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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셰 Dec 28. 2022

성실하게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매주 복권을 사는 아버지

부모는 옳지 않다.

    

노동은 생업의 기반이고 생명을 살리는 일이어야 하고, 자기는 물론이거니와 공동체의 이익을 북돋는 일이 되어야 한다. - 작가 장석주   


   


내가 공무원을 그만두고 더 이상 출근하지 않는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을 때 가장 먼저 펄쩍 뛴 것은 아버지였다. 평생을 비정규직 아파트 수리공으로 살면서 자식은 멀쩡히 사무실에 앉아 일하는 화이트 컬러가 되기를 바랐던 아부지.


자신만은 가장 깨끗한 노동으로 돈을 버는 거라며 나름의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그는 퇴사를 고민하는 나에게 정신구녁 빠진 소리라고 혀를 끌끌 차며 매번 내 퇴사의지를 꺾으셨다. 그러면서 매일 새벽 아파트 관리사무소로 출근하는 아빠를 보면서 나약해지는 마음을 다시한번 바특하게 잡아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서는 NO 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엄마와의 통화에서 아빠가 꽤 오래전부터 매주 복권을 사왔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동안 네 아빠가 복권산돈만 모으면 해외여행 몇 번은 갔다 올 수 있었다며 엄마는 불만인 듯 말했지만 나에게는 적잖은 혼란스러움이 밀려왔다. 정말로 아버지는 물질적인 사람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돈 한 푼 허투루 쓰지 않고 나에게 매번 검약을 강조했던 그분이 과연 맞는 것인가?    



 생각해보니 사실 어릴 적부터 집에는 항상 복권 뭉치가 방에 굴러 다녔다. 언니와 나는 항상 그 낙첨된 연금복권 뒷장에 종종 낙서를 했던 기억이 있었다. 힘들게 몸을 굴려 하루를 성실하게 모면해온 아빠의 뒷배경엔 어쩌면 나도 한방이라는 희망이 있었던 것일까.


아빠는 성실을 내세워 어떤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늘 아침마다 아버지는 출근하기 힘들어했다. 고된 노동으로 아침이면 늘 예민했고, 시큰한 파스는 곳곳에 붙어서 생명과 생계를 맞바꾸는 담보딱지처럼 그의 등허리에 서늘하게 붙어 다녔다. 늘 노동에 지쳐 자식들에게 짜증스러운 한마디를 내뱉으면서도 아빠는 저녁시간마다 항상 성실과 검약, 노동의 가치를 저녁마다 반찬처럼 곁들였다.  


몇십 년 동안 근이 박힌 그의 삶은 늘 엄숙함과 긴장감이 흘렀다. 그런 그에게 어렵게 들어간 공무원을 그만둔다고 하는 자식은 치명적 유죄였다. 그런 당신이 자식들 몰래 복권이라니. 생계를 위한 성실은 물론 필요하겠지만 아빠의 성실은 과연 자식들에게 어떤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일까.


 물론 사람들은 솔직하지 않다. 누구나 힘들게 살고 싶지 않고 돈을 좋아하면서도 돈을 미워하고 나태와 방황을 죄악시한다. 근데 왜 부모는 자식에게까지 솔직하지 않은 걸까.  노동을 해야 가장 깨끗하게 번 돈 이라며 내 앞에서 훈계하던 아버지의 뒷주머니에는 이러토록 모순된 열망이 선명한 로또 두장으로 남아있는데..  어쩌면 아빠는 현실 속 무력함을 그저 근면성실이라는 이름으로 교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힘들어도 이 악물고 일해야지.
그렇게 나약해서 어따 쓰겄어?
네 나약한 성격이 문제인거여!

  

내가 타지에서 힘들게 공황장애와 우울증 중증 판정을 받고 정신과약으로 겨우겨우 공직생활을 이어가고 있을때 가장 상처가 되었던 것은 바로 아버지의 한마디였다. 그때 나는 매일밤마다 긴 2m가 되는 멀티탭으로 내 목숨의 둘레를 재고 있었다. 내일은 꼭 죽어야지 라는 말을 아침부터 밤까지 사표처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그런 나에게 버티라고?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나는 뒷목부터 눈언저리까지 벌겋게 달아오른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 말은 나에게 썩은 동아줄 같은 말이었다.


그때 나는 알게 되었다. 부모라고 모두 옳은 것이 아니었구나. 그때부터 나는 세상이 뭔가 나를 단단히 속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정적인 공무원이 최고라고 떠드는 뉴스 기자의 말도, 성실 이 최고라는 부모의 말도, 남에게 피해 주면 안 된다는 세상의 상식도 나는 다시 한번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나는 세상을 좀 비뚜름하게 보는 버릇이 생겼다. 세상은 솔직하지 않고, 진실은 내가 직접 찾아 나서야 한다고. 직접 부딪히고 경험하지 않은 사실은 그저 꽝 복권일 뿐이었다.  아빠가 가르친 잘못된 성실은 하마터면 나를 엉뚱한 길로 데려갈 뻔했다.


퇴사 직전 나는 두 가지 가정을 저울질해봤다. 힘들게 원치 않는 일을 평생 하고 싶지 않다고 순순히 세상 앞에 인정하는 것과, 자신이 부정하는 일을 평생 하며 떳떳하게 살았다고 자식에게 거짓을 가르치는 부모가 되는 것.  나는 차라리 전자의 선택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불행스럽게도 아빠의 궤적을 따라간다면 나 역시 돈을 누구보다 선망하면서 또 돈을 누구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공무원을 그만두기 전 수년동안을 독불장군 아버지와 그렇게 싸워왔다.      

저한테 너무 뭐라 마세요.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할 거예요.  
아빠도 힘들게 살기 싫은 것 마찬가지잖아요.     

그렇게 나는 아빠와의 결전 끝에 비로소 나는 강릉을 떠났고, 지방직 공무원이라는 직함도 벗어던졌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셰어하우스 사업과 1인무역을 시작하고 집에서 일하며, 출근하지 않고도 꼬박꼬박 공무원 월급의 3배 이상의 돈이 매달 입금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리고 글 쓰는 것은 돈이 안된다며 아빠가 애써 저지시켰던 내 작가라는 먼지 묻은 꿈도 다시 꺼내 들었다.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하다. 아이 유치원을 데려다주며 9시부터 6시까지의 시간이 확실하게 돈으로 보장되는 직장인을 볼 때마다 이렇게 살아도 될까 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오기도 한다. 그저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돈이 아닌 방황과 시행착오로 채워야 한다는 것도 막막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빠처럼 남몰래 복권을 사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딸아이가 먼 훗날 비슷한 일로 힘들어한다면 나는 버텨야 할 때와 버티지 않아야 할 때 그리고 성실을 어떤 곳에 써야 하는지 알려주고 싶다. 내 생명을 소진시키면서 까지 굳이 버티지 않아도 내가 재밌고 즐거운 일을 하면서 살아도 된다고, 인생은 그렇게 팍팍한 게 아니라고 조금이라도 내 아이에게 진실과 행복을 떠먹여 주는 부모가 되고 싶다.  자식에게 하는 한마디가 적당히 붉어질 때는 비로소 내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이기에, 나중에 내 딸이 사회에 나가 힘들어할 때에 나는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딸아. 버티지 마. 그렇게 힘들면 그만둬.
세상은 즐겁고 행복한 곳이야.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누구보다 재밌고 행복하게 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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