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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노무사 Oct 20. 2020

기억에 남는 면접관

한 번의 지원, 수 년간의 면접

후배가 이직을 위해 면접을 봐야하니 팁을 달라며 전화를 걸어왔다. 잘 알지 못하는 산업군의 기업이었고, 한번도 유사 업종에 지원해 본 적이 없어서 해 줄 말이 없었다. '면접관과 너의 궁합이 중요하지 않겠냐'는 진리에 가까운 농담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면접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와 궁합이 좋았던, 나에게 '지적질을 한' 면접관이 떠올라 글을 쓴다.


벌써 6,7년 전이다. 노무사 시험에 합격하면 노무사들의 사회생활 시작은 크게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남의 일 말고 나의 일을 할거라며 호기롭게 개업 하는 노무사, 일단 일을 배우자며 노무법인에 취업하는 노무사, 그리고 나처럼 노무사라면 조직 생활을 해봐야 한다며 기업에 입사하는 노무사. 조직 생활을 위해 기업 입사를 택한 노무사들은 제조업이면서, 노동조합이 있으며, 노사관계 이슈가 많은 회사를 선호한다. 이러한 요건을 갖춘 대표적인 기업은 바퀴가 네개 달린 제품(?)을 만드는 H사이고 필자 역시 H그룹의 한 계열사에 지원했다.


비교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취업이 급하지 않았다. 큰 부담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지원했는데 운이 좋게 서류, 인적성검사를 통과하고 1차 면접에 응시할 기회를 갖게 됐다. 지원한 회사의 본사가 서울이 아니어서 면접 장소로 이동이 걱정이었지만 대기업 답게 지원자들에게 셔틀버스를 제공한다는 공지를 띄우며 걱정을 날려줬다. 버스를 타러 지정된 장소에 가니 내 또래의 셀 수 없이 수 많은 사람들이 정장을 입고 모여 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모습에 육두문자가 태생적 목적을 역행해 욕이 아닌 감탄사로 활용됐던 기억이 난다.


면접은 1:1영어 면접, 역사 시험, 역량 면접으로 진행됐다. 영어면접을 진행하는 원어민과 최대한 눈을 마주치며 생긋생긋 웃다보니 15분이 지나있었다. 무슨 내용이었는지는 영어면접 시작시부터 약 6,7년이 지난 지금까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역사 시험은 몇 개의 객관식과 몇 개의 단답형, 두 개의 서술식 문항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서술식 문항중 하나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한 의견을 기술하라는 것이었고 비판인척 하는 비난을 신랄하게 적어냈던 기억이 난다. 역사 시험까지 마친 뒤 역량 면접 시험 장소로 이동했다.


역량 면접은 주어지는 문제에 대해 전지에 간단한 발표문을 작성한 뒤 면접관들에게 발표 후 질의응답을 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주제는 "경영권과 노동3권이 충돌하는 경우 무엇을 우선시 해야 하는가"였다. 문제를 보는 순간 노무 직무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데 아주 적절한 문제이며, 노동관계법령에 대한 이해와 균형잡힌 시각을 테스트할 수 있는 훌륭한 문제라는 자체적인 평가를 내렸다. 물론 후한 평가의 이유는 해당 문제에 대해 내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지에 목차를 고심해서 작성한 뒤 발표를 시작했다. 기억이 흐릿해 정확하지는 않지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중심으로 발표했던 것 같다. <경영권은 헌법상 직접 명시된 기본권이 아니고 재산권 내지는 자유권에서 도출되는 권리, 즉 한번 작업을 거쳐야 나오는 기본권인 반면에 노동3권은 헌법 제33조에서 직접적으로 보장하고 있는 기본권이므로 양 기본권이 충돌하는 경우 노동3권을 우선하는 것이 타당함. 다만 어느 한 기본권을 무조건적으로 보장하고 나머지 기본권을 무시해서는 안되고 규범조화적 해석을 통해 충돌하는 기본권이 모두 실현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음>


지금 봐도 법리적으로 크게 오류가 있는 답은 아니었고, 발표후 얼른 스캔한 몇 몇의 면접관님들 역시 흡족해 하는 모습을 확인했다. 그런데 그 때 부터 문제였다. 면접관님중 한명이 질문했다. "지원자는 노무사 자격을 보유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지원자들이 불리한 상황 같습니다. 추가 질문을 받을 의사가 있나요. 당연히 지원자만 추가로 질문을 받는 것은 불공평하다 할 수 있으니 거부해도 좋습니다."라는 질문. 내가 노무사 자격을 보유한 것이 왜 다른 지원자들에게 불리한 상황인건지 인과관계가 전혀 이해되지 않았지만, 호기롭게 "질문 받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면접관님이 질문했다. "우리 회사가 근로자의 임금을 정한다면 어떤 과정을 거쳐서 정하는 것이 타당한가요?"라는 질문. 문제를 듣는 순간 노무 직무에서 일할 직원을 뽑는데 아주 적절한 문제이며, 인사관리에 대한 이해와 균형잡힌 시각을 테스트할 수 있는 훌륭한 문제라는 자체적인 평가를 내렸다. 물론 후한 평가의 이유는 앞서와 마찬가지로 해당 문제에 대해 내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기 때문이었다. 인사관리 지식을 응용해 답하면 간단한 질문이었다. 역시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다음과 같이 답했던 것 같다. <임금수준은 법상 최저임금을 최저한도로, 기업의 지불능력을 최고한도로 해서 범위를 정한뒤 기업에서 추구하는 전략에 따라 그 범위 내에서 결정할 수 있음. 선도 전략, 동행 전략, 추종 전략이 있을 수 있고, H사는 바퀴 네 개 달린 제품의 선두주자이니 임금수준 역시 선도전략을 취해 인재를 영입하는 것이 타당함. 따라서 H사가 인건비로 감당할 수 있는 지불능력의 최대치에 근접하는 것이 적절함>


5인의 면접관님들 중 4인이 흡족한 표정을 지었고, 1인은 무표정이었다. 질문했던 면접관님이었다. 내 답변에 대한 평가를 하지 않고 재차 질문했다. "마지막으로 한가지 질문을 더 받을 의사가 있나요?"라는 질문. 두 번의 테스트를 나름대로 훌륭히 마쳤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가득찼던 나는 "네 받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면접관님이 질문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노동3권과 경영권이 충돌하는 경우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지원자가 공부한 노동법, 인사관리 지식을 사용하지 말고 답해보세요."라는 질문.

내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사용하지 말고 답하라는 요구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었고, 머릿속에는 여전히 규범조화적 해석, 재산권, 자유권, 노동3권과 같은 법률 용어만 맴돌았다. 대답은 했으나 중언부언하는게 스스로도 느껴졌고, 사실상 처음 했던 답변과 다르지 않았다. 지식을 사용하지 말라는 전제조건을 전혀 충족시키지 못했다.


면접관님이 드디어 본인의 답변을 이야기 하며 나에 대해 평가했다. "경영권은 밥상을 차리는 문제이고, 노동3권은 차려진 밥상을 나눠먹는 문제입니다. 밥상이 차려진 뒤 어떻게 나눠먹을지 고민하는게 밥상이 차려지기도 전에 나눠먹을 것 부터 고민하는 것보다 타당하지 않을까요. 지원자는 사고가 경직돼 있습니다. 한 분야만 공부하면 그렇게 됩니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세요.". 1차 면접이 그렇게 끝이 났다.


1차 면접에 합격했고, 2차 최종 면접 역시 합격했다. 다른 기업에 중복 합격되어 이 회사의 입사를 포기했다. 당시에는 사회생활을 해 본 적이 없어서 '직장 상사'라는 존재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다. 어느새 상당 기간 사회경력이 쌓이고 나니 가끔 궁금하다. 내가 그 회사에 입사해 연이은 질문을 했던 면접관님과 상사와 부하직원의 관계로 연을 이어갔다면 나는 그를 어떤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을까.


궁합이 몹시 좋았던, 지적질을 한 면접관 덕분에 항상 걱정한다. 내 사고가 경직되어 있지 않을까.


한번의 입사지원으로 몇 년 째 면접을 보고 있는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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