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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님 Dec 20. 2023

들어는 봤나, 피지컬 시어터 | 공연큐레이션

연극 <네이처 오브 포겟팅> <템플>

공연큐레이션 | '연뮤 입덕'이 늘고 있는 요즘, 어떤 공연이 재미있는지 혹은 함께 보러 가기에, 혼자 보러 가기에 좋은 작품은 무엇이 있는지 주제와 상황과 맞는 공연큐레이션을 선사합니다...라고 쓰고 극에 대한 사실적 정보와 주관적인 감상에 기반한 '영업글'이라고 읽습니다. [편집자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람을 포용하는 언어는 무엇일까? 영어? 글쎄, 연령과 국적에 상관없이 상대를 직관적으로 이해시킬 수 있는 언어는 보디랭귀지일 것이다. 메시지를 직관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상대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몸의 움직임은, 그래서 말소리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갖기도 한다. 이번 겨울, 인간의 몸이 만들어낼 수 있는 움직임을 최대치로 활용하며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세계를 보여주는 피지컬 시어터(Physical Theater, 신체 연극) 두 편을 소개한다.


각 포스터


눈앞에서 펼쳐지는 기억의 세계
<네이처 오브 포겟팅>


55번째 생일을 맞은 톰. 딸 소피는 그에게 손님들이 오기 전 주머니에 빨간색 넥타이가 들어 있는 남색 재킷을 입으라고 당부한다. 톰은 딸의 말대로 하기 위해 옷걸이 앞에 가 선다. 하지만 그 짧은 사이 톰의 머릿속에서 소피의 말이 해체되고, 톰은 남색 재킷이 아닌 교복 재킷을 입는다. 그러자 그의 눈앞에 익숙하고도 생생한 과거의 시간이 펼쳐진다.
사진=연극열전

우선 알아둬야 할 점이 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피지컬 시어터인 만큼, 대사가 거의 없다. 관객에게 전달될 것을 목적으로 쓰인 대사는 오프닝과 엔딩뿐이다. 그 사이 대부분의 장면에서 등장인물들이 하는 말은 객석에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관객 역시 그 말들을 정확히 들으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왜냐하면 그건 그냥 주인공 톰의 기억일 뿐이고, 그 기억 역시 정확한 건 아니라서. 우리가 학창 시절 친구와 함께 갔던 분식집의 분위기는 기억하지만, 떡볶이를 앞에 두고 앉아 친구와 나누었던 말들을 일일이 기억하진 못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그 분위기, 즉 누군가의 머릿속에 남은 어떤 장면들과 풍경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무대는 극장의 기본 무대 위에 무대가 하나 더 올라있는 구조인데, 바로 거기가 톰의 기억이 펼쳐지는 공간이다. 배우들은 그 공간을 중심으로 쉴 틈 없이 소품을 나르고 치우면서 톰의 기억을 조립하고 해체하고, 다시 조립한다. 이건 인간이 실제로 '기억하는' 행위를 시각화한 것이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만든 기욤 피지 연출가는 전문가의 자문을 통해 인간의 기억이 단순한 방식으로 저장되고 재생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았다고 한다. 우리가 A를 기억해 내려고 할 때, 우리 머릿속에서는 실로 복잡한 일이 일어난다. 마치 서재에서 원하는 책만 쏙 뽑아 펼쳐보는 방식이 아니라 A에 관한 흩어진 조각을 소환하고 다시 모아 조립하며 사실상 기억하고자 했던 A의 원안을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기억할 때마다 조금씩 다른 감정이나 기분이 섞이기도 하고, 때로는 왜곡되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는 것이다.


맨 위 시놉시스만 읽고도, 혹은 제목만으로도 추측할 수 있을 테지만 주인공 톰은 잊어가는 중이다. 자기 생일도, 딸의 이름도, 딸이 입으라고 당부했던 재킷의 색깔도. <네이처 오브 포겟팅>은 그런 톰의 머릿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여준다. 그는 교복 재킷을 입고 첫사랑 이사벨라를 만났던 학창 시절을 떠올린다. 이때 무대에는 책걸상이 나타나고, 수업시간에 쪽지를 주고받거나 선생님 눈치를 보며 잡담을 나누던 톰과 친구들의 학창 시절을 보여준다. 그러다 책걸상이 하나씩 사라지면 톰은 엄마의 배웅을 받으며 등교하던 아침으로 돌아간다. 자전거 뒤에 이자벨라를 태우고 달리던 아침. 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어 이번엔 제자들의 책걸상 사이를 거닐던 톰, 이자벨라와의 결혼식, 딸 소피의 탄생… 톰이 잊어가는 중에도 잊지 않으려고 애쓰는 소중한 기억들이 무대에 펼쳐 치고, 또 사라진다. 기억이 해체되며 이사벨라, 엄마, 친구 마이크가 무대에서 사라질 때마다 톰은 괴로워한다. 반복되는 기억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55세 생일 파티를 앞둔 현재와 동떨어진 시점의 이야기들이다. 톰은 그 속에서 '기억을 해체하라'는 뇌의 명령(아마도)에 맞서며 어떤 기억 하나를 되돌리기 위해 분투한다(되돌린다는 건, 그 기억으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도, 기억에서 벌어진 일을 일어나지 않도록 되돌리고 싶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애써 조립한 기억이 해체되고, 다시 조립하는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톰의 절실함이 객석까지 와닿는다. 그 순간 문득, 알츠하이머와 같은 인지증을 가진 사람들은 기억을 잃는 게 아니라 가장 소중하게 여겼거나 혹은 자기 삶에 큰 영향을 미친 특정한 기억에 잠식당해 버리고 만 것이라는, 두껍고 넓은 이불속에서 흩어진 다른 기억의 조각들을 찾지 못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달까.


물론 이건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우리가 치매라고 부르는 인지증을 막연히 두려워하고 비극적인 병이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통해 조금 다른 관점을 갖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게, 내게 조금 위로가 되었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을 추천하는 이유다.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또 다른 매력은 무대 위에서 모든 게 이뤄진다는 것이다. 배우들의 발 빠른 움직임으로 소품이 바뀌며 내용이 전개되는 것은 물론, 연주자들도 직접 무대에 올라 장면마다 담긴 감정을 증폭하는 음악을 들려준다. 라이브, 살아있다는 연극만의 매력을 생생히 보여주는 구성이다. 단 한 번의 어긋남도 용납하지 않는 촘촘한 동선을 완벽하게 소화하는 배우들 역시 <네이처 오브 포겟팅>의 자랑. 내년 1월 28일까지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2관에서 만날 수 있다.


이런 분들이 보기에 좋아요

피지컬 시어터의 매력을 느끼고 싶은 분

연극적 상상력의 경이로움을 느끼고 싶은 분

치매, 알츠하이머, 인지증을 새롭게 이해하고 싶은 분

한 치 오차 없이 딱딱 들어맞는 연기 호흡을 경험하고 싶은 분




당신이 몰랐던 누군가의 세계
<템플>
두 살에 자폐 스펙트럼이라는 진단을 받은 템플 그랜딘은 엄마의 포옹도 거부하고, 또래와도 어울리지 못한다. 중학생이 된 후 자신을 괴롭히던 학생을 때려 퇴학당한 템플은 보다 자유로운 방식의 수업을 지향하는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거기서 비로소 자신을 골칫덩이, 비정상이 아니라 템플로 인정해 주는 선생님을 만난다.
사진=공연배달서비스 간다

지난해 신드롬 급 인기를 얻었던 ENA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 스펙트럼에 대한 사회 인식을 바꾸었단 평가를 듣는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고기능 자폐인이자 변호사인 우영우가 사회인으로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생활하는 적응기를 그린 드라마다. 이와 비교하자면 <템플>은 지금보다도 더 고리타분하고 자폐에 대한 지독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시대에 템플이 어머니와 선생님의 믿음과 지지로 사회에 나가기 직전까지의 역사를 그린다. 미국에서 사용되는 동물 시설 3분의 1을 만든 세계적인 동물학자 템플 그랜딘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었다는 데서 의미가 남다르다.


<템플> 역시 신체 연극이다. 다만 <템플>은 대사가 많다. 인물들이 대화를 주고받고, 때로 객석에 말을 건네기도 하는 <템플>이 그럼에도 신체 연극을 표방하는 데는, 극 중 배우들의 움직임이 주인공 템플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자폐 스펙트럼은, 물론 그 증상의 정도와 종류를 일반화하기 쉽지 않아 스펙트럼으로 칭하지만, 대체로 자극에 민감하다. 비자폐인에게는 조금 큰 음악 소리가 자폐인에게는 찢어지는 비명소리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가벼운 포옹에 온몸이 결박당한 듯한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감각의 차이를 글로만 읽어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템플>이 신체 연극이라는 장르를 활용해 템플의 곤두선 감각들, 그가 받는 자극의 정도를 시각화해 관객에게 보여주는 이유다.


그래서 <템플>을 보고 나면 마치 내가 잠시 템플의 몸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기진맥진해진다. 남들보다 배로 어지럽고 복잡한 세계에서 자폐인이 상대와 눈을 맞추거나, 대화에 집중하는 일, 혹은 눈앞의 상황에 대해 판단하고 행동하는 일련의 과정이 얼마나 힘들지를 아주 조금이나마 체감한다. 바로 눈앞에서, 같은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는 배우들의 움직임으로써 이를 표현하는 신체 연극이란 장르가 아니었다면 절대 가능하지 않았을 경험이다.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건, 앞서 소개한 <네이처 오브 포겟팅>에 출연 중인 배우 김주연, 마현진이 <템플>에도 출연한다는 사실이다. 두 배우는 <템플> 초연부터 함께한 멤버다(물론 <네이처 오브 포겟팅> 역시 초연부터 함께하고 있다). 가히 신체 연극 장인이라고 불릴 만한 두 배우는 <템플>에서도 감탄을 부르는 움직임과 연기로 극을 이끈다. 물론 거의 모든 캐릭터가 아크로바틱 수준의 움직임을 구사해야 하는 극인 만큼 <템플>에 출연하는 모든 배우의 에너지가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내년 2월 18일까지 대학로 서경대학교 공연예술센터 스콘1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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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미있게 본 분

자폐 스펙트럼, 혹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대해 이해를 넓히고픈 분

누군가의 성장을 지지하고 응원하고 싶은 분, 혹은 지지와 응원이 필요한 분

인간의 몸으로 만들 수 있는 예술의 극치를 경험하고픈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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