 우주에서의 죽음의 영향력을 넓힌다 하더라도 죽음은 결코 타노스의 앞에 나타나지도, 타노스의 부름에 응하지도, 타노스의 사랑에 답하지도 않아요. 사실상 타노스는 너무 오랫동안 짝사랑을 해서 맛이 가버린 사춘기 꼬맹이와 다를 바가 없는 거죠. 저는 원작의 타노스를 찌질한 맛에 좋아하기에(^^)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하여튼 1980년대~1990년대 짐 스탈린이 쓴 코스믹 유니버스 코믹스에서는 좀처럼 보지 못한 재밌는 해석인 것 같아요. [결핍된 삶과 보답 받지 못하는 애증]이 티니 하워드가 쓴 타노스의 키워드가 되겠군요.


"안 돼요! 저를 이 아저씨 곁에 내버려두지 말아요!"


가모라의 오리진 스토리는 총 2번 바뀌었습니다. 1975년의 오리지널에서 가모라의 일족을 몰살한 주체는 메이거스의 사이비 교단이었습니다. 그 현장을 본 타노스가 가모라만을 가까스로 살려내어 일족의 원수인 메이거스를 죽일 암살자로 길러낸 것이지요. 그러다가 1992년에는 젠우베리 족을 학살한 주체는 메이거스가 아니라 바둔이라는 외계 종족인 것으로 바뀌었어요. 2019년 <타노스>에 와서는 학살 주체가 바로 타노스로 변경됩니다. 기존 오리진에서는 가모라와 타노스의 관계를 '윈-윈'으로 만들어서 가모라가 당한 학대의 심각성을 다소 가리는 반면에, 가장 최근의 레트콘(설정변경)에서는 타노스가 가모라의 은인인 동시에 원수도 된다는 이중적인 특징이 두 사람 간의 갈등을 보다 풍부하게 만들어줍니다. 이전엔 그러지 않았지만 이제는 가모라가 일족의 원수인 타노스를 믿고 따를 이유가 새로이 필요하게 되는 거죠.


작가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많고 많은 젠우베리 인민들 사이에서 타노스가 콕 집어 가모라를 살려 거둬야 하는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해줍니다. 난생 처음으로 타노스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죽음의 모습이 보이게 됐는데, 그게 바로 가모라라는 거예요. 타노스가 지니고 있는 죽음을 향한 불건전한 사랑과 집착이 발동하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평생을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던 사람이 나 말고 유일하게 눈길을 준 사람이 또 있다는데, 이유가 뭔지, 정체가 뭔지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요? 또한 죽음이라는 초월적인 존재가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두 사람을 단단히 묶어주고 있어요. 타노스가 가모라를 거둘 수 밖에 없는 개연성을 멋지게 부여했다고 생각해요. 새로 바뀐 오리진 스토리에서 타노스는 가모라를 '원수를 죽일 암살자'로 키울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가모라를 살려둘 이유가 굉장히 한정적이라는 소리예요. 가모라는 타노스가 자신에게 느끼는 흥미와 호기심 이외에 살아남을 수 있는 이유와 방법을 직접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가모라가 주체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원동력이 되어줍니다.

<타노스> #1 가모라와 타노스의 첫만남


그렇습니다. 기존 오리진 스토리에서 어린 가모라가 '현실은 등한시하고 쇼핑 같은 것에나 빠졌음에 징벌 당하는 한심한 계집애'로 묘사되었다면 2019년 시리즈 <타노스>에서는 사방에서 호시탐탐 자신을 노리는 혹독한 환경에서 온갖 재치와 기지를 발휘하여 살아남는, 당당한 생존자로서의 면모를 한껏 보여줍니다. 이슈 #1에서 타노스의 함선이 퍼붓는 폭격에 친가족을 잃었을 때 페이지를 잘 보면요, 가족이 살아있을 때에는 가모라 손에 인형이 쥐어져있어요. 인형은 곧 어린 시절의 순수한 동심을 뜻합니다. 가족이 죽자 가모라는 인형을 땅에 떨어트려요. 타노스가 마지막 남은 젠우베리 족을 죽이기 위해 다가갈 때, 학살의 주체인 타노스가 동심을 상징하는 가모라의 인형을 짓밟는 연출은 매우 타당하죠. 이제 가모라의 손에 들려있는 것은 인형이 아닌 검입니다. 생존을 위해 평화로운 유년을 버리고 검을 들어올려 성숙해지기를 선택한 그는 타고난 전사입니다. 타노스에게 제대로 가르침을 받기 이전부터 가모라는 강인한 사람이었다는 걸 표현해주어서 매우 좋았어요. 시리즈 내내 가모라의 대사들을 잘 살펴보면 이 아이가 자존감이 굉장히 높고 정신적으로 무척 건강하단 걸 알 수 있어요. 그 예시가 너무 많아서 미처 다 소개해드릴 수가 없는 수준이거든요. 가모라는 삶의 주인이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아이가 미친 타이탄의 손에 양육되었어도 이렇게 번듯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거겠죠? 기특해요 정말로.


타노스는 가모라를 학대했는가라는 질문에 작가는 작품 속에서 분명하고 또렷하게 YES라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한창 클 나이에 신체의 많은 부분을 차가운 금속 기계로 대체하게 된 계기가, 다름 아니라 타노스가 가모라에게 신체적인 위해를 가했기 때문이라고 나오거든요. 그래요!!!!! 서론에서 신나게 두들겨팼던 90년대 강간서사는 완전히 없던 일로 바뀌었습니다!!!!! 이게 맞죠, 안 그래요!!!!! 타노스는 가모라를 학살 현장에 데려가 살생을 가르칩니다. 어린애에게 칼을 쥐어주고 생명체를 죽이라고 시키다니, 정서적 학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다가 그만 사고가 나서 타노스가 가모라를 위험에서 구해줄 요량으로 거칠게 패대기를 치는 바람에 가모라의 다리가 심하게 찢어지고 맙니다. 참나, 구해줄 거면 얌전히 구해주기만 할 것이지 왜 사람 다리를 찢어놓고 난리래요? 이때의 패널 연출이나 타노스의 대사, 얼굴 표정 묘사 등에서 평범한 인간이라면 응당 내보일만한 어떤 미안함이나 안타까움 같은 감정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화자인 가모라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타노스를 묘사하고 있기 때문에 실제로 타노스가 어떤 생각으로 가모라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지, 어떤 마음으로 가모라의 목숨을 계속해서 구해주는 건지는 정확하게 나오지 않고 모호하게 처리됩니다. 그건 "죽음을 볼 수 있는 동류"로서의 호의였을까요, 아니면 단지 죽음에게로 향하는 "단서"를 보존한 것뿐이었을까요? 그러나 단 하나 확실한 점은, 타노스의 마음 속에 들끓는 부성애가 발휘되어 "다 너를/모두를 위한 거야"라며 절벽 밑으로 밀어트리는 것 같은 그런 묘사는 전혀 없었다는 거예요. 학대는 학대일뿐. 왜냐면 타노스는 악인이 맞기 때문이죠. 그런 악인이... 대체 왜 어린 소녀를 자꾸만 구해줬을까요?


<타노스> #6
타노스는 그대로 메이거스를 죽이지 않고 자리를 떠난 것에 흡족해하는 것처럼 보였어. 하지만 나는 속으로 몰래, 그날 그때 자신을 죽이라던 메이거스의 말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타노스가 보는 눈 앞에서 내가 놈을 죽이는 걸 보고 싶다면, 왜 그때 날 막아세웠던 걸까? 어른이 된 지금 생각해보면, 이제는 이해가 가. 사실 그는 정말로 내가 놈을 죽이길 원했어.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지. 그는 나의 순수한 동심을, 아직 남아있는 거라도 지켜주고 싶었던 거야. 사람들이 타노스를 마주 대할 때 모두가 놓치는 점이 바로 그거야. 그는 우리와 다를 바 없어.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일 뿐이야.


만신창이가 된 메이거스를 단지 조롱하기 위해서 자신의 손으로 직접 죽이기보다 어린 소녀 가모라를 암살자로 키워내어 메이거스 너를 죽이게 만들 것이라 선언하고 자리를 뜬 타노스를 두고, 가모라는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우는,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라고 평했습니다. 가모라는 누구보다도 타노스를 잘 이해하고 있어요. 가모라가 느끼기에 타노스가 자신을 거듭해서 살려준 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모순적인 양가감정 때문이었다는 거지요. 죽음을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했듯이, 가모라 역시 도구처럼 이용하면서도 동심을 지켜줄 정도로 아끼고 위했다는 거네요. 깊어요, 엄청 깊어요. 이걸 빌런인 타노스를 미화했다고 볼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미안해. 난 내 능력 밖의 일이 뭔지 잘 알고 있어서 그래. 난 너를 올바르게 키워낼 수 없어.""저도 알아요. 누나는 절 구해주는 거예요."


가모라는 정말 강한 사람이에요.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어린이로 환생한 또 다른 메이거스를 악당이라 낙인 찍거나 해를 끼치지 않고 오히려 새로운 곳에서 새출발을 할 수 있도록 자립을 돕고 있어요. 가모라 본인이 어렸을 때 그랬듯이, 어린이 스스로가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그 의지를 믿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겠죠. 더욱이 가모라는 폭력과 학대의 순환고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여전히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메이거스를 가모라가 직접 키웠다간 타노스-가모라-메이거스 3인에게 운명지어진 폭력의 악순환이 반복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눈앞에 어린 아이 너만큼은 그 굴레 속에 갇히지 않도록 바깥으로 밀어내는 모습이었습니다. 학대가정 생존자인 저로서는 정말 감동적인 전개였어요.


(좌) <워록과 인피니티 워치> #9 (우) <타노스> #6


그리고... <타노스>의 최대 의의는 바로 이 마지막 페이지에 있습니다. 아!!!! 진짜 높은 산 위에 올라가서 크게 함성을 내지르고 싶은 기분이 들어요. 가모라에게 강간서사를 부여한 <워록과 인피니티 워치>의 마지막 페이지와 비교하면 더더욱 돋보입니다. 왼쪽. 강간 피해자인 가모라가 넋이 나간 채로 가녀리게 스스로를 끌어안고 땅바닥에 힘없이 주저 앉아있어요. 그녀가 언젠가 그 비극적인 경험을 극복하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일말의 암시조차 존재하지 않아요. 참혹하리만큼 깊고 깊은 절망과 좌절뿐이에요.


이제 2019년 시리즈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세요. 어때요, 어디서 많이 본 포즈죠, 슈퍼히어로 랜딩이죠?! 이 가모라에게는 강간서사는 없지만 그에 못지 않은 비극이 있어요. 아주 어린 나이에 눈 앞에서 온 가족이 절멸했으며 수백 수천번 죽을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가며 필사적으로 생존에 힘을 기울여야 했어요. 가모라가 성인으로 자라나면서 겪은 신체적 정신적 학대는 보통 사람의 정신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예요. 그래서 가모라는 지금도 그 상처를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요. 학대범 양아버지의 환상에 주먹질을 내리꽂으며 애써 분을 삭히죠. 하지만 우리는 알아요. 이 가모라는 언젠가 그 상처를 극복하리란 것을. 아뇨, 극복하지 못해도 좋아요. 마음 속에 상처가 생생하게 피를 흘리는 상태여도 괜찮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모라는 딛고 일어서서 앞으로 나아갈 힘이 있거든요. 신체 언어를 비교해보세요. 남성이 쓴 가모라와 여성이 쓴 가모라의 차이가 느껴지시죠? 아.... 저는 진짜.... <타노스> 시리즈가 얼마나 고맙고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가모라에게 이런 이야기를 부여해주어서, 과거의 여성혐오적 이야기를 열심히 덧대어 없던 일로 만들어줘서 정말 고맙고 감사해요.


여성 작가가 쓴 여성 캐릭터 책은 진리예요. 이렇게 뜻 깊은 책을 드디어 리뷰할 수 있게 되어 무척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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