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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욕심쟁이 Sep 26. 2021

성공한 인생

후회 없는 삶

 충청도의 깊은 산골에서 태어난 내게는 두 명의 오빠와 남동생 한 명이 있다. 이런 내게 사람들은 귀한 고명딸이라고 했다. 고명딸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몸짓을 하곤 했는데 그것은 다 이유가 있었다.



서당 훈장님이셨던 할아버지께서는 내가 태어났을 때 딸이라고 한 달 동안이나 들여다보지 않으셨다고 한다.

엄마는 집안 일과 밭 일이 바빠 나를 자주 안아주지 못하고 누여놓기만 해서 백일이 지나도록 목을 가누지 못했다고 한다. 제법 자라서 엉금엉금 기어 할아버지 방에 갔는데 계집애가 왜 사랑방에 왔느냐고 나를 들어 방문 밖 마루로 던졌다고 한다. 그 시절 딸은 아들과  차별을 많이 받고 사는 때였다. 남의 집으로 시집갈 사람으로 여겨 남의 식구, 껍데기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다. 어린 시절부터 항상 바쁜 엄마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중풍으로 편찮으신 할머니의 시중드는 일도 당연히 내 몫이었다. 이렇게 어린 시절부터 집안일을 돕다 보니 모든 심부름은 딸인 내가 당연히 해야 되는 줄 알았다. 서서 유교적 집안의 딸 비하 교육으로 길들여졌다. 여자는 크게 웃어도 안되고 함부로 말을 해서도 안된다는 어른들의 말씀에 기  죽어 말이 없는 조용한 여자 아이였다. 엄마가 밭에 가셔서 저녁때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으시면 국민학교 1학생인 나는 키가 작아 부뚜막에 올라가 가마솥에 쌀을 넣고 불을 때서 밥을 지어놓곤 했다. 엄마의 칭찬에 목말라했던 행동이었다.  그 시절 부엌 천장 위에 얼기설기 놓여 있는 서까래 위에 커다 구렁이가 나타기도 해서 너무 무서워 방으로 뛰어 들어간 적도 있다. 밤에는 밖에 따로 있는 뒷간(화장실)에 산짐승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고 있어 방안에 요강을 놓고 살기도 했다.


 중학교 때 도시로 이사했지만 나의 생활은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오빠와 동생은 아들이기에 방도 따로 쓰고 책상에서 공부를 했지만 딸인 나는 내 방도 책상도 없었다.  늘 어른들의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심지어 오빠들 심부름까지 해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 자신의 시간은 거의 없었다. 나는 엄마의 로봇인가 생각한 적도 있었다.


"계집 애니까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집에 얌전히 있다 시집가거라"

 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자랐다. 어릴 적부터 자존감이 없는 데다 자신감마저 없으니 대학에 갈 생각도 못했다. 오빠들은 서울로 가 대학생이 되고 난 그런 오빠들을 동경만  할 뿐이었다. 서예를 하며 정숙한 여자로 사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어린 시절 왜 그리도 순종적이기만 했는지 그때  오빠들처럼 대학에 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랬다면 내 인생은 달라을 텐데... 너무나 아쉽다.  연속극에 나오는 귀남이는 부모님과 싸워 억척을 부려 자기 갈길을 열심히 잘도 가던데 난 왜 그리도 나 자신을 낮추며 살았을까.


 내 능력을 키우지 못하고 부모님의 바람대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이후에도 고졸 학력은 스스로 답답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가지고 온 가정환경 조사서에 있는 부모 학력 체크란을 볼 때마다 가슴이 쓰라렸다. 남편 일이 어려워져 수입이 없는 지경에 이르러 세 아이의 엄마로서 책임을 느낀 나는 막내가 7살 때 결국 직장을 구해 일을 시작했다.



 문득문득 방송대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생활고에 찌든 내겐 그림의 떡이었다.  그저 아이들을 위해 가정 일과 직장 생활을 열심히 하며 살았다. 자녀 교육에 중점을 두어 책 읽히기와 인성교육에 신경을 썼다. 아이들에게 화내지 않고 차별하지 않으려 노력했으며 좀 부족해도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이런 노력으로 아이들이 스스로 자립심도 키우고 성실하게  자라주어 지금은 모두 결혼하여 각자의 삶을 잘 살고 있다.


"아이들을 반듯하게 잘 키우느라 고생했다. 네가 가장 성공했다."

오빠의 칭찬을 들으며 내가 비록 더 공부 못한 것을 아쉬워했지만 농사 중에 농사 자식농사는 잘 지었지 하는 만족감으로 살고 있다. 만약 대학에 가서 실력을 키워 내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었다면 내 제자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열정을 바쳤겠지 하는 상상도 해본다. 하지만 내 아이들은 못 만났을 것 같아 너무 슬프다.  이제 자식들의 응원을 받아 오랜 직장 생활을 마무리하고 내가 하고 싶은 취미 생활을 즐기고 있.  어릴 적의 고난은 말끔히 잊고  현재의 내 생활에 행복을 느끼 사니 나름 성공한 인생이 자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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