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1-14
전 편에서 내용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emotipe3/40
"생각해 봤는데 재환(가명)아."
정규 수술이 끝나고 환자를 깨우고 있던 마취과 재환이한테 말했다.
"그냥 법적으로 응급수술실을 무조건 하나 비워두게 하는 것은 어떨까? 병원 경영에는 당연히 안 좋고 비효율적인 행동이지만... 지금 우리 병원의 시스템은 응급수술이 생기면 바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규수술 끝난 후에 붙이거나 정 환자가 너무 안 좋으면 다른 교수님들 눈치 봐가면서 죄송하다고 사죄하면서 그 교수님의 수술을 뒤로 미루고 해야 하는 거잖아. 응급수술로 인해 정규 수술이 밀리면 정규 환자들의 컴플레인도 심하고. 그냥 아예 법적으로 그렇게 해버리면 병원 경영에는 손해지만 그게 맞는 거 아닐까?"
주로 응급환자는 주니어, 즉, 젊은 교수들이나 전임의들이 수술한다. 대부분의 "응급"수술은 사실 몇 시간 기다렸다가 해도 환자가 죽지는 않지만 그 기다리는 시간 동안 고통이 지속된다. 물론 간혹 정말 바로 수술장에 안 들어가면 사망할 수 있는 환자들도 온다. 그런 경우에는 교수님들의 정규수술 중간에 이 응급환자를 끼워야 하는데... 자기 정규 수술이 밀려서 늦게 퇴근하는 걸 달가워하는 교수님은 없다. 그래서 원칙은 정규 수술하는 교수님 중에 가장 젊은 교수님의 수술을 미뤄야 하는데 그게 또 세운 규칙대로 딱딱 떨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젊은 집도의가 환자를 살리고자 시니어 교수님께 수술방을 빌려달라고 눈치 봐가며 부탁해야 수술할 수 있는 시스템이다. 물론 대부분 결국 빌려주시지만... 이 시스템 자체가 불편하다.
뿐만 아니라 응급수술을 정규수술 중간에 끼워 넣게 되면 밀리게 되는 환자들의 민원도 감당해야 한다. 급한 응급환자가 있다면 모든 환자들이 당연히 너그럽게 양보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다른 환자가 사경을 헤매던 지금 당장 자기 병이 제일 서럽고 중요한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남의 큰 상처보다 내 손톱 밑 가시가 더 아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실 딱히 탓할 수도 없다. 정규 환자들이 민원을 넣을 것을 우려해 최대한 응급수술을 피하려고 버티다가 환자가 사망한 사례도 있다고 들었다.
물론 배려심 있고 선한 환자분들도 많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구나라고 깨닫는다.
"그래서 흉부외과는 수술방 하나를 최대한 비워두더라고. 하트(심장) 응급 뜨면 진짜 1분 1초가 급하니까 바로 밀고 들어오게."
재환이가 말했다.
"그래? 우리 외과도 그런 방이 있어야 해! 물론 경영진 입장에선 자원 낭비고 그 방도 정규 수술로 채워놔야 우리 병원이 수익이 생기는 것은 알겠는데... 하아. 결국 모든 게 수가 문제겠지..? 그렇게 안 하면 적자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생각해 보았는데 머리만 더 아파졌다. 그래도 난 계속 상상을 이어가면서 재환이에게 신나게 말했다.
"그래도 그런 게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리고 그 수술방 담당 마취과샘은 응급수술만 마취하는 거 어때? 여유롭겠지! 응급수술이 없으면 쉴 수 있으니까."
재환이가 웃으며 그러면 참 좋겠다고 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그들이 절대 그것만 시킬 리가 없지. 분명 다른 일을 엄청 줄 거야."
재환이가 말한 "그들"은 특정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했고... 동시에 마치 어떤 큰 개념을 뜻한 것 같았다.
"그렇겠지? 하하."
아. 그러고 보니 재환이도 지안이랑 나랑 같은 예과 동기지?
"아 맞다. 나 오늘 이따 지안이랑 협진 수술 있는데."
"어. 들었어. 그 환자 장난 아니던데? 난리더라."
"네가 마취과로 들어오고 나랑 지안이가 같이 수술하면 정말 재밌겠다~ 근데 넌 오기 싫겠지. 크크."
마취하기 어려운 환자라 당연한 것을 가지고 놀렸다. 재환이도 부인하지 않고 웃었다. 어차피 로젯(수술방의 구역)이 달라서 재환이가 들어오는 방은 아니었으니 편하게 장난친 것이다.
"하하하. 힘내, 응원할게."
의대 동기였던 다른 과 친구와 함께 협진 수술할 수 있다는 것은 정말 재미있다. 각자의 전공을 다지며 이제 스텝(비스무리한 것)으로 올라온 우리는 각 분야의 전문가였다. 서로의 수술을 보면서 남의 영역이다 보니 서로 모든 것이 신기해했다.
"우와... 흉강경은 생각해 보니 가스를 안 넣는구나? 포트가 그냥 열려있네?"
나는 신기해하며 지안이에게 물어봤다. 복강경 수술을 많이 하는 나는 포트를 통해 CO2 가스를 주입하는데 그럼 배가 부풀어올라 수술할 수 있게 된다. 대신 가스가 빠지면 시야가 안 나와서 수술할 때 잘 sealing을 해줘야 한다. 그런데 흉부외과는 갈비뼈로 인해 흉곽이 자리 잡고 있어서 그런 것일까? 가스를 주입하지 않고 구멍을 열어두고 흉강경 기구와 카메라를 넣었다.
"아 간혹 넣을 때도 있긴 해! 근데 대부분은 그냥 이렇게 하지. 자... 이게 그 문제가 되는 식도 부분이네."
"헉 저건 설마 lung(폐)이야?? 무서워. 우리는 lung 조금만 봐도 무서워."
"난 stomach(위)이랑 small bowel(소장)이 더 무서워!! Lung은 별거 아냐~"
"아니 lung이 더 중요하지 뭔 소리야." 흉부외과 선생님이 폐보다 소장이 무섭다고 하니 난 빵 터졌다. "Stomach은 혈류도 빠방하고 두껍고 질겨서 괜찮은 놈이야! Small bowel도... 음... small bowel은 비교적 연약하긴 하지."
그래. 그건 좀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잘못 다루면 찢어져."
"그렇긴 해... 그래도 lung이 훨씬 무서워!"
신기하게도 외과의사는 자기가 다루는 장기가 제일 편하고 익숙하지 않은 다른 장기들은 두려워한다. 예를 들어 위 수술하는 의사들은 췌장을 조금만 만져도 조마조마하시는데 췌장 수술하는 의사들은 의외로 대담하게 췌장을 다룬다.
이런 잡담을 함께 이어가면서 어느덧 수술이 끝났다. 수술이 끝나니 저녁 8시가 좀 넘었다. 수술 때문에 우리 둘 다 저녁을 못 먹어서 함께 근처에서 식사하며 술 한 잔 하기로 했다.
이자카야에서 맥주 한 잔 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함께 협진 수술을 하고 시원한 생맥주와 같이 마무리하는 것이 바로 우리 서젼들의 낭만 아닐까? 이 맛에 수술하는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던 보람찬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